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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07)] 77. 캐나다(Canada)-2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07)] 77. 캐나다(Canada)-2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3. 내가 만난 사람들 (1)

(Mel Lastman 시장)

▲업무지시하는 Mel Lastman 시장 (c)시사타임즈

Mel Lastman은 1933년생으로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태계 이민 2세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토론토 창업학교 1기 수료식 장이다. 그는 토론토 노스욕 시장이었다. 타고난 근면과 성실로 노스욕 시장에 연속 5번째 당선되어 20년 째 근무하고 있었으며 노스욕 골목골목까지도 꿰뚫고 있는 그곳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집안이 빈한하여 고등학교 중퇴 후 중고 가구 판매인으로 시작하여 기업가로 성장한 후 39세인 1972년에 노스욕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한인 투자 이주자의 중요성과 이들 창업교육의 중요성을 이경수 소장으로부터 듣고 강의실을 제공해 주었으며 수료식에도 직접 왔다. 우리 투자이주자들의 어려움을 직접 듣고 해결해주겠다고 하자 우리 이주자들은 크게 기뻐하고 고무되었다. 토론토의 노스욕시는 서울의 강남구에 해당된다. Mel Lastman 시장은 내가 토론토 근무를 마친 후 메트로 토론토시장으로 두 번 당선되어 또 6년을 봉사하였다.

 

Lastman 시장과 같이 우리 이주자들에게 상담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노쓰욕 시청 Cognan 투자과장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는 나와 동년배였고, 이태리계 이민자 4세였으며 우리 이주자들을 동포인양 잘 대했다. 나는 그와 주말이면 같이 운동도 하며 친구처럼 지냈다. 그가 2001년도에 나를 찾아 서울을 방문하여 우리는 감격의 포옹을 했다.

 

또한 토론토의 자랑인 프로야구 Blue Jays는 봄, 여름, 가을을 열광케 한다. 실제로 내가 토론토에 있을 때인 1992년과 1993년은 연속 월드시리즈를 처음 제패하여 온 토론토가 뒤집어졌다. Mel Lastman 시장을 만났을 때 이를 축하해줬더니 그게 다 내 덕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토론토가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떠난 후 우승을 다시 하지 못했으니 그게 영 빈 말만은 아닌 것 같다.

 

(Raymond 조성준 시의원)

 

한국명 조성준이며 1939년생이다. 인천출신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주한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다 결혼 후 부인 박순옥과 같이 토론토로 이주했다. 나의 대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오드리 햅번과 똑같이 생긴 부인은 이대 영문과 출신으로 같이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연애결혼 했다. 내가 토론토에 부임했을 때 그는 토론토 시의회 재선 의원이었다. 그는 유창한 영어 구사자이나 아침 5시면 일어나서 지금도 큰 소리로 신문 사설과 영어성경을 읽는 것이 30년째 습관이란다. 이민 1세대가 임명직이 아닌 선거 직에 당선되기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가 아닐 수 없다. 근면 성실함이 없이는 되지 못한다.

 

▲Raymond Cho 의원에게 감사패 수여 (c)시사타임즈

그의 선거구는 토론토 스카보러시로 유권자만 11만 명이라 했다. 시정으로 바쁜 그가 협력단 투자이주자 창업학교 수료식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우리 이주자들의 어려움을 들었다. 그리고 도와주었다. 우리 이주자들도 그의 3번째 시의원 선거 때 선거자금과 선거운동 봉사 지원으로 보답 했다.

 

그 당시 캐나다 선거법에 의하면 개인이 어느 후보자에게 500불을 공식적으로 후원하면 선거 후에 400불을 국가에서 변제해 주었다. 나는 처음에는 이 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국가에 돈이 많으면 빈민구제 사업을 할 것이지 왜 정치자금을 대주나?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좋은 제도임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반 국민이 잘 살수록 정치에 무관심하기가 쉬운데 민주정치에서는 무관심이 얼마나 독소 요소인가? 그런데 정치자금을 변제해주는 제도는 국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없애고 직접 참여를 유발하는 좋은 제도이지 않은가? 대의 민주주의에서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자기의 주장과 가장 유사한 정치인에게 투표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우리 이주자들은 각기 500불씩 모아 조 후보에게 전달하였다. 조 후보가 그때 3선에 성공하였음은 물론, 그 후에도 시의원에 계속 당선되어 8선을 마치고 현재는 주의원으로 활동 중에 있으니, 그의 근면과 성실, 그리고 토론토에 대한 사랑이 가히 어떠한가를 알 수 있다. 토론토 역사상 최장기 의원이란다. 이민 1세가…….

 

조성준 의원은 서울에 오면 꼭 나를 찾는다. 아마 후배가 사랑스러운 모양이다. 그는 내가 개도국을 돌면서 하는 일들을 듣고 나보고 자랑스러운 후배란다. 그리고 새마을운동 전도사란다. 나는 단지 한국의 자금으로 그들을 돕고 한국의 성장 이야기만 전하고 있는데……. 너무 과분한 말씀이다.

 

조성준 의원이야말로 내가 존경하는 선배이다. 그리고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선배님 건강하세요. 그리고 좋은 후계자 키우세요.” 사실 2004년 말 그가 한국을 찾았을 때 교민 중에서 후계자를 찾으라고 말씀드렸더니, 후계자는 키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장하여 찾아와야 된다는 것 아닌가? 나는 당시에 의아해 했지만 지금은 이 말을 이해한다. 모든 이는 누가 도와주기에 앞서 스스로 자기를 탁마하여 자기 계발을 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조 의원님, 아직도 한국계 중에서 후계자를 못 찾았나요? 그러면 스카보러 유권자들에게 후계자 문제는 일임하시고, 그렇게도 못 잊는다는 고국에 자주 오세요. 저도 이제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었으니 고국산천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상철 목사)

 

1924년생으로 시베리아에서 태어났다. 이목사의 조부는 함경도에서 살았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합병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시베리아로 이주했다. 시베리아에도 공산교육이 시작되자 7살 때 그의 부친은 공산교육을 시킬 수 없다 하며 중국으로 이주했다. 해방 후 평양으로 온 이상철 목사는 북한의 현실에 실망하고 서울로 남하했다. 그리고 1969년에 토론토로 이민 와서 정착했다.

 

빅토리아 대학교 총장과 캐나다 기독 총연합회 회장(한인 연합회가 아니라 캐나다총연합회임)을 역임했다. 북미 한인교민사회의 정신적지주이며 권위주의 시절엔 북미 인권운동의 대부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친구이며 강원룡 문익환 목사 등과 인권운동을 같이 했다. 실제로 내가 토론토에 근무하던 1993년에 뉴욕을 방문한 김대중 선생은 그를 만나러 토론토를 방문했다. 그때 유종근 박사가 김대중 선생을 수행했다. 그 때 나는 이 목사와 김대중 선생을 처음 만났다. 여러 사람과 같이 악수만 한 정도지만…….

 

나는 이 목사를 찾아가 한인투자이주자를 위한 창업학교 교장을 맡아 달라고 하자 그는 기도를 하더니 쾌히 수락했다. 나중에는 골프도 몇 번 같이 했다. 그때 70이 넘었는데도 드라이버 비거리가 나를 압도할 때가 많았다. 이 목사님은 나에게 1970-1980년도에 출국자에 대한 소양 교육을 실시할 때, 캐나다 여행객들에게는 이상철 목사는 빨갱이니 만나지 말라고 교육했다고 말했다.

 

▲이상철 목사, 조성준 의원, Mel Lastman 사장과, 1993.9 (c)시사타임즈

이 목사는 북한지원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2001년도에 이목사는 KBS의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그때 내가 협력단 본부 프로젝트팀장으로 근무할 때인데 80세의 백발이 휘날리는 모습으로 예고도 없이 우리 사무실로 나를 찾아와 협력단에서 북한을 도와 줘야한다고 열변을 토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북한지원사업은 헌법상의 문제로 통일부 소관이라고 설명 드렸더니, 법을 고처서라도 대북 지원을 우선하라고 하였다. 그 후 이 목사를 만나지 못했으나 2007년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고, 2009년 그가 시국선언에 참여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아직도 옳은 일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의 열정을 배워야겠다. 이제 90이 훨씬 넘었겠지만 아직도 정정하실 것이다. 2011년에는 회고록 ‘열린 세계를 가진 나그네’를 냈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 이 목사님 만나면 골프 한번 모셔야겠다. 아직도 나보다 더 장타인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목사님, 지금도 저보다 장타 날릴 수 있지요? 서울에 오시면 제가 필드에 모시겠습니다.”

 

▲2017.1.28. 토론토에서 서거했다는 인터넷기사를 오늘 확인. 명복을 늦게나마 빔 (c)시사타임즈

(심상욱 투자이주전문가)

 

1947년생으로, 서울출신이다. 한국인 온타리오 투자이주자의 대부이다. 캐나다 이민 전문변호사 2명과 함께 이주 알선 회사 PGS사를 1986년도에 설립하여 해외개발공사와 계약을 맺고 온타리오 투자 이주를 활발하게 추진하였다.

 

182cm에 80kg의 보기 훌륭한 체구에 그레고리 펙을 연상하는 풍모를 지녔다. 재산도 남부럽지 않게 모았다. 딸만 넷이 있었으며 맏상제가 없다고 항상 걱정했다. 이민자의 대부가 캐나다에서 죽은 후 제사를 지내줄 아들이 없음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민 나온 사람도 한국 사람은 별수 없나 보다. 그런 그에게 동갑내기 이경수 소장이 아들 낳는 비법을 전수해줬다. 그 전수를 받은 후 기적 같이 심 이사도 1992년도에 아들을 하나 낳았다. 젖먹이를 안고 다니며 맏상제라고 누구에게나 자랑하고 다녔다. 이 소장의 비법 전수로 아들을 낳은 심 이사는 동년배인 이 소장을 깍듯이 모셨다.

 

장남인 이경수 소장도 딸만 둘을 두었었다. 부모의 성화에도 딸만 둘 고수하다 1987년에 부인이 단독으로 결심하고 단산 수술을 했다. 이 소장도 아들 미련을 끊었다. 그러자 부모의 성화도 그쳤다. 아들 낳기 문제가 매듭 된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소장 부인이 날마다 꿈에 시달렸다. 이소장이 딴 데서 아들을 낳아 자기한테 기르라는 꿈이 계속되었단다. 이 소장 부인은 단산 수술 3개월 후 다시 단독으로 결심 하고 복원수술을 했다. 여자의 임신 복원 수술은 당시로서는 죽음을 각오한 위험한 수술이었다. 그 후 아들 낳는 책을 섭렵하고 용하다는 한약방을 찾아다니고……. 그리고 길일에 합방 시 거사하는 몸의 방향까지 택하여 사랑의 거사를 치렀단다. 그리고 1989년 아들을 낳았다. 그가 함평이씨 17대 장손 이건일이다. 한 때는 씨름 선수일 정도로 몸이 건장하다. 그는 육군을 만기 전역하고 일본에서 사업하려고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다. 지금은 일본에 가서 사업 준비를 하고 있다.

 

“캐나다로 이민가고 싶은 분 심상욱 이사 찾아가세요. 1-xxxx-3456.

세상에, 아들 낳고 싶은 분 이경수 소장을 찾아가세요. 82-10- xxxx-1982”

 

(김학필, 김연수, 임방식 사장)

 

김학필(1947년생) 김연수(1947년생) 임방식(1950년생) 이 삼총사 부부를 보면 ‘부부의 연이 어떻게 맺어지든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세 부부는 1980년대 초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시기에 토론토에 정착했으며 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있다. 본인들 생각은 아직 멀었다지만……. 동향이어서 바쁜 가운데도 주말이면 같이 운동하며 향수를 달랬다. 세 부부가 다 싱글 핸디캡이다. 노래 실력은 다 가수다. 운동 후 으레 가라오케가 설치된 임방식 사장의 집에 모여 한 잔하며 노래를 부르며 향수를 달래기 때문이다.

 

김학필 사장은 캐나다에서 부동산개발자이다. 한일은행 등 국내 기업은 물론 캐나다 유수 기업체의 건물을 그가 개발했다. 당시 캐나다 한일은행 박장헌 행장은 김 사장이 개발한 빌딩에 저렴한 가격으로 입주했다며 좋아했다. 김 사장은 대학 졸업 후 삼성에 다니며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규모 군납을 성공시켜 삼성물산에서 그의 사업수완을 알아줬단다.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도 여러 번 만났단다. 김사장은 제네바에서는 우리나라가 베트남과의 수교할 때에도 민간인으로서 막후에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했단다. 그런데, 십년 넘게 잘 지냈다던 첫 부인과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도 성격차이로 헤어지고 미모의 광주 부잣집 딸과 1988년 결혼하였다. 불론 부인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16세 연하로 초혼이었다. 1992년 내가 토론토에서 이 부부를 처음 만났을 때 이들은 3살, 1살배기 딸과 아들을 두었다. 김학필 사장은 전처소생에게도 상당한 양육비를 매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재혼한 부인과 금슬이 누구보다도 좋았다. 그 후 김학필 사장은 캐나다 굴지의 회사인 롬바르디 서울 사무소장 겸 용인경전철주식회사 사장으로 서울에 근무하였다.

 

1992년 내가 토론토에 도착 했을 때 김연수씨는 노바스코샤 은행의 부장이었고 부인 유명숙(1952년생)씨는 토론토에서 이름 그대로 가장 유명한 공인회계사였다. 건장한 아들 둘은 당시 고교생이었다. 고창과 정읍이 고향인 이 둘은 우연히 기차에서 만났단다. 첫눈에 김연수에 반한 유명숙은 집안 친구 등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했다. 167cm에 51kg의 S라인 몸매에다 Jennifer Jones의 얼굴을 가진 명문 여고와 명문 대학을 나온 유명숙. 그녀의 동창생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새침때기 유명숙의 배필은 적어도 학벌은 하버드대, 집안은 장관 과 대학총장이 줄줄이 나온 명문가, 재산은 국내 10대 재벌, 용모는 윌리암 홀덴이나 로버트 테일러 이상은 될 줄 알았다 한다. 그런 남자가 안 나타나면 김옥길 총장의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했단다.

 

그런데, 지방대 출신의 무명 씨름 선수인 김연수, 그 시골뜨기를 어떻게 유명숙 공주의 배필로 주위 사람들이 인정하겠는가? 유명숙씨는 나에게 말했다. 김연수씨의 역삼각형의 모습을 본 순간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내 남자야!’라는 생각만 들었단다. “내 친구들 말이 맞았을 거예요. 어지간한 남자는 보이지가 않았으니까요. 결혼 생각도 없었고……. 그런데 이정도면 성공한 거 아니에요? 학벌이 없고, 명문가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지만, 용모만큼은 로버트 테일러보다 훨씬 나으니까요.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했는데 저는 맨 처음의 신(身)을 택했어요. 은메달 열개보다 금메달 한 개가 더 값지지 않아요?” 그리고 결혼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단다.

 

결혼 후 시골의 무명 씨름 선수가 학력 위주의 서울에 발붙일 곳이 없어 둘은 혈혈단신 이민 길에 올랐고 둘은 영어를 밤 잠 안자며 익혔단다. 김연수씨는 캐나다 최대 은행에 들어가 부장까지 승진해 있었다. 김연수 부장의 영어발음과 구사 능력은 외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 대사관에 근무하다 이민 와서 토론토 시의원에 재선된 조성준 의원만큼 좋았다. 노력하는 자를 이길 자는 없다. 거기다 한국에서 KOICA를 통해서 투자이민자가 줄을 이어 오니 은행에서 그의 입지도 튼튼했다.

 

임방식 사장은 서울대 졸업 후 직장에 다니며 고향 전주에 내려가 선을 본 처녀(1954년생)에 대뜸 반하였으나 처녀의 반응은 냉담하였단다. 임 총각의 열띤 일 년간의 구애에도 처녀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1년간의 편지, 선물 공세, 중매쟁이를 통한 공세에도 난공불락의 처녀는 형 임윤식이 써준 시를 보고 마음을 열어 드디어 둘은 결혼했다. 2002년도에 내가 처음 만났을 때 중학교 다니는 딸 둘을 두고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지냈다. 임방식 부부는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마트를 잘 운영하여 교민 가게 중 가장 큰 규모로 잘 운영했다. 그 후 가게는 부인이 전담하고 임방식 사장은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조명기구 등 한국의 물건을 수입하여 캐나다에 납품 했다.

 

형 임윤식도 같이 캐나다로 이주하여 우리 교민들이 하는 마트 사업을 하였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동생에게 연애시를 써주던 타고난 문필은 어쩔 수 없어 토론토 민주일보 등을 창간하였으나 항상 적자 운영이었다. 그러나 운영에는 끄떡없었다. 왜냐하면 1977년 동생에게 써준 연애시 한편 값을 동생과 제수에게서 받고 또 받고 하는 것이다. 그 연애시 한편이 그에게는 평생의 화수분이 된 것이다. 그 자금으로 적자 신문사도 꾸준히 운영하고, 아마 지금도…….

 

아마 이번 토요일에도 세 부부는 또 만나 토론토 근교 어느 골프장에서 운동을 할 것이다. 임윤식 발행인은 방에 앉아 한국의 다음 대통령 선거에 관한 시론을 쓰고 있을 것이다.

 

이 세 부부가 얼마나 변했을까? 아마 머리는 반백 넘어 올백으로 가겠지만 부부간의 그 사랑과 그들의 우정은 변함없으리라. 그리고 주말이면 모여 같이 운동하고 또 향수를 함께 달랠 것이다. 우리 한인 이민 1세들의 삶의 길 아니겠는가? 긔고 그의 2세들은 그곳 주류 사회로 굳세게 뿌리 내리리라.

 

(장추국 한인회장, 이상훈 한인회 이사장)

 

내가 1992년 7월 토론토에 도착했을 때 10만 한인을 대표하는 한인회장에 장추국(1944년생), 이사장은 이상훈(1953년생)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새로 들어오는 투자이주자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부탁하기 위하여 찾아가 면담했다. 두 한인 지도자의 키는 160cm를 갓 넘는 단신이었으나 눈빛은 강렬했다. 그들은 신입 이주자들 정착 지원이 한인회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에 적극 지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우리 사무소가 개설 운영한 투자이주자 창업학교 2대, 4대 명예교장으로 위촉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토론토 한인 나무심기 행사, 1993.4 (c)시사타임즈

나는 이상훈 한인회 이사장과 장추국 한인회장 그리고 조성준의원이 주도하는 나무심기 운동에 관광공사 지일현 부장, 김기현 차장, 진수남 가족과 함께 매년 적극 동참하였다. 또한 아영이의 캐나다 친구들도 초대해서 같이 참가했다. 교육적으로 좋은 행사여서 아영이 친구의 부모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도 받았다. 한인들이 매년 펼치는 식목행사에 캐나다 언론들도 큰 관심을 갖고 보도했다. 김기현 차장의 딸과 아들 예진과 우진은 토론토 신문에 식목행사 모델로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이상훈 이사장은 후에 한인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회 활동을 계속했다. 이상훈 이사장은 신일고등학교와 외국어대 포르투갈어과를 졸업하고 효성(주) 기획실에 근무하다 토론토에 이주했다. 부인은 키가 170cm로 이 회장보다 훨씬 컸으며 딸 쌍둥이를 두었다. 이회장의 부친은 전주고등학교 출신이었다.

 

내가 2010년, 아이티 근무를 할 때 이상훈 회장이 토론토에서 봉사활동하기 위하여 아이티에 왔다. 우리는 봉사활동 현장에서 우연히 17년 만에 만나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날 밤새워 이야기했다. 내가 토론토 떠난 후 그의 부모가 떠난 것까지는 예상했던 터였다. 그런데, 그보다 10세 연하의 부인이 4년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훈 회장은 부인 별세 후 충격을 받아 하던 사업을 접고, 신학대학에 입학했단다. 2011년도 당시 3학년이며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으면 중남미 선교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한다. 그것이 부인에 대한 자기의 최소의 도리라고 말했다. 부인은 독실한 신자로 교회에 봉사하였으나 자기는 사업과 한인회 일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람을 부르고 사역을 준다는 거였다. 나는 그것은 모르겠다. 그러나 아내를 사랑하는 이회장의 그 마음은 알 것 같았다.

 

(김범신 이동재 주진옥)

 

김범신(1953년생), 이동재(1955년생), 주진옥(1957년생)은 토론토 이주 동기생이고 다 전북출신으로 동향이어서 친 형제처럼 지낸다. 호칭도 그렇다. 형 하면, 응 동재야, 진옥아……. 그렇게. 아마 이들이 토론토 이주자의 표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 같이 마트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시간을 내어 운동하며 건강도 유지하고 향수도 달래며 지낸다.

 

이중 맏형격인 김범신 사장은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주진옥 사장에게 선물했다. 김 사장의 표현이다. 혼자 사는 것이 불쌍해서……. 그러나 주진옥 사장의 말은 달랐다. 내기해서 이겨 따낸 상품이란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몰라 나는 이동재 사장에게 물었다. 김 사장의 동생에 반한 주 사장이 구혼을 했고 당사자들은 좋아했으나 기꺼이 찬성할 것으로 믿었던 김 사장이 한사코 반대했다는 거였다. 이유는 마트를 운영하는 주 사장에게 동생을 시집보내면 마트에 붙잡혀 평생 고생이 뻔하다는 거였다. 주 사장이 동생 고생 안 시키겠다고 약속해도 형처럼 따르던 김 사장이 1년 넘게 반대하니 야속한 생각도 들었단다.

 

결국 그런 김 사장에게 주 사장이 내기를 제안했다. 골프를 프로처럼 목금토일 4일간 라운딩하여 자기가 이기면 결혼을 승낙해주고 자기가 지면 깨끗이 동생을 잊겠다고. 이 셋은 그렇게 친하면서도 골프에는 철저했다. 다 자기가 한 수 위라고 주장했다. 핸디캡은 당시 모두 6, 7이었다. 그래서 날짜를 잡아 이동재 사장이 심판으로 같이 라운딩 했단다. 결과는 318대 323으로 주 사장의 승리. 그리하여 두 총각 처녀는 골프 시합 후 3개월 만에 웨딩마취를 했다.

 

“그러면 주 사장 말이 맞고만.” 하고 내가 김 사장에게 말하자 “송 소장, 모르는 소리 마소. 내가 어디 주 사장에게 골프 쳐서 질 실력이야. 인간이 워낙 외롭고 불쌍하게 보여서 내가 져준 거지.” 하는 거였다. 그런가? 나는 어느 날 둘째 애기를 안고 있는 주진옥의 아내에게 물었다. “골프 내기에서 오빠가 졌든 져 주었든 상관없고요. 나는 그저 애 아빠와 결혼하게 되어 좋기만 했어요. 고생을 해도 내가 한다는데, 오빠가 반대할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오빠가 밉기까지 했어요. 우리 애들은 저 좋다하면 무조건 결혼을 허락할 거예요.”

 

주말이면 세 부부와 1996년에 이민 간 유기현 부부가 합세하여 골프를 즐기고 저녁을 같이하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있을 것이다. 유기현은 김범신 사장의 죽마고우이고 유기현의 부인은 MBC 아나운서 출신 김영애로, 김범신의 또 다른 친구의 동생이었다. 유기현이는 늦게 캐나다로 이주하여, 생업에 충실하다가, 주말이면 세 가족과 어울려 골프를 즐기고 밤이면 옛 노래를 부르며 향수를 달래곤 한다.

 

(캐나다 세 번째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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