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16)] 82. 바하마(Bahamas)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16)] 82. 바하마(Bahamas)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콜럼버스가 1492.10.12. 바하마 Guanahani 섬에 도착하는 장면 (c)시사타임즈
▲바하마 지도 (c)시사타임즈
▲< 국기 > 흑색 정삼각형은 국민의 단결, 하늘색은 바다, 황색은 국토를 상징. < 국장 > 청새치와 플라밍고가 방패를 받치고, 중앙위에는 조개(conch shell)가 올려 있음. (c)시사타임즈

 

 

< 국가 개관 >

 

바하마 연방은 미국 남쪽 대서양에 있는 섬나라로 29개의 주요 섬과 661개의 작은 섬(cays), 2,389개의 암초가 있다. 총 면적은 14,000 평방km이며, 인구는 33만 명이다. 영연방의 일원으로 1973.7.10일 독립하고 영어가 공용어이고, 수도는 나소(Nassau)이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때 산살바도르 섬에 상륙하고 스페인 땅이라 선언하였다. 영국인들이 1600년대에 정착하고, 1717년 영국이 식민지로 삼았다. 1800년대 중반에 해운의 중심지로 번창하였고 미국 남북 전쟁 동안, 북군의 기지로 쓰였다. 관광객이 많다.

 

The Commonwealth of the Bahamas consists of more than 3,000 islands, keys and islets in the Atlantic Ocean, southeast of Florida. Its capital is Nassau. Originally inhabited by the Lucayans, a branch of the Arawakan-speaking Tainos, the Bahamas was the site of Columbus' first landfall in 1492. Although the Spanish never colonized it, they shipped the native Lucayans to slavery in Hispaniola. It became a Crown Colony in 1717. After the American War of Independence, thousands of American Loyalists and enslaved Africans moved heres and set up a plantation. It gained independence in 1973.

 

1. 국명(Country) : 바하마 (the Bahamas)

2. 수도(Capital) : 나소우 (Nassau)

3. 면적(territory) : 13,878㎢

4. 인구(Population) : 373,000명

5. 국민소득(GNI) : US$24,100불

6. 언어(Language) : 영어 (English)

7. 독립일(Independence) : 1973.7.10

 

▲Cruise Ships in Nassau (c)시사타임즈

겨울 휴양지, 바하마

 

플로리다 동남향 88km

대서양 남서 끝자락

카리브해 가는 어귀

 

점점이 680개 섬

바하마라네

2389개 암초는 덤으로 있네

 

날씨는 일 년 내내 따뜻하고요

하얀 모래 푸른 파도

젊음의 낭만

 

야자수 나무사이 해가 뜰 적엔

청새치 물에서 점프를 하고

해질녘 홍학군무 천하일품이로세

 

1492년 콜럼버스 스페인이라 선포하고

1717년 영국은 제 땅이라네

 

기쁘다 1973년 7월 10일이여

바하마 사람 다 모여라

행진하라 앞으로 위로 다함께

 

떠오르는 태양 온몸으로 맞으라

사랑의 깃발 높이 들어라

영광을 향해 앞으로 위로 전진하라!

 

앞으로

위로

지금부터

다 함께 ~~~

 

Winter Resort, the Bahamas

 

88km to the east from Florida, USA

At the south-west corner of the Atlantic Sea

The gateway to the Caribbean Sea

 

How many islands, oh, it's 680, big and small

Its name is the Bahamas

There are 2389 shoals in addition.

 

It is warm and hot all year round

Full of romantic youth

Facing blue waves at white sands

 

At sunrise among coconut trees

How energetic, spearfish's jump on the sea

At sunset on the lake

How beautifully flamingos dance

 

Columbus proclaimed it Spain's in 1492

So did England it as it own in 1717

 

How impressive, the day of July 10, 1973

Let's gather all together, all Bahamians

Forward Upward Onward Together!

 

Let's face the rising sun in the head

Lift up high the banner of love

Forward Upward Onward Together,

For the glory of the Bahamas!

 

Forward!

Upward!

Onward!

Together~~~!

 

1. 바하마 약사, 지리와 기후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 발견 때 바하마의 산살바도르섬에 도착한 것이 처음 외래인이다. 콜럼버스는 이 섬을 스페인 섬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착하는 대신, 그곳에 살고 있던 루카요 인디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영국인들이 1600년대에 정착하였는데, 그 후반에 스페인이 정착지를 공격하였다. 1717년 영국이 바하마를 식민지로 삼았다.

 

1800년대 중반에 해운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창하였다. 미국에서 남북 전쟁이 일어나자, 바하마는 북군의 미국 남부 항구 봉쇄를 파괴하는 배들을 위한 기지로 쓰였다. 전쟁이 끝나자, 바하마의 경제가 쇠퇴하였으나 100년 후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섬들에 오기 시작하면서 다시 번창하였다.

 

▲바하마 총독 시절의 윈저공 부부 (c)시사타임즈

동생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프랑스에서 거주하던 윈저공에게 히틀러가 접근하자, George V는 처칠 수상과 상의하여 형인 윈저공을 2차 대전중인 1940.8.18 ~ 1945.3.16 동안 바하마 총독으로 봉하였다. 1973년 7월 10일 325년간의 영국 지배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립하였다.

 

바하마는 미국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비미니는 미국과 가장 가까운 섬이며 미국에서 바하마로 가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아바코 제도는 그랜드 바하마섬의 동쪽에 있다. 남동부의 끝에는 바하마 제도가 있다. 그 외에 유명한 섬으로는 안드로스섬, 캣섬, 롱섬, 산살바도르섬 등이 있다. 이 중 산살바도르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최초로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바하마의 수도인 나소는 뉴프로비던스섬에 위치해 있으며 바하마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섬은 안드로스섬이다.

 

바하마의 기후는 아열대 기후 혹은 열대 기후로 볼 수 있는데 멕시코 만의 해류로 인해 겨울에도 따뜻한 편이다. 해발고도는 10m 정도이다. 반대로 섬 근처로 허리케인이 접근하기 때문에 여름과 가을에는 매우 위험하다. 1992년에는 허리케인 앤드류가 북쪽 지대를 강타했으며 2004년에는 허리케인 프란스가 바하마 전체에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허리케인이 올 때 강한 파도가 일면서 해일을 일으켜 그랜드 바하마에서는 집과 학교가 파괴되었고 묘가 다 사라지는 등 피해가 났다. 서쪽 해안 지대에 거주하던 1,000명 이상의 사람이 집을 잃었다.

 

▲The Blue Lagoon Island, Bahamas (c)시사타임즈

3. 윈저공과 심프손 부인

 

(왕위도 사랑 앞엔.......)

 

▲지중해 여행하는 Edward 황태자와 심프손 부인, 1935 (c)시사타임즈

국가냐 사랑이냐

왕은 괴롭다

 

낮엔 저 해님 따라

밤엔 저 달님 따라

왕은 괴롭다

 

왕좌는

해가 뜨는 지평선이요

사랑은

달이 뜨는 수평선이다

왕은 괴롭다

 

백성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따르자니

백성이 운다

왕은 괴롭다

 

두 갈래 길에

서성이는 발길

왕은 괴롭다

 

부럽구나

여염집 사내들아

나에게는 어이하여 사랑의 자유가 없나

사랑 없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쌍쌍이 노니는 황조가 부럽구나

 

국가여 나를 용서 하여 주소서

사랑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국가여 나를 놓아주소서---

 

청년 왕세자

 

1930년 12월 런던 다우닝가 무도장이 술렁거렸다. 술렁거림이 일순 조용해진 가운데 영국 왕세자 웨일즈공이 애인 델마와 같이 입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다. 다시 음악이 울리고 참석자들은 춤을 추기에 바빴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델마의 동생 콘스엘로 권유로 월리스 심프손 부인도 그 무도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16세에 부왕 조지 5세에 의해 왕세자에 책봉된 웨일즈공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근위보병이 되어 근무했다. 해군장관도 지냈다. 영국 최상류계급의 예쁜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이따금씩 풍문으로 연애설이 돌기도 했지만 계속되지 못했다. 웨일즈공의 동생들은 속속 결혼하였으며 바로 및 동생은 자녀를 두기도 하였다. 재작년부터는 웨일즈공은 병이 깊어지는 부왕대신에 왕가의 대소사를 챙겨왔다. 왕세자의 결혼이 늦어지자 왕가와 영국국민은 걱정하였고 왕비를 위시하여 왕실 어른들이 나서서 중매를 시도하였으나 왕세자는 모두 거절하였다. 그러다 작년부터 델마를 사교장에 데리고 나타나 영국국민들은 왕가의 좋은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월리스 심프손 부인은 1896년생으로 미국인이며 이미 첫 남편 해군대위 얼 스펜서와 11년간의 결혼 생활을 성격불화로 청산하고 바로 이듬해에 선박 사업가인 어니스트 심프손과 결혼하여 런던에 와서 살고 있었다. 남편의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으나 월리스는 천성적으로 사교계 출입을 즐기고 있었다.

 

월리스 심프손과의 만남

 

“월리스, 이리 와봐.”

“콘스엘로, 왜?”

“델마 언니를 소개해줄게.”

“언니, 이 애가 전에 내가 말한 월리스 심프손 부인이야.”

“아, 그래. 듣던 대로 예쁘네.”

“고맙습니다.”

“전하, 이쪽이 내 동생 콘스엘로의 친구인 월리스 심프손 부인이에요.”

“아, 심프손 부인, 어느 가문출신이요?”

“전하, 저는 미국인입니다. 사업가인 남편을 따라 런던에 와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인 부인이라.”

“------”

“월리스라 했소?”

“예, 전하”

“춤 한 곡 어떻소?”

“------!!!!!!”

 

웨일즈공과 심프손 부인이 사교장에서 첫 만남 후 일부 언론에서 왕세자와 월리스 심프손의 만남이 오르내려도 왕세자는 여전히 결혼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왕세자의 일만 계속했다. 그는 왕가의 일뿐만 아니라 국정에도 관여했다. 1932년 경제가 나빠지고 실업률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떨어지자 영국노동자 단체를 방문하고 실업자 대책을 발표하는 등 일반 국민의 삶에 다가서는 모습을 보였다. 1934년 델마가 미국 뉴욕으로 가버린 후 왕세자는 비공식정 일정에 국내외를 불문하고 델마 대신 월리스 심프손를 대동했다. 급기야 1934년 5월에는 둘은 지중해로 여행을 떠났다. 파아란 지중해의 호화 요트 갑판에 둘만이 화사한 햇빛을 받고 있었다.

 

“월리스!”

“전하!”

“기자들도 없고, 어머니 걱정도 없고------”

“전하, 가만히 아무 말도 ------”

“그래, 이대로가 좋소.”

“------”

“내일 런던으로 돌아가면 부왕에게 그대와 결혼하겠다고 말하겠소.”

“전하, 오늘만으로도 저에게는 충분합니다. 런던으로 돌아가면 부왕과 모후의 말을 들으소서.”

“월리스, 그대도 아무 말도----”

“전하, 전하와의 만남만으로도 저에게는 분에 넘치----”

“월리스, 내 곁에 영원히 있어주오.”

“전하, 멀리 있어도 전하만이 저의 모든 것입니다.”

“그대는 나만 믿으오.”

“------”

 

잊으려 해도

 

드디어 1935년 왕세자는 버킴검으로 월리스를 초대하여 모후에게 정식으로 소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병상의 부왕 조지 5세가 격노하였다. 월리스의 두 차례의 결혼 경력은 영국 국왕의 부인이 되기에 불가능하였다. 더욱이 전전 남편이 살아 있었고 현 남편과는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혼은 부정한 일을 제외하고는 용인되지 않는 영국왕가 법규와 성공회 전통에 반하는 것이었다. 1936년 1월 부왕 조지 5세가 죽자 왕세자 웨일즈공은 바로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에드워드 8세가 되었다. 월리스는 언론을 피해 프랑스 칸느로 갔다. 월리스는 이미 남편 심프손을 상대로 이혼을 제기하여 1936년 10월 이혼 가판결을 받아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드 8세는 모후와 왕실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월리스와의 결혼에 대하여 내각의 찬성을 받으려고 볼드윈 수상과 회담을 가졌다.

 

“수상, 누구나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폐하.”

“그런데, 왜 나와 월리스의 결혼을 반대----”

“폐하, 황공하오나. 누구나 관련법과 교회의 규칙을 따라야 합니다. 더욱이 전 영국국민이 섬겨야 하는 왕비임을 잊지 마소서.”

“수상,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

“수상, 내가 월리스와 결혼하여도 그녀가 왕비로 오르지는 않게 하겠습니다.”

“폐하, 영국국민은 믿고 존경하고 따를 왕비를 원하옵니다.”

“수상, 도와주시오.”

“폐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관련 법규를 고쳐야 하옵니다.”

“수상, 도와주시오.”

“폐하, 신민이 원하지 않사옵니다.”

“월리스 말이오?”

“결혼에 관한 왕실법 개정을 원치 않사옵니다.”

“결혼할 사람은 나요, 수상.”

“폐하, 그러하옵니다마는 신민은 믿고 따르고 존경할 국모를 원하고 있사옵니다.”

“수상,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오?”

“왕가의 어른이신 모후와 전 신민의 뜻에 따르시는 것이----.”

“수상, 괴롭습니다.”

“폐하, 모후와 온 신민들도 괴로워하고 있사옵니다.”

“------”

“폐하, 모후와 신민들 뜻에 따르시옵소서.”

 

에드워드 8세는 괴로웠다. 영국왕으로서 대영제국과 국민을 위해 하고픈 일도 많았다. 그러나 월리스를 잊을 수도 없었다. 헤어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 바로 밑 동생 앨버트가 생각났다. 자기보다 한 살 어리나 똑똑하고 다른 동생들을 항상 잘 보살피는 동생이지 않은가? 그라면 나 못지않게 이 나라를 잘 이끌리라. 그는 영국국민들이 좋아하는 부인도 있고 자녀들도 있지 않은가? 월리스는 애도 낳을 수 없다지 않은가? 마침내 그는 1936년 12월 9일 동생 셋을 불렀다.

 

“사랑하는 동생들은 내 말을 잘 듣게나.”

“------???”

“------???”

“------???”

“나는 이 대영제국을 너무 사랑하기에 떠나려 한다.”

“------??????”

“------??????”

“------??????”

“이 나라는 너희 특히 앨버트에게 맡긴다. 나는 월리스와 결혼하기 위하여 이 나라를 떠나겠다. 부디 앨버트를 중심으로 이 나라와 왕가를 위해 너희가 나 대신 진력하기 바란다. 나는 어디에 있든지 워리스와 조용히 살며 앨버트의 성공과 대영제국의 번성을 빌겠다.”

 

“폐하, 아니 됩니다. 부왕께서 형님에게 물려준 자리입니다. 부왕의 뜻을 받들어 형님이 이 나라를 지키소서.”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습니다, 폐하!”

“고맙다. 나는 지난 3년간 많이 고민했구나. 이제 너희들이 있기에 결정할 수 있었다. 내 뜻을 따르라.”

“폐하, 한 번 더 통촉하옵소서!”

“나는 결정하였노라. 내일 양위 성명서를 발표하겠다.”

“폐하!”

“폐하!”

“폐하!”

 

사랑하는 이의 도움 없이는 왕위도

 

1936년 12월 11일 영국전역에서 영국국민들은 에드워드 8세의 성명서를 듣고 있었다. 영국민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5대양 6대주에 있는 모든 영연방 모든 나라의 신민들도 울었다.

 

<영국 국민여러분, 마침내 나는 내 자신의 말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왕으로서의 마지막 의무를 다하고, 요크 공작으로서 나의 왕위를 계승한 내 동생인 현 영국국왕 조지 6세에게 충성을 나는 선언합니다. 나의 모든 마음으로 조지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나에게 왕위를 포기하라고 한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왕위 포기결정을 함에 있어서, 지난 25년 동안 웨일즈의 왕세자로서 또 최근에는 영국국왕으로서 봉사한 나의 조국 대영제국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과 지원 없이는 왕으로서 국가에 대한 나의 막중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결정은 나 혼자 스스로 내렸음을 밝혀둡니다. 그 과정과 결과는 모두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습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마지막까지도 다른 결정을 내리도록 나를 설득하였습니다. 나는 오직 모두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가의 하나의 생각에만 몰두하며 앞과 같이 내 인생의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나는 내 동생이 이 나라를 위해 오랫동안 봉사해왔고 그의 탁월한 자질과 품성으로 나의 왕위를 이어받아 중단 없이 국가발전에 공헌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그 결정을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대다수 여러분이 누리고 있으나 나에게는 없는 행복한 가정에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이 있습니다.

 

이 어려운 결단의 시기에 어머니와 가족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내각의 여러 대신들 특히 볼드윈 수상은 나에게 모든 배려를 해 줬습니다. 그동안 나와 내각 사이나 의회 사이에 헌법적 이견이 전혀 없었음을 밝혀 둡니다. 부왕으로부터 헌법적 전통을 잘 교육받아 자란 나이기에 나에게는 헌법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내가 왕세자 시절부터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대영제국의 모든 이들은 어디서든지 나에게 항상 지극한 친절과 충성을 다해 주었음에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이제 국왕으로서 모든 짐을 내려놓습니다. 이제 조국의 품으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으나 나는 어디에 있든지 나의 조국 대영제국, 영국국민과 운명을 같이 할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개인 신분으로 국왕에게 봉사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그렇게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제 새로운 국왕을 맞았습니다. 나는 새로운 왕과 국민 여러분께 행복과 번영이 깃들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국왕 폐하 만세!!!”>

 

드디어 결혼

 

다음 날 에드워드는 영국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갔다. 그러나 프랑스에 체류하던 워리스와 바로 결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워리스의 이혼 소송이 결론이 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1937년 5월 워리스의 최종 이혼판결이 나왔다. 드디어 6월 3일 파리에서 둘은 결혼식을 올렸다. 해가 지지 않는 세계 최강국인 대영제국을 대가로 지불한 결혼식이었지만 영국왕실에서 참석자가 없는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둘은 이제는 떳떳하게 함께 살 수 있었음에 감격스러웠다. 왕위에 오른 동생 조지 6세는 에드워드 8세를 윈저공에 봉해 예우하였다.

 

그러나 윈저공은 왕실의 일이나 국사에 완전히 떠나있었으나 독일의 히틀러가 그를 영국왕위에 복귀시키고 전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그러자 영국왕실과 처칠 수상은 그를 바하마 총독으로 1940년에 임명하여 프랑스를 떠나게 했다. 윈저공 부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바하마에 체류한 후 1945년 파리로 돌아왔다. 윈저공은 1952년 동생 조지 6세의 장례식과 1953년 모후 매리텍의 장례식에 참석차 잠시 영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영국왕실은 월리스의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7년 모후 메리텍의 현판 제막식 때 처음으로 영국은 월리스를 공식 왕가행사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였다. 두 부부는 파리와 미국을 오가며 조용하고 차분한 생활을 이어갔다.

 

1972년 윈저공이 78세의 나이로 심근경색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윈저공이 죽은 후 월리스는 조용하고 쓸쓸한 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실어증과 치매로 고생하였다. 1986년 파리에서 90세에 죽었다. 월리스 윈저공작 부인은 영국 윈저성내 프로그모어에 그의 부군 곁에 안장되었다.

 

▲히틀러와 윈저공 부부, 1937 (c)시사타임즈
▲닉슨 대통령과 윈저공 부부, 1970 (c)시사타임즈
▲황태자 시절의 윈저공 (c)시사타임즈
▲Dean's Blue Hole in Clarence Town, Long Island, Bahamas (c)시사타임즈

 

 

(83번째 나라 도미니카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 iysong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