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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08)] 77. 캐나다(Canada)-3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08)] 77. 캐나다(Canada)-3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4. 내가 만난 사람 (2)

(여무열, 유경원 부부)

 

▲(중앙이 여무열 유경원 부부). ⒞시사타임즈


여무열(1951년생)과 유경원(1953년생) 부부를 보면 나는 선남선녀(善男善女)라는 말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최고선남, 최고선녀’라는 말은 없나? 우선 외모가 세계 최고다. 윌리엄 홀덴과 잉그리드 버그만도 그들보다 못하다. 매너도 그렇다. 그의 집에 한 번 초대되어 가본 사람들은 안다. 몸에 밴 매너, 정갈한 음식과 후식, 흐르는 음악, 정돈된 집안 분위기, 그러나 압도하지 않는 따뜻한 분위기. 한 가지 흠이라면 책상 서랍, 골프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너무 잘 정돈되어 만져보기가 두렵다는 것이다. 여 박사는 경기고 서울대 치대와 대학원을 나온 실력 있는 치과의사이다. 부친도 서울대를 나온 의사로, 의사 집안이다. 부인 유경원은 명문 여대 영문과를 나와 UNDP에서 14년을 근무하다 1990년, 여 박사와 결혼 후 사직하였다. 어떤 일로 여 박사가 UNDP 사무실에 들러 우연히 만나게 된 둘은 첫눈에 서로 반하여 불같은 연애가 시작되었다. 유경원 부친은 외교관이었다.

 

 

처음 둘이 만났을 때 여 박사는 38세에 총각이고 유경원은 36세에 이혼녀로 아들도 하나 있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여 박사 집안에서 반대했으나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이어서 마침내 부모의 승낙을 받고 결혼했단다. 그러나 주위의 그러한 시선이 싫어서 그들은 1991년도에 토론토 투자 이주자로 왔다. 여 박사는 협력단 캐나다 사무소가 운영한 창업학교 1기 수료생이고 또한 우리 사무소가 산파 역할을 한 한인투자이주자협회 사무총장을 맡았다. 후에 3대 회장이 되어 협회를 활기차게 운영했다.

 

사무소 비서가 문제가 있어 해고하고 유경원을 우리 사무소 비서로 채용하여 나와 같이 근무했다. 유경원은 타고난 비서였다. 업무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내방객 응대, 전화 받기, 사무실 정리, 서류 정리 등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캐나다를 떠나 온 후 나는 그들 소식을 듣지 못했다. 자식은 낳았는지, 여 박사는 그곳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했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단풍잎, 그래 그 캐나다의 단풍잎을 유난히 좋아했던 잉그리드 버그만보다도 더 예뻤던 나와 동갑내기 유경원이 한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예쁘고 빨갛게 물든 단풍잎 하나를 들고서…….

 

“소장님, 인생을 일 년 사계절로 친다면 우리가 어느 쯤에 와 있을까요?” “미스 유, 그 단풍잎이 물들기 시작하는 9월 초가 아닐까요?” 그 때 우리는 다 같이 세상의 유혹에도 견딜 수 있다는 불혹(不惑, 40세)이었다. “그러겠지요. 그러나 금방 이렇게 붉게 물들고 가지에서 떨어져 땅위에 구르겠지요.”하는 그녀가 토론토 10월의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다보는 그 눈빛이 지금도 내 뇌리에 선명히 남아있다.

 

이제 그 후로 20년이 흘러 내가 정년퇴직한 지금은 인생의 어느 쯤에 와 있을까? 유경원이 없는 필리핀 이사벨라에서 그녀를 떠올리며 나는 혼자 자문해 봤다. “아마 단풍잎이 붉게 물들어 고운 자태를 뽐낸 뒤 가지에서 떨어질 듯한 저 단풍잎과 같지 않을까요? 계절로 친다면 11월 초순요?” 어느새 유경원이 내 옆에 와서 속삭인다. 그래, 그녀는 그랬었다. 사무실에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해 뒀었다. ‘다행이네. 아직 단풍잎이 땅 위에서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지 않고 그 붉은 빛을 아직 잃지 않고 있으니. 그러나 이제 곧 그 빛도 사라지고 말겠지. 그리고 삭풍 휘몰아치는 12월이 오겠지, 곧.’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빙긋 웃을 수 있다는 이순(耳順, 60세도 훌쩍 넘었다.

 

(양용진 교수, 송완일, 김학성, 김병권 사장)

 

▲(이경수 소장, 양용진 교장. 온타리오주지사와 창업학교 학생) . ⒞시사타임즈


양용진 (1933년생, 전주고 서울대 졸) 토론토 의대 교수, 송완일(1934년생, 전주고 중앙대졸) 사장과 김학성(1941년생, 전주고 서울대졸) 사장, 김병권사장(1942년생, 경북고 서울상대졸)은 1960년대에 토론토에 정착한 이주 원로들이다. 양용진 교수는 미생물학과 예방의학을 전공하고 일찍 토론토 의대 교수로 활동하며 캐나다 주류사회에 진출했다. KOICA 창업학교 2대 교장으로 모셨다. 송완일 사장은 농림부 사무관이었으나 국내 정치 상황이 3선 개헌 등 독재로 흐르는데 실망하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이주하여 마트 운영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1970-80년에 토론토에 있었던 민주화 시위에는 항상 이상철 목사와 양용진 교수 송완일 사장, 김병권 사장과 김학성 사장이 있었다.
 

 

김병권 사장도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나 너무 독재로 흐르는데다 공무원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고 시국이 독재인 것이 싫어 사람중심의 땅 캐나다로 이주했다. 기업컨설팅, 부동산 개발 사업을 하며 교민사회에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우리 협력단 사무소는 그를 창업학교 초대교장으로 모셨다.

 

김학성 사장은 토론토에 와서 1년여 영어 공부를 한 후 전공을 살려 무역회사를 차리고 캐나다의 소고기를 한국에 수출하는 외길을 20년째 걸어 오면서 어느 정도 부도 축적했다. 부인은 우리나라 국가대표 배구선수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에 출중한 운동신경을 지녔다. 배구, 탁구, 골프……. 골프 핸디캡은 0이다. 김 사장의 핸디캡은 만년 18이다. 김학성 사장과 김학필 사장은 형제이다. 2002년도 당시 91세이던 노모도 토론토에 거주하였으나 아들들과 같이 살지 않고 혼자 살았다. 그리고 두 아들 내외나 아들들이 바쁘면 며느리와 손자들을 불러 손수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나도 몇 번 초대 받았는데 음식은 91세 노모가 다 하고 며느리들은 수다만 떨었다. 설거지는 도우미가 하고……. 자주 찾아와서 91세 시모에게 밥 얻어먹고 가는 게 그게 효도란다. 내가 보기에도 좋아보였다. 참 쉬운 효도도 있네…….

 

1993년도 김학성 사장 댁에 초대되어 가보니 송완일 사장 내외와 진념 장관이 있었다. 알고 보니 진 장관과 김 사장은 죽마고우이고 송완일 사장 부인의 사촌 동생이 진념 장관이었다. 진 장관은 첫 인상이 매우 깐깐하게 보였으나 의외로 부드럽고 유머가 넘쳐 좌중을 리드했다. 장관 정도하려면 저 정도 화술은 있어야 하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 장관이 ‘매형, 가기 싫다던 누님을 억지로 끌고 캐나다에 가시더니 후회 없습니까?”하고 물으니까 송완일 사장이 “토론토에서 둘째 딸과 막내아들을 만들었으니 이 정도면 이민 와서 성공한 것 아닌가?”라고 하며 부인을 쳐다보며 파안대소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웃음 뒤에 깊은 회한이 번뜩이는 것을 본 건 내 착각이었을까? 전형적인 공무원 스타일인 송완일 사장은 캐나다에서 사업에는 성공치 못 한 것 같았으나 교사 출신 부인을 두어서인지 딸 아들들은 모두 캐나다 유수대학에서 장학생이었다. 뉴욕에서 회사를 다니던 큰 딸은 홍콩의 재벌 2세와 결혼 했고 아들은 서울에 가서 직장을 잡고 결혼도 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사위가 토론토에 좋은 집과 차도 사주었다는 소식도…….

 

(박순배 수필가)

 

1992년 10월 경 협력단 본부의 문을주 실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특명이라면서 1945년생 박순배(마산 태생, 중앙대 통계학과 졸)를 2주일 이내에 찾으라는 거였다. 문을주 실장은 온 협력단 직원들이 그 어느 총재보다도 존경하고 따르는 직장 선배이다.

 

해개공에서 협력단으로 전환될 때 노조위원장이었다. 외교부에서 해개공 직원 전부에게 영어 시험을 보게 하여 수준 이하인 자는 협력단 직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표를 받으려 했으나 특유의 뱃심과 설득력으로 이를 저지했다. 명분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 해개공을 협력단으로 갑자기 만들었으니 해개공 직원의 신분을 보장하는 것이 민주적이며, 업무상 영어가 필요하면 국가가 영어교육 기회를 부여하고, 그래도 업무능력이 안되면 스스로 그만 두게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문 실장은 그 후 KBS와 섭외하여 ‘KOICA 열린음악회 개최 연례화’, ‘KOICA 협력사업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수록’, ‘KOICA 사업 주제로 초중고등학교 백일장 개최 연례화’, ‘KOICA 봉사단원에게 관용여권 발급’ 등을 추진하여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퇴직 시 퇴직금 전액을 자기의 모교인 김제 공덕초등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모든 협력단 직원에게는 동아영어사전을 선물했다. 총재부터 청소하는 아줌마까지. 협력단 직원은 영어만큼은 남달라야 한다는 소망이었을 것이다. ‘KOICA 열린음악회 개최 연례화’, ‘KOICA 협력사업 초‧중‧고등학교 교과서 수록’, ‘KOICA 봉사 단원에게 관용여권 발급’을 추진할 때에는 나도 황현수 실장, 안창수 부실장과 같이 자료를 준비하고 문실장과 함께 관계기관을 찾아가서 열심히 설득했다. 

 

 

▲(잠바의 내과과장, 수간호사, 의자의 문을주 경희대병원 환우회장, 양복차림의 임충빈 육사 교장과 환우들). ⒞시사타임즈


문을주 실장은 국제협력에 대한 그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정년을 4년 남기고 명예 퇴직했다. 그는 10년째 일주일에 세 번씩 경희대병원에서 신장투석을 하고 있었다. 경희대 병원의 신장 투석하는 환자 100여명이 화랑의 터에서 씩씩한 육사생도의 활기찬 모습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말을 문 실장으로부터 듣고 나는 육사와 접촉하여 2007년 6월, 그들과 같이 육사를 방문했다. 소식을 접한 임충빈 육사교장이 경희대 신장내과 환우들을 직접 맞으며 기념품도 주었다. 우리들은 그때 열린 육군사관학교를 체험했다. 임충빈 교장선생님은 몇 개월 후 대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참으로 국민을 사랑하는 장군이었다.

 

문 실장의 박순배 찾기 특명을 받고 나는 즉석에서 3일 만에 업무를 종결 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토론토 중앙일보의 명사 칼럼에 박순배라는 이름으로 1주일에 한 번씩 수필이 게재 중이었고 글이 잔잔하고 평화로워 나는 그의 글을 즐겨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어당 선생의 글을 읽는 기분이었다. 나는 전화를 걸어 혹시 중앙대 통계학과 나오셨느냐니까 그렇다는 거였다. 문 실장과 동창생이었다. 둘은 그 후로 편지를 주고 받았으며 동창회 수첩에 ‘박순배란’에는 ‘캐나다 이주’라고만 몇 십 년 째 등재 되었는데 이제 주소와 전화번호가 오르게 되었다. 박순배 사장은 마트를 운영하며 남들은 운동을 하고 소일할 때 주로 독서를 했단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단다.

 

1995년 박순배 사장은 ‘온타리오 호숫가에서’라는 수필집을 서울에서 발간했으며 문 실장의 주선으로 책 출판회도 갖고 전 동창으로부터 축하도 받고 졸업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되었다. 1999년 ‘캐나다에 심은 조선호박’ 2004년 ‘타는 목마름으로’, 2010년 ‘빨간 고추잠자리가 날 때쯤이면’ 등을 발표하여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문을주 실장은 통계학과 동창회를 잘 이끈 공로로 1996년도 자랑스러운 중앙대 인으로 선정되었다. 중앙대 출신의 쟁쟁한 학자, 정치인, 기업인들을 물리치고 평범한 직장인이 자랑스러운 인물로 선정된 예는 중앙대는 물론 타 대학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면서 문을주 실장은 훈장보다도 더 영예스럽게 생각하였다.

 

협력단 창립 이래 지금까지 8명의 총재가 있었다. 퇴임 후 연말이나 명절에 우리 직원들이 적게는 2-3명 많아야 10명 정도가 퇴임 총재에게 인사하러 가고 있다. 그런데, 퇴임한 문을주 실장에게는 5-60명이 매년 2-4회씩 인사하러 간다. 문을주 실장은 협력단의 전설적인 직원이었으며 존경 받는 선배이다. 우리 직원이 문을주 실장에게처럼 그렇게 많이 인사드리러 가고 싶은 덕망 있는 총재가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그저 외교부에서 정년퇴직하고 별 마찰 없이 그저 임기를 채우는 총재가 아니라, 개발협력에 대한 비전과 직원에 대한 사랑이 큰 총재가 나타나기를 모두 바라고 있다.

 

“박순배 사장님, 지금도 빛나는 호수 온타리오에서 친구들과 고국산천을 그리며 사색에 잠겨 있나요?”

 

(유종수 교수)

▲ (온타리오 수센마리 아가와 캐년). ⒞시사타임즈

 

유종수(1941년생) 교수는 정읍 출신으로 전주고, 서울대 상과대학을 마치고 뉴욕 주립대에서 장학금으로 석 박사를 취득했다. 그 후 뉴욕대, 토론토대를 거쳐 2002년도에 내가 유 교수를 만났을 때에는 수센마리대에서 정교수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을철에는 토론토에서 수센마리로 단풍 관광열차가 운행하는데 그때 그 단풍 기차를 타고 그의 집을 방문하고 부근의 아가와 캐년의 단풍을 구경했다.

 

25세부터 유학 이민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팔순 노모를 모시고 있었다. 형제가 4남 2녀인데 장남이었다. 유종근, 유명순, 유명숙, 유종성, 유종일이 그가 사랑하는 동생들이다. 바로 전라북도의 신흥 명문가이다. 아버지는 정읍의 빈한한 농민이었으나 자녀들에게 올바른 길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가르쳤다 한다. 그래서 자녀 모두가 모두 명문대를 나와 4남이 모두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종근(남성고, 고려대, 뉴욕주립대 박사, 전북지사), 유종성(신일고, 서울대. 하버드대 박사, 경실련 사무총장), 유종일(서라벌고, 서울대, 동경대 박사, KDI교수). 나는 이 형제의 장형을 먼저 알고 순서대로 알게 됐다. 이후 어머니 장례식에도 참석하여 이들을 위로했다.

 

유종수 교수는 뉴욕 주립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칠 무렵 동생 유종근을 바로 그 뉴욕주립대 대학원으로 진학하도록 주선하여 형제가 뉴욕대학에서 함께 공부하며 모두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당시 뉴욕대에서는 한국에서 온 형제 천재로 유명했단다. 졸업 후 자신은 캐나다에서 동생 유종근 박사는 뉴욕에서 교수 생활을 하였다.

 

유종근 박사는 그 후 김대중 선생이 미국 망명시절 만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감화하여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이 후 경제 분야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보좌하게 되고 특히 우리나라가 외환위기에 빠졌을 때 국민정부의 경제정책을 주도하며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탈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2000년 2월에 나는 유종근(당시 전북지사 겸 대통령 특별경제고문)박사를 단 둘이 만나 나의 시국관과 그의 진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다. 그가 차기 대통령을 꿈꾸고 있다는 것을 동생들이나 그의 측근들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유종근 지사는 그때 인생 최고의 바쁜 시절이었다. 바쁜 도정 업무, 민주발전과 평화통일 그리고 경제발전을 위하여 진력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으로 외환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통령 보좌, 각 대학과 기관에서의 강의 요청, 경제 분야와 통일 분야의 책 저술……. 한번은 강원도에서의 거절할 수 없는 강의 요청으로 시간이 없어 산림청 헬리콥터를 이용한 것이 크게 문제 되기도 한 때였다. 나와 유지사의 독대 장소는 그가 안가로 사용하던 프라자호텔 17xx호실이었다.

 

주로 내가 이야기 했고 그는 귀담아 들었다. 다음이 주요내용이다.

 

<차기 대통령을 준비한다고 들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본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가능성이 매우 낮다. 우리 국민은 단합을 잘하지만 대통령선거에서는 동서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 원인 제공자는 박정희 67%,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노태우 각 7.5%, 우리국민 전체가 3%다. 남북통일이 우리 민족의 지상과업이지만 그보다 먼저 동서통합이 넘어야 할 과제다. 그러한 인물이 나와야 한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자는 경제통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서화해를 이루고 남북통일을 이끌 비전을 갖고 국민에게 다가서야 한다. 유 박사는 경제정책은 이론과 실무에 있어서 우리나라 최고이니, 나는 동서화합을 이끌 방향을 제시하겠다. 전북 지사 재선을 포기하라. 또지사 재선거 임박한 때였고 그의 압도적인 당선이 확실한 때였다. 그리고 전력투구를 하여 김대중 대통령을 도와 우리나라의 이 외환위기를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지혜를 다 모아라. 손에 있는 전북 도지사를 내려놓고 성공여부가 불확실한 국가부도사태 타개책에 국가를 위해 신명을 바치는 것이 그 결과에 관계없이 경제학자로서 공직에 오른 이의 도리이며, 전라도 출신으로서 그 길이 동서화합을 이루어내는 길이며 대통령을 꿈꾸는 자의 가야할 좁은 길이다. 긔고 KOICA의 업무를 주시하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제시하라. 손에 들고 있는 기득권을 다 버려라. 손에 든 것을 놓지 않고는 끄 보다 큰 것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만을 생각하라.>

 

유종근 지사는 내 손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 깊이 잘 알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내 말을 실천하지 않았다. 전북지사 재선에 성공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오르지만 어느 사건에 휘말려 중도 하차하게 되고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아마 그는 내 말대로 실천하려 했겠지만 측근들이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처럼 경제특보로 도와주면 되고 도지사를 한 번 더하여 모범적인 도정을 이끄는 것이 대통령 후보의 이력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조언에 현혹 되었으리라 나 혼자 부질없이 유추해 본다.

 

유종수 교수는 가끔 수센마리에서 토론토에 왔다. 토론토 대학 초청 강의도 있고 때로는 그저 죽마고우인 박장헌 캐나다 한일은행장과 동생 유명숙 회계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한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석학도 친구와 가족 그리워하기에는 나 같은 범인과 다름없었다. 그래, 인지상정이란 말이 있잖아?

 

“유 교수님, 이제 정년퇴직을 넘어 명예 교수도 내려 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박사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고국에 자주 오세요. 고국산천도 둘러보시고 고국의 후학들에게도 좋은 말씀을 들려주세요. 저도 이제 정년 맞았으니 제가 여행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진념 부총리, 김학성 사장, 유종수 교수와). ⒞시사타임즈​

 

 (캐나다 4번째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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