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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4)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4)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지금은 압바사바드를 통과하고 있었다. 시장은 어디를 가나 붐볐다. 붐비는 거리를 사람 구경, 물건 구경하면서 달리다 정육점에 소꼬리가 있는 것을 보고는 로또라도 당첨된 기분으로 들어가서 싸달라고 했다. 우리 돈으로 만 원 정도이니 정말 로또에 당첨된 것이다. 유라시아를 달리며 꼬리곰탕을 먹을 수 있는 건 행운이었다. 이 지역은 가족 단위로 휴가 오는 사람들이 많은지 대부분 호텔에 주방 딸린 방이 있었다. 숙소는 아파트 형식이다. 방 두 개에 주방과 응접실이 딸린 카스피해의 낙조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 우리 돈으로 3만 원 정도이다. 이런 곳에서는 아주 잠시이지만 휴양객의 낭만을 즐겨도 되겠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그것을 냄비에 넣고 두세 시간 푹 고아서 먹으니 김치가 없어서 아쉬웠지만 지난번에 장에서 산 마늘장아찌와 함께 먹으니 설날 떡국 못 먹은 보상은 충분히 된 것 같다. 이란 음식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이 마늘장아찌다. 여기서 하루 푹 쉬고 꼬리곰탕 재탕 삼 탕 하며 몸보신을 해야겠다. 다음날, 어제 집에 초대해서 커피를 대접했던 마리에게서 저녁 8시 반에 자기 집에서 식사를 같이하자는 연락이 왔다. 보통 이란 사람들의 저녁이 10시나 되는 것임을 감안하면 나의 일정을 배려한 시간 약속이지만 그것마저도 내게 너무 늦은 저녁이었다 가서 저녁을 먹고 바로 와도 열 시가 훌쩍 넘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내 생체리듬이 깨져서 여러 날 고생을 할 것 같았다.

 

생체리듬을 유지하는 것은 길고 고된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하루쯤 이란 현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같이 식사하면서 소소한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반갑고 좋은 초대였지만 너무 늦어 그다음 날 일정에 차질이 있을 것 같아 아쉽지만 응하지 못했다. 이란 사람들은 저녁을 늦게 먹는다고 한다. 보통 저녁을 10시 정도에 먹는데 8시 반도 우리를 배려해서 그렇게 초대를 한 모양이다. 이란에서는 회교의 율법에 따라 휴일이 금요일이다. 주 5일 근무를 하면서 목, 금에 쉰다.

 

이란 여자들의 히잡 쓰는 모양새를 보며 우리 고교 시절 모자 쓰는 모양새를 떠올렸다. 당시 범생이들은 이마까지 모자를 당겨서 반듯하게 쓰고 다니고 불량기가 있을수록 모자가 뒤로 젖어지게 쓰고 다녔다. 아마 나도 모자를 뒷머리의 2/3 정도에 걸치고 다닌 것으로 기억이 된다. 이란 여자들의 히잡이 꼭 그렇다. 젊고 멋쟁이일수록 히잡은 뒤로 젖혀져 있다. 심한 여자들은 거의 뒷머리의 포니테일에 걸쳐져 있다. 그것 때문에 부모들에게 잔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녀들은 히잡의 머리에서 젖혀 쓰면서 ‘우리는 저항하고 있다.’고 구호를 외치도 있는 중이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요즘 젊은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쯔쯔” 참고로 이 관용구는 함무라비 법전에도 나와 있다고 하니 어른들이 보는 젊은이들은 늘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다르지 않은 인류의 보편적인 삶이 모습인가보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에서는 모든 여성에게 히잡 쓰기가 강요되어왔다. 그 전에 팔레비 왕 시절엔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쓰게 해달라고 데모를 했다. 샤 레자 필레비 국왕이 히잡 착용을 금지하였었다. 친미 팔레비 왕조는 서구식 복장 문화에 관대해서 한때 이란 여성들은 미니스커트 열풍이 지나가기도 했다.

 

이제는 히잡을 강요하니까 히잡을 벗을 권리를 위해 데모를 한다.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안 쓰겠다는 것이 아니라 쓰든 말든 선택할 자유를 달라고 외치고 있다. 이란에서는 히잡을 벗고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미투’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차도르와 히잡을 옷장 안에 걸어두고 언제든 패션에 따라 선택하고 싶어 한다. 자칫 따분할 수 있는 이슬람에 대하여 같이 공부 좀 해보자고 여자들의 히잡 이야기로 시작했다.

 

이슬람은 오늘날 유라시아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거대한 담론이다. 중국의 서쪽, 유럽의 동쪽, 러시아의 남쪽, 인도의 북쪽, 중앙아시아가 모두 이슬람 문화권이다.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위해서 이슬람은 그저 그렇고 그런, 미개하고 발전하지 못한 나라들이 수용하고 있는 이상야릇한 사이비 종파가 아니라는 데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세계 19억의 인구가 믿는 중요한 종교로서 이해해야 하고, 중요한 문명, 문화로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에게 이슬람은 필연적이고 동반자적 존재이다. 유라시아 시대를 선도하며 유라시아로 뻗어 나가기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서구인들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아무 근거도 없이 근대화와 서구화를 동일시하는 최면을 거는 데 성공했다. 이 최면은 깊게 뿌리를 내려서 근대적이고자 한다면 서구적 문화와 가치관과 종교마저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는 세계화의 기치 아래 신 제국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과 서구의 이데올로기로 지금껏 작동하고 있다. 이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정치, 경제적 힘의 뒷받침으로 유지되어 왔다.

 

이란의 대통령 하타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구는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분야에서 엄청난 힘을 소유하고 있고 전 세계는 서구의 금융기관들에 의해 통제되고 규제되고 있다. 지구촌 전역의 철저한 통제와 미국 방식의 이익을 위해 서구는 이란은 물론 어떤 민족에게도 완전한 자유와 독립과, 자주권을 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를 속이기 위해 과학과 문화라는 가면을 사용한다. 그리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그들에게 종속시키려 하고 저항이라도 하면 파멸로 몰아넣고 마는 강력한 적이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타당한 면이 많아서 인용해보았다.

 

6세기 후반 들어서며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오랜 전쟁으로 실크로드는 길이 막히게 된다. 이때 대상들은 아라비아반도를 안전한 통행로로 선호하게 되었다.

 

이 무렵 메카가 대상 무역의 중요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슬람교는 우상을 숭배하는 많은 유목 민족이 흩어져 살던 아라비아반도의 혈연적 부족사회 속에서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다. 무함마드는 모세와 예수의 계승이자 완성을 자처했다. 그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융합한 간단치 않은 종교를 만들었다. 기독교는 결코 유럽의 종교가 아니다. 쿠란은 구약과 신약을 망라한다. 쿠란은 경전을 넘어 철학과 윤리, 민법과 상법, 형법, 국제법을 다 담아냈다. 게다가 문장까지 아름다워 암송에 적합하다.

 

이슬람의 창시자는 마호메트이다. 그는 부유한 과부 하디자의 대상에 들어가 그녀의 신임을 얻고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그는 히라산의 동굴에서 명상을 하다가 가브리엘을 만나 알라의 계시를 전한다. 마호메트는 초승달이 뜬 밤에 신자들을 이끌고 메디나로 가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한다. 그 해가 622년이고 이슬람력의 첫해다. 대부분 이슬람 국가의 국기에 초승달이 있는 이유이다.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라면 이슬람의 상징은 초승달이다. 세계 3대 종교인 이슬람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스마엘, 모세를 거쳐 무함마드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슬람은 마호메트를 최후의 예언자이며 신의 사자로서 신의 뜻을 가장 완전하게 전한다고 믿는다. 그는 겸손하고 화를 잘 내지 않고 자신의 습관이나 생활방식에 매우 엄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1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이슬람을 굳건히 뿌리내리게 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자질도 있었지만 시대적인 상황도 주요 원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아랍 세계에는 30개가 넘는 배두인 부족이 서로 반목하고 싸웠으며 불평등과 무질서가 만연했다. 그는 이런 무질서를 타파하기 위해 종교를 선택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도움이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

 

그가 메카에 머물렀을 때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 역할에 그쳤으나 메디나로 이주한 뒤에는 이슬람의 믿음 아래서 사회적 통합을 이룩하려는 정치적 지도자 그리고 군사령관의 권한까지 갖는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메디나의 유다 교도들을 몰아내고 630년 그가 죽을 때까지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 지역을 통일한다. 이슬람이 어느 순간 나타나 순식간에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 지역은 오랜 전통과 역사가 있는 지역이었다. 문명의 발생지였고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이슬람은 어떻게 보면 이런 문화와 역사의 융합물이었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 세계의 긴 역사 속에서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종교이면서 세속성과 정치성으로 외연을 확대하였다. 632년 무함마드가 사망한 후 이슬람 전통에 따라 합의제로 칼리프를 후계자로 옹립해야 한다는 의견과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였던 유일한 혈통인 알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였다. 전자를 수니파라 부르고 후자를 시아파라 부른다.

 

꾸란은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주어진 신의 말씀으로 간주되며, 인간이 의지해야 할 완벽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이슬람교는 종교적 수행을 중시하지 않고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을 결합해놓은 전형적인 재가 신앙이다. 시아파의 이맘을 숭배하는 것을 제외하면 원칙적으로 성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함께 여는 밝은 미래를 위한 인류의 과제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입장에서 가장 오해를 할 수 있는 부분이 이슬람의 여성 문제이다. 광활한 사막은 역사 이래로 약육강식의 세계이다. 그들은 오랜 세월 다른 부족과의 전쟁 속에서 삶을 이어왔다. 유목민들은 찾아오는 손님을 환대하지만,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여자와 아이들은 다른 부족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사고 예방책이었을 것이다. 히잡, 차도르, 부르카 등은 이런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전통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착한 것도, 나쁜 것도,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럴 뿐이다. 비록 종교적인 의식으로는 요지부동이지만 가정이나 직장에서 여성의 지위는 높아 보였다. 여자 부통령까지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란은 여전히 여자가 운동경기를 보았다는 이유로 징역을 살기도 한다. 이슬람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자행되는 탄압과 폭력은 나그네에게 충격적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다. 종교적 이유이건 국가안보이건 사회질서 유지이건 말이다. 이란에는 대통령과 국회가 있지만 종교지도자가 국가 원수인 신정 독재국가이다.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쉽게 제압하기 위해서는 인권과 언론의 탄압은 늘 검은 베일 속에 가려지게 마련이다. 이란에 들어오기 전 사람들은 이란에서 반정부 시위가 폭력적으로 벌어지니 안전에 각별히 조심하라는 충고를 수도 없이 하였지만 실제로 지나면서 시위를 보지는 못했다.

 

무슬림은 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복종하지도 다른 인간에게 복종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단지 예의를 지키길 바랄 뿐이다. 내가 만난 무슬림들은 대부분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쾌락을 쫓기보다는 여유를 찾는 것 같았다. 이슬람의 폭력성이 강조되는 것은 석유 이권을 둘러싼 서구 열강들의 폭력성을 감추려는 의도에서 확장 재생산된 면이 크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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