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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91)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91)

톈산을 넘는 길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신장 위그루의 마을들은 음산한 분위기를 주었다. 담장은 공산당에서 배급해주었는지 똑같은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페인트 색은 밝은색이었지만 음산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잿빛이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보여준 살갑고 정감넘치는 호기심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이곳에서도 내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어서 쓸 수 있을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큰 도시를 지나면 화장실은 재래식이고 식당의 위생은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맨발은 혐오했다. 나는 쉬는 시간마다 발을 말리기 위해 양말을 벗고 신발을 벗기까지 한다. 이 사람들은 질색을 하며 쫓아낸다. 그러면 나가서 양말과 신발을 갈아신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다시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역사는 유구하지만 지난 세월은 하늘의 구름처럼 흩어지고 만다. 시간의 창끝이 13세기를 열었을 때, 이 길은 칭기즈칸의 20만 군대가 수십 수백만이 양과 소들과 함께 지금 내가 넘고 있는 톈산산맥을 반대 방향에서 호레즘을 정복하기 위하여 내려왔던 길이다. 계곡을 끼고 급경사 길을 맞바람을 맞으며 달리면서 800년 전 칭기즈칸의 군대가 그 혹독한 겨울을 이기며 이 산을 넘었을 그 고초를 생각해본다. 그들은 삶과 죽음, 고통과 희망, 전쟁의 공포와 승리의 환희,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범벅되어 이 산을 넘었을 것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그때도 그들이 내려오던 이 길에 포플러나무 가로수가 의장대 사열을 하듯 멋지게 늘어서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역사가들은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들이 얼마나 잔인하게 사람의 목을 베었는지만 기록에 남겼다. 800년이 지난 지금 내가 그 길을 되짚어가는 이 시간은 하늘 높이 뻗어 자라는 포플러나무는 톈산산맥으로 빨려드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터널을 이루고 있다. 확실한 것은 그의 말발굽 아래에서 전에 없었던 새로운 전쟁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나의 발걸음 뒤로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리라는 것이다.

 

혹독한 추위에 많은 병사가 얼어 죽었지만 그 추위를 뚫고 톈산산맥을 넘어오는 동안 살아남은 병사들은 세계 최강의 병사들로 거듭나고 있었다. 해발 1500m에 ‘이리’분지에 있는 이닝은 예로부터 톈산북로의 중요 거점 도시로 칭기즈칸의 군대에 무참히 짓밟힌 첫 번째 도시가 된다. 이렇게 시작한 칭기즈칸의 정벌은 순식간에 유럽을 초토화시키고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그 옛날 칭기즈칸의 군대가 지나갔을 그 길에 인민해방군의 트럭과 중화기, 탱크의 이동이 끝없이 이어진다. 이런 곳에서는 군대가 우선이라 지나가던 차들과 인민은 갓길에 차를 대고 군대가 다 지나갈 때까지 아무런 불평도 못 하고 인내심을 발휘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달리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무사히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한동안 잘 달려서 이닝을 지나고 있는데 개인화기로 무장한 경찰특공대(SWAP) 약 1개 분대가 작전을 하듯 차를 세우고 후다닥 뛰어내린다. 여권을 보자고 한다. 여권을 받아든 사람은 잠시 훑어보더니 바로 상관인 듯한 사람에게 넘긴다. 내게 어디로 가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이미 내 존재를 알고 있는 듯하였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나는 적어도 이곳의 공안들에게는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곳에서는 쓸데없이 나를 경계한다. 그들은 아무 설명도 없이, -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행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왜 달리는지 다 알면서 이들은 왜 나를 연행할까? 나는 졸지에 닭장차에 태워져 1시간 동안 중국공안과 어색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분위기 있는 카페 대신 좁은 닭장차였지만 처음 만나 어색하게 마주 보며 말이 없었던 건 여느 데이트와 비슷했다. 6.10 항쟁 때 덕수궁 앞에서 시위하다가 처음으로 백골단에 잡혀 호송차에 타 본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몇십 년 만에 중국의 공안 닭장차에 타 보는 여행의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공안들은 비교적 예의 바르게 행동했고, 통역이 올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라며 음료수까지 대접하는 호의를 베풀기까지 했다. 통역이 오기 전에 아까 군대가 지나가는 동안 갓길에 기다리느라 헤어졌던 지원차의 운전기사가 용케 찾아왔다. 앞뒤로 왔다갔다 몇 번 하다 안 보이면 당연히 공안에 있다는 그의 생각은 이곳에서는 상식이었으니까. 신장위구르에서 자부심을 갖는 인류는 두 부류밖에 없어 보였다. 공안과 공산당이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되겠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곳에서는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공안에 등록해야 한다.

 

이곳의 경찰과 군인은 타지의 근무자에 비교해 훨씬 많은 봉급을 받는다고 한다. 그것은 위험수당이고 생명수당일 터였다. 봉급의 액수는 당사자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기도 하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게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무감각하다. 이들은 봉급에 충성한다. 여기서 그 봉급은 신장위그루 민족 독립의 꿈을 좌절시키는데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신장위구르 지역을 치안이 불안한가 보다. 잘 꾸며진 공원에도 담장이 쳐져 있고 입구에는 공안이 검문해서 공원은 언제나 썰렁한 모습이었다. 모든 주유소에도 바리케이트가 쳐져서 주유하러 들어가는 차마다 검문하고야 들어갔고 쇼핑몰도 그러했다. 심지어 호텔에도 공안의 검색대를 통과해야 했다. 여행자는 이런 상황을 조기에 받아들여야 여행을 그나마 즐겁게 할 수 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신장위구르지역은 청나라 때 중국에 복속되었는데 늘 중국으로부터 이탈을 꿈꾸었다. 1933년과 1944년 두 차례에 걸쳐 동투르크메니스탄 공화국을 수립하였으나 1949년 왕전이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점령하였다. 소련이 해체되고 국경 넘어에 ‘~스탄’ 국가들이 독립을 하자 중국은 긴장했다. 많은 위루르인이 ‘위구리스탄’ 건국을 주장했다. 지금도 독립의 꿈은 잠복하여서 중국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톈산을 넘어가는 지금 한국은 세기를 통과하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 새로운 역사 시대의 톈산을 넘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한국도 이 역사의 톈산을 무사히 넘고 나면 세계 최고의 민주국가요 세상 끝까지 평화를 퍼트리는 문화선진국이 될 것 같다. 중국은 오랜 시간 몽골족의 지배를 받았고 만주족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전에는 흉노에게 조공을 바쳤던 것을 역사가 이야기하여주고 있다. 입국 첫날부터 중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야기로 출발하는 이유는 중국과 오래도록 좋은 이웃 관계를 유지하고픈 마음 때문이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던 천하일색 양귀비보다 더 예쁘고, 문장에 예악까지 겸비한 중국 4대 미인 중의 으뜸인 왕소군의 이야기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아킬레스건 중의 하나이다. 중국에 들어서자마자 중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싶은 것은 아마도 역사와 관계가 있고 아까 달갑지 않은 공안과의 데이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중국은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현대적 민족국가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오랜 역사 동안 스스로 천하(天下)라고 생각하며 주변국들에 어깨 노릇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중원의 통일을 이룬 위대한 황제 한고조 유방은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흉노에게 쫓겨 백등산에서 7일간이나 포위당하자, 한고조가 묵특선우(왕의 호칭)의 왕비에게 선물을 주어 겨우 장안으로 도망치는 능욕을 당했다. 이후 한나라는 공주를 포함한 여자와 비단 등을 조공으로 바치며 형제 관계를 맺고 장성을 경계로 하여 침공하지 않는다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는다. 예나 지금이나 조공을 바치는 것, 특히 여자 그중에서도 왕실의 여자를 바치는 일은 치욕 중의 치욕이다. 이후 유방은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어갔다.

 

원제(元帝)는 호색가였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황실 화공(畵工)인 모연수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궁녀들은 하나 같이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지만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못했다. 뇌물을 좋아하는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볼품없게 그려 황제에게 바쳤다. 덕분에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왕소군이 입궁하여 쓸쓸히 5년을 보내고 있을 때 남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전통대로 공주와 혼인하고 싶다고 했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연을 베풀고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궁녀들에게 술을 권하게 했다. 호한야는 주연이 시작되자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넋이 빠져서 바라보다가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元帝)는 그때 처음으로 왕소군을 보게 되는데 너무도 아름다운 천하절색이어서 보내기 싫어졌다.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고 흉노와의 관계를 고려해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혼수 준비를 해야 한다며 시간을 끌며 왕소군과 며칠간의 황홀한 사랑을 나누고야 흉노로 보냈다.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후 조사에서 화공 모연수가 초상화를 조작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에 격노한 원제는 그를 참형에 처해버린다.

 

왕소군은 호한야선우에게 시집가 흉노의 일축왕이 되는 아들을 낳는다. 당시 50대 후반인 호한야선우는 왕소군과 결혼한 지 만 2년 만에 사망하게 된다. 20대 초반의 왕소군은 흉노의 풍습에 따라 호한야의 다른 부인 사이에 태어난 복주루 선우와 재혼해 딸 둘을 낳는다. 즉 남편의 아들이 그녀의 세 번째 남자가 되는 것이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등의 각종 문학 양식을 통해서 그 형상이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왕소군의 첫 번째 사내는 한(漢)나라 황제인 원제(元帝)고, 두 번째 사내는 흉노족 왕인 호한야선우이며, 셋째 사내는 호한야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한나라 황제가 취하고, 흉노족의 왕과 아들 사이인 부자지간이 취하고, 그 미모 때문에 유명 화공(畵工)인 모연수가 참수를 당하고, 날아가던 기러기까지 낙안(落雁)되었을까?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가 이 사연을 읊어 그 유명한 '춘래불사춘'이란 말을 남겼던 것이다.

 

胡地無花草(호지 무화초)-오랑캐 땅이라 한들 화초마저 없겠느냐?

春來不似春(춘래 불사춘)-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自然衣帶緩(자연 의대완)-옷에 맨 허리끈이 절로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왕소군은 중국 4대 미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나머지 세 사람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녀로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져 오나라의 국정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결국 오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서시, ‘삼국지’에서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미인계에 이용된 초선, 당나라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오빠 양국충과 함께 당나라 국정을 말아먹고 결국 안록산의 난을 초래하는 데 영향을 미친 양귀비이다.

 

이들 네 미인은 각각 별명을 갖고 있었다. 왕소군은 날아가는 기러기가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가 땅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落雁, 기러기도 떨어뜨린다)’이란 별명을 얻었다. 서시는 그녀의 미모를 보면 물속의 물고기조차 넋을 놓고 바닥에 가라앉았다고 해서 ‘침어(沈魚, 물고기도 가라앉힌다)’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초선은 달도 그녀의 미모에 부끄러워 구름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고 해서 ‘폐월(閉月, 달이 숨는다)’이란 별칭으로 불렸다. 양귀비는 그녀가 나타나면 아름다운 꽃들도 그녀의 미모에 부끄러워했다고 해서 ‘수화(羞花, 꽃들을 부끄럽게 만들다)’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인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피곤도 잠시 잊는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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