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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50)] 112. 필리핀(Philippines)-3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50)] 112. 필리핀(Philippines)-3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나의 수고 JAPI 호텔 사장 Yap 내외와 두 딸과, 2012.6 (c)시사타임즈

4. 내가 만난사람 (2)

 

(Joselito Yap)

 

1956년 1월 13일생으로 할아버지가 중국인인 Yap은 3/4 필리핀 사람이라고 자기를 말한다. 그러면 1/4은 중국 사람인가? 그는 타고난 부지런함과 경영감각으로 이사벨라주에서 자수성가한 훌륭한 기업인이다.

 

영화관 직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가난해서 Yap은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 졸업 후 1973년부터 식당 종업원으로 10년, 말단 회사원으로 10년을 근무하였다. 1994년에 소규모 자동차 부품 회사를 만들어 운영했다. 지금은 이사벨라주, 카카얀주에서 가장 큰 차량 부품 제조 및 판매망을 갖추었다. 사업 분야도 확장하여 호텔, 생수공장, 경비회사, 주유소, 마트 등 7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2012년 4월, 이사벨라에 도착하여 그의 JAPI호텔에 체류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필리핀 지방 도시의 사업가지만 국제 정세에도 밝아 한국의 발전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대외 거래처는 중국과 일본이었으나 이제 한국과 거래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자동차가 최근에 필리핀에도 많이 진출하기 때문이다.

 

그는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아홉 자녀와 2007년도에 찍은 대형 사진이 있다. 그는 가족 간의 사랑이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고 믿고 있다. 손녀 2명과 6개월 된 손자 1명을 두고 있었는데, 특히 손자 미겔을 매우 예뻐했다. 미겔의 생일이 3월 2일인데 바쁜 일정 중에도 매달 2일을 생일로 정하고 모든 가족과 친척들을 초청하여 생일파티를 열었다. 아마 그것으로 자녀들과 친척과 함께 한 달에 한 번씩 식사를 하며 형제우애와 집안 우애를 진작 시키는 것 같았다.

 

“Yap 사장님, 2015년도 까지는 외국과의 거래중 반 이상을 한국과 하겠다는 지침이 얼마나 진척 되었는지요? 제주도 정방폭포와 한라산 등정은 한국에 오시기만 하면 약속대로 내가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적막한 필리핀 산골에서 고국을 그리며 일하다가 JAPI 호텔에 투숙한지 해가 바뀐 어느 날 시 한수를 읊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누가 노래 부르지 않았던가?

 

우리의 오아시스, JAPI

 

착한 사람들 오손도손

모여 사는 땅, 필리핀에

푸른 파도 밀려오는

루손섬 동북 녘에

옥수수, 벼 영그는

아름다운 이사벨라에

 

마닐라에서 아파리 가는 중간에

산티아고 지나 카우아얀 길목에

피곤한 나그네 맞아준다, JAPI여

 

JAPI에 가면 모두가 행복하다

자동차도 맛있게 밥을 먹는다

모두가 예쁘고 친절하여 우리는 왕이 된다

인터넷에 기대어 세계를 넘나본다

 

JAPI의 하룻밤,

다시 솟는 나의 힘

우리의 솟는 힘, 필리핀의 힘!

 

달리자 북의 산타아나로

남의 케손시티로

힘차게 달리자 우리 우방 필리핀

 

고맙소, JAPI여

다시 오겠오, JAPI여

그때까지 안녕, 내 친구 JAPI여…

 

▲JAPI 호텔 Yap 사장, 두 아들, 며누리와 집안 화합의 상징인 손자 미겔 (c)시사타임즈

5. 이사벨라에 날아온 KOICA의 슬픈 소식, 기쁜 소식

 

(우채석 부장이 훨훨…….)

 

▲오채석 부장과, 2011.12.30 (c)시사타임즈

2012년 5월 5일(토요일), 어린이날 오전 11시에 서울에서 걸려온 아내의 전화 한 통화에 나는 순간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협력단의 우채석 부장이 서울대 병원에서 오늘 아침 운명했다는 거였다. 사실 그의 죽음은 어느 정도 예견되었기에 그렇게 놀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는 2011년 9월, 암 판정을 받았으나 너무 늦게 발견되었고, 부위가 아주 어려운 곳이어서 서울대 병원이나 삼성병원에서조차 수술을 권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건강관리를 잘 한 사람이었기에 암 판정을 받기까지는 건강에 매우 자신 있어 했다. 마라톤 완주도 10여회 이상 했다. 내가 마지막 만난 것은 2012년 3월 20일 경이다. 나의 필리핀 출국 직전 이욱헌 부장, 송창훈 부장과 같이 협력단 근처 장어집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그때도 약물과 방사선으로 어려운 암투병을 하고 있었으나, 병색이 그리 짙어 보이질 않았다. 식사도 잘하였다. 목소리도 예전처럼 쩌렁쩌렁하고……. 그래도 암투병 하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그에게 말했다. “우 부장, 피로하면 안 좋을 수 있으니, 몇 달 병가 내고 쉬면서 투병에 전력하는 것이 좋지 않아?” KOICA의 부장 업무가 보기와는 다르게 엄청 스트레스 받는 자리다.

 

KOICA 평직원의 일의 양과 어려움은 이미 도를 넘었다. 왜냐하면 업무량은 10년 전에 비하여 15배 이상 늘었으나 정부의 엄격한 정원규제로 직원은 비슷한 수준이다. 또한 사업이 너무 다양하고 사업지 여건이 다 다르고 힘든 개도국이어서 담당 직원들은 밤 11시 이후 퇴근에 찌들어 있다. 또 너무 낮은 급여 수준에 사기마저 저하되어 있다. 그저 협력단을 세계최고의 개발협력기관으로 만들고 각자가 최고의 ODA 전문가가 되기 위한 사명감으로 직원들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그러한 아래 직원들을 바라보는 팀장이나 부장들의 스트레스가 왜 크지 않겠는가?

 

그가 대답했다. “선배님,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은 견딜만합니다. 선배님 말씀을 유념하여 추이를 보아 잘 대처하여 나도 선배님처럼 암을 이겨내겠습니다. 저는 필리핀 오지로 가는 선배님이 걱정이 됩니다. 식사 거르지 말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건강을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는 내 걱정을 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그와 나의 첫 만남은 협력단의 전신인 한국해외개발공사(KODCO)에 그가 입사했던 1987년이다. 내가 근무하던 이주과에 그와 송창훈(당시 페루사무소장)이 함께 배치되었다. 두 명 다 서반아 전공자여서 송창훈은 아르헨티나 투자이주 담당, 우채석은 온두라스 계획이주 담당으로 업무분장을 받았다. 나는 캐나다 투자이주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채석이 담당하던 온두라스 계획이주에 문제가 생겼다. 온두라스 계획이주란 온드라스의 테구시갈파시 자유무역공단에 화학, 기계, 섬유, 선반, 프라시틱 등 5개 분야에 50세대를 이주 알선하여 온두라스 산업에 기여하고 우리 국민을 해외에 진출시키는 사업이었다.

 

해개공 최초의 계획이주로 해개공과 외교부 해외이주과는 철저한 준비와 조사를 통하여 야심차게 시작하였다. 외교부의 한병길 서기관과 해개공의 김종수 차장이 온두라스에 출장을 가서 외교부와 재무부를 방문하여 온두라스에서도 환영하고 준비되었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이주 알선업자인 이모씨와 투자이주 예정자 추모씨를 비롯한 대부분과 불신이 생겨 일의 추진이 어렵게 되고 급기야 양측 간에 폭력사태로 양측이 모두 병원에 입원하고 맞고소 하는 등 복잡하게 되었다. 그러자 나를 온두라스 계획이주 팀에 합류시켜 우채석과 같이 처리토록 하였다. 양측의 불신은 마침내 이주 예정자들이 화살을 해개공으로 돌렸다. 자기들은 국가기관인 외교부와 해개공을 믿고 이모씨와 이주 추진을 하다가 이주도 못 가게 되고 집과 사업만 싼 값에 처분했으니 그 것을 다 배상하라는 거였다.

 

우채석은 그들의 불만을 잘 듣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해개공에 대한 요구 사항이 논리를 벗어나고 정도에 지나친 것으로 들어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알선업자와 내가 한 통속이라며 나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결국 그들은 우리 해개공을 상대로 손해배상 재판을 청구했다. 그 청구액이 50세대 중소기업인의 총 재산이어서 연건동 해개공 땅값과 같았다. 우리가 패소할 경우 해개공이 파산할 규모였다. 당시 해개공은 만성 적자 운영과 해외취업과 해외이주가 국가 기관에서 운영할 필요성이 있느냐라는 원초적인 문제로 존폐의 위기에 있던 시점이었다.

 

실제로 3년 뒤 해개공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국제협력단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다행이 이주알선에 대한 우리의 노력이 인정되어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우리 측이 승소 판결을 받았다. 나는 그 직후 에콰도르 사무소장으로 발령이 나서 출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등법원 그리고 대법원까지 상소 하였고, 우채석과 1년 후에 신입사원으로 들어온 최원식(현 한경대 객원교수)이 잘 대응하여 2심, 3심에서도 해개공이 모두 승소하였다.

 

필리핀 수자원 사업 현장인 이사벨라에서 우채석 부장의 부음 소식을 들으니 황망한 마음에 그와의 인연이 생생히 떠올랐다. 처음에는 이주 추진업무로 그 뒤에는 재판에 대응하는 업무로 우리는 자주 밤 새워 근무하였다. 그러면 가끔 그의 부인인 신애경 선생이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전화가 오면 내가 바꾸어 주고 하던 기억도 떠올랐다. 나와는 단순한 선후배 이상의 정을 갖고 지내온 터였는데……. 그리고 그가 노조위원장으로 협력단과 직원들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그는 체구는 크지 않았으나 사고, 능력, 포용력은 가히 거인이었다. 모든 후배들은 물론 선배나 상사들도 그를 따르고 존경하였다.

 

나는 필리핀의 밤하늘을 쳐다보며 빈소도 못 가는 나를 용서해달라고 그에게 말했다. 아니 허공에 대고 말했다. 밤이 깊어 잠을 청했으나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선배님…….’하며 그가 부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책상에 앉아 아래의 추모하는 글을 썼다. 이 조사는 최흥열 부장(현 KIDC 이사장)이 그의 영전에서 읽어 우리 직원들이 눈시울을 붉혔다는 말을 박순진 부장으로부터 며칠 후에 들었다. 나는 협력단도 이제는 현직에서 병을 얻거나 사고로 사망한 직원에게는 협력단장(協力團葬)으로 장례를 치러야한다고 생각한다. 협력단이 한시적으로 계약한 봉사단원에게는 ‘협력단장(協力團葬)’으로 장례를 치루며 정직원에게는 하지 않는 것은 자체로 모순이며 사회 통념에도 맞지 않는다.

 

선배인 이경수 이사는 나에게 말했다. 우채석 부장 나현 차장의 암으로 인한 사망은 직업병이 분명하며 그에 합당한 처리를 협력단이 해야 하는데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암은 스트레스에서 오는데 우 부장이 그동안 얼마나 스트레스에 시달렸으며 일에 파묻혀 검진도 제때에 못 받았으니 이게 직업병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나는 직업병의 정의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 줄 잘 모른다. 다만 학교 졸업 후 평생을 협력단을 천직으로 열심히 다니다가 정년을 앞두고 병으로 쓰러진 이의 가는 길을 ‘KOICA (葬)’으로 배웅하는 것이 협력단의 최소의 도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채석 부장 나현 차장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빈다.

 

열린 세상을 위해

(우채석 인형 영전에)

 

논개 충절 담아 진주벌 풍성히 적시며 흐르는 남강

오늘도 촉석루 휘감고 남해로 가네.

 

1955년 이월 스무 이렛날 !!!

36년 민족의 아픔, 3년 동족상잔의 비극

다 이겨낼 새 생명 “응해”하며 태어나니

그 이름 “우채석!!!”

 

당항리 장난꾸러기에서

진주 말 잃은 소년으로

그리고 이문의 의협아로…

오! 하늘이 정했는가? 아름다운 채애경석 사랑이여 !!!

 

다 함께 잘 사는 인류사회 구현을 위해

서울에서 파라과이에서 페루에서 그리고 성남에서

지구촌 청소년들에게 우리 국민들에게 남미 인디오들에게

열린 세상을 위해 정열을 다 바친

아, 나눔과 섬김의 KOICA여!!!

 

어렵고 힘든 일은 앞장서고

그 공은 후배, 동료, 선배에게…

 

어두움 헤치고 광복 67년,

해외개발 국제협력 웅지 품은 채석 청년

어언 불혹 지천명 지나 이순이 내일인데!!!

일제에 할퀴고 동란으로 거덜 난 산하

뭉치고 다지어

보릿고개 터널 넘어 한강의 파도 타고

세계경제 10대 대국 창공에 우뚝 선 대한민국인데…

바로 그대와 함께 일군 조국인데…

님이 사랑한 코리아인데…

 

아 슬프도다 오늘, 2012년 어린이날!!!

우리 곁을 떠나 홀로 먼길 가시네 우채석 부장!!!

회자정리라지만 어찌 그리 무정히 가신단 말이오?

벌써 보고픈 마음 그리움 되어 저 하늘을 헤메네!!!

 

경석이는 국토방위 수민이는 진리탐구

저만치 신애경 여사 입술을 깨무네

 

아 이제 아픔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라, 우채석 선생!!!!

님이 사랑하는 조국은

경석 수민 그리고 그 손들로 이어져

영원히 영원히 여어---엉원히 푸르리라 !!!!!

 

2012.5.5

 

Dr. SanGang Bullo Phoenix David InYeup Song

General Project Manager

KOICA Philippines Water Landmark Project Office

한국국제협력단 필리핀수자원사업단장 송인엽 읍상(泣上)

 

▲우채석 부장과 나현 차장이 학업 마친 후 신명을 다 바친 한국국제협력단(KOICA) 본부 (c)시사타임즈

(한충식 사위를 맞다)

 

한충식이사의 장녀 결혼 소식이 날아왔다. 많은 청첩장을 받았지만 나에게 특별한 소식으로 전해졌다. 세월 빠름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불현듯 한충식 이사 본인의 결혼을 발표하던 30년 전이 생각났다. 그는 같은 과에서 근무하던 미모의 최성희와 사내 결혼하였다. 그러나 발표할 때까지 아무도 둘이 연애하는지를 몰랐다. 심지어 같은 과에서 근무하던 김용표 본부장, 옥이호부장, 임우택 부장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발표하던 날 김용표 본부장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는 날이었다. 나는 그에게 전화로 한충식이 사내 결혼 하는데 상대가 누구겠냐고 물으니 딴 여직원 이름만 댔다. 그래서 내가 성이 최 씨라고 힌트를 주어도 딴 최 씨만을 말하였다. 내가 한충식의 옆자리에 근무하는 최성희라고 말하자 김용표 본부장은 놀라워했다. 한충식 이사는 직장 초년병일 때부터 그처럼 과묵했고,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체구는 크지 않아도 주량도 두주불사여서 당시 캐나다 투자이주 변호사들과 술자리에서도 그들을 항시 압도했다.

 

▲한충식 과장과 송규영 아이 (c)시사타임즈

내가 그때 한 이사에게 최성희의 미모에 반해 청혼을 했느냐가 물으니 그는 미모도 좋았지만 같이 근무하면서 지켜보니 성실했고 야근하며 저녁 식사를 할 때 직원들을 섬세하게 배려해주는 것을 보고 마음도 따뜻한 여자인 것을 알고 대쉬했다고 고백했다. 그의 딸도 엄마를 닮아 미모와 성실을 갖추고 마음이 따뜻한 처녀일 것이다. 그 총각은 횡재했다.

 

그리고 한 세대가 훌쩍 흘러 그의 딸이 결혼한다니 어찌 한 감회가 없겠는가? 나는 적막한 이사벨라 산동네에서 중천의 달을 보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나는 한충식 이사에 전화를 걸어 진심으로 축하하고 부러운 마음을 전했다.

 

우리 규영이 백일 때 직장 동료들이 스무 명 넘게 고덕동 우리 집에 와서 축해해 주었다. 그때 한충식 대리가 대표로 우리 규영이에게 금반지를 끼워줬다. 그 사진이 지금도 규영이의 앨범에 남아 있어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남다른 감회에 젖어 홀로 미소를 짓는다.

 

나도 이제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고 나이가 환갑 줄에 들어서니 가장 부러운 것이 친구들이 자기 자녀의 결혼 소식을 알려오는 것이다. 결혼 초기에는 누가 아파트를 장만했다는 것이 그 후에는 누구 아들이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것이 부러웠는데 이제 자녀 결혼 소식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다음은 뭐가 부러울까? 아무튼 우리 애들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짝들을 빨리 찾아오면 좋겠다.

 

(최정원의 마지막 인사)

 

▲류광경 교수 가족 (c)시사타임즈

만 50세 최정원이 팔순의 부모, 남편과 두 아이를 두고 2013년 1월20일, 천안에서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로 올랐다는 소식을 필리핀 이사벨라에서 들었다. 정원은 나에게는 친 동생과 같은 존재로 그녀도 나를 친오빠와 같이 따랐다. 중학교부터 나의 죽마고우인 최규원의 동생이다.

 

우리가 중학교 때 최규원에게는 76세 된 할머니, 부모, 규선 형과 남동생 규진 그리고 맨 밑으로 초등하교 1학년생인 여동생 정원이가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그의 집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묵주를 손에 굴리며 ‘인엽이 왔구나.’ 하고 빙긋 웃고 다른 말씀이 없었다. 친구들이 떼로 몰려가도 어머니는 항상 밥상을 차려 주었다. 그의 아버지도 우리에게 왜 공부 안하고 놀러만 다니냐며 혼내는 법이 없었다. 그저 웃으며 ‘너희들 왔냐?’고 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대입시험에 떨어져 낭인시절에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 친구들은 주로 그의 집에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모였다. 그 때의 친구들이 이진권, 이승수, 박성철, 황의돈, 김도영, 박정우, 전두희, 최용철, 송형수, 권홍택, 김해강 등인데, 대학 졸업 후 나의 해외 떠돌이 생활 때문에 그리운 그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1980년 그 할머니가 88세 되던 때, 나는 약혼을 했으며 나는 그 집에 약혼자와 같이 인사갔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인엽이 색시감이 참 곱게도 생겼다’ 고 하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하더니 ‘애도 잘 낳겠네’라고 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만 100년을 학처럼 곱게 늙으시고 101세 되던 1994년에 연기처럼 가셨으나 나는 캐나다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시는 길을 배웅치 못했다.

 

그의 집에서 고명 막내 늦둥이인 딸 정원이는 누구한테나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할머니와 부모의 사랑은 물론이고 세 오빠와 나를 비롯한 오빠 친구들로부터도……. 특히 정원이는 진권, 해강, 의돈, 그리고 나를 무척이나 따랐다. 정원이는 예쁘게 자랐고 공부도 잘 해서 그 지방 명문인 J여고를 거쳐 S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S대 화공과 천재로 소문난 L군을 친구의 소개로 만나자 마자 둘은 불같은 연애에 빠졌고 둘은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했다. 결혼 직후 남편이 미국 M대로 유학가게 되어 그들의 미국생활이 시작되고 5년 후에 남편은 박사가 되어 S대 교수가 되어 돌아왔다. 정원이는 민하, 민호의 엄마가 되어 돌아 왔다. 1995년도 쯤, 우리 집에 한 번 놀러 온 적이 있어 우리는 반갑게 만나 옛 이야기, 그들의 미국 이야기 또 나의 에콰도르, 캐나다 이야기 등을 주고받았다. 그의 딸 민하가 영어로 스토리텔링을 아주 잘 해 인상 깊었다. 나는 그 애가 훌륭한 아나운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2012년 12월 초, 필리핀 이사벨라에 있는 나에게 최규원이 울며 전화를 했다. 정원이가 위암 4기 진단을 받고 삼성병원의 의사들이 수술을 말렸으나 억지로 2011년 10월에 수술은 했으나 지금은 아주 위험하다며……. 정원이와 남편은 오빠인 규원이나 친정집에 정원이의 암 수술과 항암치료 받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 하도 찾아오질 않아 그의 집을 방문하여 이제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정원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몸무게가 30kg이란다. 키가 170cm인데…….

 

그런 정원이가 2012년 3월 말,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 왔다. 내가 필리핀에 근무 나간다는 말을 오빠한테 전화로 전해 들었다며……. 오랜만에 보니 살이 좀 빠지고 얼굴이 안 되어 보이기는 했으나 투병생활 하는 줄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정원이는 자기 병세를 알고 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보러 온 길이었는데, 마지막 인사였는데……. 나는 그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다.

 

그리고 2013년 1월 20일, 정원이가 하늘나라에 올랐다는 전화를 필리핀 이사벨라에서 받았다. 아마 미소를 지으며 올라갔을 것이다.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지만, 팔순 부모가 계시고 정정한 오빠들이 셋이나 있는데 뭐가 급해서 그렇게 서둘러 갔을까? 그를 끔찍이도 귀여워했던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그리고 그의 남편 L교수는 정원이의 투병을 거의 2년 동안이나 혼자 어떻게 감당했으며, 또 정원이가 없는 많은 세월을 어떻게 견디어낼까?

 

정원이의 예감이 불행히도 적중한 셈이 되었다. 작년 3월 말, 그가 암투병 중에도 나를 찾아와 만난 것이 이생에서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나는 적막한 필리핀 산동네에서 그의 명복을 빌었다. 아내가 내 대신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빈소를 다녀온 아내가 전화로 나에게 말했다. 슬피 우는 정원이의 딸 민하의 모습이 정원이와 똑같다는 거였다. E대 대학원 영문과 졸업반이란다. 그리고 아들 민호는 외모나 태도가 자기 아빠의 판박이로, K대 공대를 다니며 아빠의 길을 가고 있단다. 그래, 정원이는 떠났지만 그의 분신들이 저렇게 있으니 정원이는 살아 있는 거야. 생명은 영원한 거야. 장례는 천안공원에서 수목장으로 치뤘단다. 나중에 L교수도 그 나무로 돌아가겠단다. ‘인생은 한 줄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고 노래한 시인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아니한다. 인생은 영원히 계속된다고 믿는다. 정원이는 이생을 떠났지만 그 분신들을 남겼고, 그 분신들은 또 그의 분신들을 만들어 잘 성장시킬 것이고 또 그 분신들 또한 자기분신들을 만들고 또……. 그렇게 인생은 영속될 것이다.

 

5. 필리핀에서 맞은 4345주년 개천절

 

4345주년 개천절에

 

하늘 열려 단군왕검 큰 뜻을 품고

신시 박달나무 아래 눈을 감는다

호돌아 곰순아 마늘 먹어라

쑥도 먹어라

석 달 열흘 햇빛을 보지 말아라

 

그래 땅이 사람이다

사람이 하늘이다

하늘 땅 이로우면 사람이 평화롭고

사람이 이로우면 천하가 태평하다

 

달리고 뛰어라 저 땅 끝까지

박차고 나아가라 저 바다 끝까지

솟구쳐 올라라 저 하늘까지

 

대륙의 동쪽 끝

백두산 정기 뻗어 태백 이루고

금강 설악 지리로 한라에 닿네

경상 울릉 성인봉 편히 쉬어요

외로이 나 홀로 섬 동쪽 지켜요

 

오늘은 4345!

천번 만번, 그래 억 번 하고도 한번을 더 가자

434500004345가 저기에 있다

 

홍익인간님의 뜻

서로 사랑 우리 뜻

너와 나 손잡고 춤 한 번 추자

 

덩실 덩실 더덩-실

더덩실 덩-실…

 

(2012년 10월3일 아침, 필리핀 이사벨라에서)

 

▲필리핀 바나우에 다랭이논, 에드가와 2012.7 (c)시사타임즈

(필리핀 4번째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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