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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5)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5)

아이들과 함께 유라시아의 미래로!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나의 발걸음은 매일 42km씩 평양과 서울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럴수록 한반도 봄소식도 가까이 들린다. 벚꽃이 활짝 만개했다고 하고, 평화의 봄소식도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아마도 유라시아를 달리면서 사람들 가슴 속에 있는 ‘평화의 마음’을 엮어내는 일이 하늘에 상달 된 모양이다. 그러나 봄에는 심술궂은 바람을 견디어내야 한다. 워싱턴에도 벚꽃 소식이 들려오지만 난데없이 겨울 코트를 입고 등장한 매파 3인방 움직임이 꽃샘추위처럼 매섭고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바람이 늑대처럼 울부짖고 모래가 일어나 얼굴을 때리더니 금세 잦아들었다. 2,500년 고도(古都) 부하라로 가는 길에도 이국정취가 흠뻑 담긴 이름 모를 꽃이 피었다. 그 향기 나그네의 정신을 몽롱하게 한다. 제멋대로 지저귀는 새소리도 천상의 화음을 이룬다. 그 길을 달리는 나에게 동반자가 생겼다. 저 뒤에서 쫓아오던 당나귀 마차가 달리는 내 앞을 지나간다. 무료하게 달리던 나는 조금 속도를 내어 당나귀와 나란히 뛰어갔다. 당나귀의 발굽 소리가 경쾌하여 발걸음이 가벼워졌는데 마부가 심술이 났는지 당나귀 궁둥이를 마구 채찍질해 앞으로 치고 나갔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당나귀를 무슨 재주로 쫓아가나 싶어 포기하고 한참 아무 생각 없이 내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다 보니 아까 내 앞을 지나간 당나귀가 바로 앞에 보인다. 열심히 쫓아가서 다가가니 또 마부가 당나귀 엉덩짝을 연신 두들긴다. 당나귀 엉덩이에 화재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지만 지친 당나귀는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심술 많은 마부도 채찍질을 멈추었다. 당나귀 마음은 잔뜩 심통이 났겠지만 발굽 소리는 경쾌하게 들려서 보조를 맞춰 한동안 달렸다. 마부와 나 당나귀 셋이 동행했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침묵했다. 옆에 누군가가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내게 침묵은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게으른 당나귀는 힘이 달리는지 맞으면서도 속도를 내지 못한다. 이제 마부도 어쩔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멋쩍어한다. 이래서 나와 당나귀의 동행은 한동안 이어졌다. 무표정한 마부와 쫑긋한 당나귀 귀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달리는 길은 지루하지 않아서 좋았다. 카라쿰사막을 지날 때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듯 언제나 똑같은 사막이어서 힘들고 지루해서 반야심경을 독경하기도 하고 영주(靈呪)를 암송하기도 하고 숫자를 하나, 둘, 셋……. 백까지 세기도 했다.

 

유목민이 초원에서 가축을 몰고 계절을 따라 이동하던 순환적 게으른 시간에 들어왔다.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 흘러내리는 시계와 같이 시간이 천천히 흐르니 마음의 흐름도 한결 여유가 있었다. 처음 인간이 시간을 재면서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힘 있는 자들이 공간을 재서 소유하듯이 시간도 재서 소유하고 독점할 수 있다고 의기양양했을 수도 있겠다. 그들의 기대대로 시간은 곧 돈이 되어서 자본주의를 돌리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자신이 시간에 억압당하고 구속당하는지 쉽게 깨닫지 못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당나귀와 헤어지고 나니 하굣길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내 달리는 모습을 보고 우르르 몰려와서 함께 달려준다. 봄 화단에 쑥쑥 올라오는 수선화 줄기 같은 아이들은 초원 염소 새끼처럼 힘이 넘쳐 내 주위를 이리저리 껑충껑충 뛰면서 달린다. 봄의 생명력과 아이들의 활기가 서로 증폭작용을 하면서 싱그러운 기운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어 온다. 아무리 개구쟁이 짓을 해도 귀엽고 예쁜 게 아이들이다. 황무지에서 만나는 보석 같은 아이들이다.

 

길가에 어린아이를 안은 엄마가 아이의 손을 들어 흔들어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은 아이를 안은 엄마의 웃음 진 얼굴이다. 엄마의 손에 빵이 들려있다. 아이에게 빵을 먹이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도시 전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부하라로 가는 길에서 아이들과 달리다 보니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다. 과거에 찬란했던 도시를 달리면서 마음은 아이들과 함께 유라시아 실크로드가 광역생활권이 되는 미래로 달려간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문이 열린 집안의 마당에 양의 울음소리가 죽음을 앞둔 생명의 불안한 소리로 들려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집주인은 칼을 들어 어떤 의식을 치르는 듯했다. 산 생명을 거두는 것은 대사(大事), 유목민들의 종교적인 경건한 몸짓이었다. 남자가 양을 칼로 찌르는 동작은 간결하였다. 칼날이 순간 번쩍였을 뿐 옷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았고 솟구치는 피는 그릇에 받아졌다. 금방 양은 잠시 꿈틀거렸을 뿐 사지는 늘어졌다. 구경하던 아이들도 숨을 죽였다. 이들에게 죽이는 행위는 낯선 행위는 아니었지만 게임같이 함부로 하는 행위도 아니었다. 그들은 삶과 죽음의 성스러운 관계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부하라에 들어섰다. 앞에 당나귀가 끄는 마차가 가고 있다. 그 위에 소년과 소녀가 타고 가고 있다. 소년이 오빠 같았다. 애가 옆으로 달려가자 내 속도에 맞춰서 따라와 준다. 함께 미소를 나누며 간식으로 준비한 과자 봉지를 주니 오빠는 동생에게 봉지를 건넨다. 도시의 아이들은 돌아가는 일상의 수레바퀴 아래서 비명을 지를 때 이곳의 아이들은 수레바퀴 위에 앉아 초원을 달리고 있다. 부하라에 들어섰을 때 천년이 넘는 성곽 옆에서는 철없는 아이들이 공을 차며 뛰노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 아이들 옆으로 나그네의 혼을 사로잡을 문양과 색상의 도자기나 수공예품을 파는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하다. 부하라에는 몇 박 며칠 밤새고 들어도 질리지 않는 수많은 전설과 노래들이 있다.

 

일찍이 매슈 아널드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여름이면 태양이 파미르 고원의 눈을 녹여 홍수가 지는 그곳’이라고 노래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속담에는 “다른 곳은 빛이 하늘에서 내리비치지만, 부하라는 빛이 땅에서 하늘로 비친다.”라는 말이 있다. 부하라의 신비함과 매력을 자랑하는 말이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동방견문록에서 부하라를 위품 있고 거대하며 페르시아 전역에서 가장 빼어난 도시라고 묘사했다. 부하라에서 그의 아버지 니콜로와 그의 삼촌 마태오는 3년간 머무르다 쿠빌라이칸의 사신을 만나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부하라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서방과 동방을 잇는 실크로드의 중요한 오아시스 역할을 했다. 중국, 인도, 페르시아, 러시아의 진귀한 물건들이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곳에서 나갔다. 중국인들은 비단과 공단, 사향 등을 가져왔고 인도인들은 생면을 가져와서 비단을 가져갔다. 페르시안들은 이곳에 카펫, 모직물, 유리그릇, 투르크메니스탄 말을 가지고 왔다. 이 말은 한혈마라고도 불리고 천리마라고도 부르는 중국이 탐내는 명품종 말이다. 러시아인들은 이곳에 야생동물 가죽이나 말굴레, 안장 등을 가져오고 생면과 비단들을 싣고 가면 아주 기분 좋은 거래가 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슬람 학문 중 유럽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분야는 단연 수학과 의학이다. 특히 부하라 출신의 이븐 시노는 유럽 현대의학의 토양을 제공한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의학서 가운데 ‘의학전범’은 병리현상에 심리현상을 결합시켜 늑막염과 폐렴, 간염을 정확하게 구분해 냈다. 그는 또한 폐결핵, 전염병, 피부병, 성병, 상사병 등에 대한 구체적 치료법을 제시했다. 그가 알코올을 소독제로 추천한 최초의 의사이기도 하다.

 

라비하우스는 대형 우물을 낀 채 대상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했다. 타키라고 불리는 시장에는 낙타가 드나들 수 있도록 문이 사람 키 두 배가 넘게 만들었다. 칼란 미나레트와 칼란 모스크는 성곽 옆에 자리 잡은 부하라 전설의 상징이다. 칼란 미나레트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첨탑이다. 46m에 이르는 탑은 하루 다섯 번의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의 공간인 동시에 맨 위에 불을 붙이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 같은 대상들에게 사막의 등대 역할을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지쳐가던 카라반들은 끝없는 사막에서 불빛만 보고도 부하라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부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 때도 이 탑만을 건드리지 않았다. 몽골인들이 정복한 수천 개 도시 가운데 칭기즈칸이 친히 입성한 도시는 부하라 하나뿐이다. 보통 승리가 확실시되면 그는 잔혹한 파괴를 명령한 후 야영지로 되돌아가고 그의 충실한 전사들이 마무리했다. 칭기즈칸이 부하라로 입성하여 온 도시를 모조리 파괴하라고 명하고 이곳을 지날 때 역사에 남을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칭기즈칸은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주우려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부하들은 칭기즈칸이 칼란 미네라트에 경의를 표하는 줄 알고 그것만은 건들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 내가 칼란 미나레트 앞에서 경의를 표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동방의 떠오르는 태양, 몽골군은 '카라키타이'를 손에 넣어 동아시아를 거의 석권한 후 '3명의 외교사절과 450명의 대상'을 호라즘으로 보내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호라즘의 총독은 그들을 몰살하고 상품을 몰수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쳐 온 낙타 몰이꾼이 칭기즈칸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고했다. 칭기즈칸은 전모를 밝히기 위해 사신 3명을 다시 보낸다. 그러나 또 1명은 죽이고, 2명은 수염을 깎아 추방했다.

 

1260년 페르시아의 연대기 기록에는 “몽골 왕궁에서는 분노의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인내와 자비의 눈에 흙이 들어갔고 진노의 불이 사납게 타오르면서 그 눈에서 물이 말랐으니 그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었다. 총독의 폭력은 카라반을 쓸어버렸을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초토화했다.”라고 기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뿐만 아니라 내친김에 전 유럽을 피로 물들게 하였다. 칭기즈칸의 군대는 히말라야산맥에서부터 카프카스 산맥까지, 인더스강에서 볼가강까지 만나는 곳마다 모든 영토를 짓밟았다.

 

칭기즈칸의 후손 가운데 아미르 알림 칸이 왕의 지위를 누리던 마지막 인물이었다. 1920년 소비에트 혁명의 물결에 휩쓸려 퇴위할 때까지 그는 권좌에 있었다. 칭기즈칸이 부하라에 입성했던 1220년부터 1920년 러시아에 의해서 강제 퇴위될 때까지 700년 동안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우즈베키스탄을 통치했는데 이 왕조가 역사상 가장 긴 가족왕조로 꼽힌다.

 

내가 아이들과 달릴 때 두 번이나 모자가 바람에 날아갔다. 아이들 앞에서 모자를 주우려 두 번이나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숙였다.

 

“이 순진무구하고 깨끗한 아이들은 건들지 마라! 이 아이들이 무덤까지 이르도록 평화로운 세상을 보장하라! 아이들은 생명이고 희망이고 평화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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