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로이드 패리 저 | 김미정 역 | 알마 | 560쪽 | 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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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리처드 로이드 패리의 범죄 논픽션 『어둠을 먹는 사람들』. 이 책은 2000년 7월 도쿄에서 발생한 영국 여성 루시 블랙맨 실종 사건을 추적한 르포르타주다. 루시 블랙맨은 실종 이듬해인 2001년 토막 난 사체로 발견됐고 범인은 체포됐다. 그러나 저자는 세간에 알려진 것 이면에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음을 감지하고 10년에 걸쳐 집요하게 사건의 수수께끼를 벗기는 작업에 몰두한다. 사건과 관계된 거의 모든 인물을 만나 장기간 인터뷰를 진행하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일생을 추적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배경까지 파고든다. 이 과정에서 일본 풍속 산업의 기괴한 실태, 일본의 어두운 과거와 이방인들의 분열된 삶, 관료 조직의 무능과 안일함 등 한 여성의 비극을 넘어서는 거대한 배경이 서서히 드러난다.
2000년 7월1일, 21세기 첫 번째 해의 한복판에서 기이한 실종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 발생지는 도쿄, 실종자는 21세의 영국인 여성 루시 블랙맨. 롯폰기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던 루시는 손님의 전화를 받고 숙소를 나간 뒤 모습을 감춘다. 루시가 사라진 다음 날 루시의 친구 루이스에게 낯선 남자의 전화가 걸려 온다. “저는 다카기 아키라라고 합니다…. 루시는 제 스승님을 따라 종교 단체에 들어갔으며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2000년은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에 사린가스를 살포한 지 5년째 되는 해였다. 소식을 접한 가족들이 도쿄로 날아와 경찰을 찾아가지만 싸늘한 무관심만 돌아올 뿐이다. 블랙맨 가족은 사건을 공론화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과 영국의 대중, 정치인, 그리고 납치범 혹은 ‘종교 단체’를 향해 도움을 호소한다. 때마침 오키나와에서 G8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토니 블레어 총리에게 가족의 호소가 닿으면서 사건은 국제적인 이슈가 된다. ‘물장사’ 업종의 종사자가 종적을 감춘 그저 그런 일이 될 뻔한 사건이 일본 정부의 자존심이 걸린 과제로 격상한 것이다.
‘더타임스’ 도쿄 주재 아시아 특파원인 저자 리처드 로이드 패리는 처음에는 자국민 실종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이 사건에 접근한다. 그러나 취재를 거듭할수록 의문이 깊어가고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잇달아 포착되자 본격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조명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취재가 진행되던 2001년 2월에 루시의 행방이 밝혀진다. 루시는 실종 직후 살해되어 해안 동굴에 토막 난 채로 암매장됐다. 일본 경찰은 부동산업자인 48세 남성 오바라 조지를 체포한다. 이제 패리의 관심은 용의자 오바라와 그의 배경으로 향한다. 오바라 조지의 한국 이름은 김성종, 부산 출신 부모에게서 태어난 재일 조선인 2세다. 패리는 김 씨 부부가 부산을 떠나 오사카에 정착한 뒤 부를 축적한 과정, 부부 슬하 네 형제의 인생 궤적, 전도유망했던 김성종-오바라의 유년기, 수수께끼 같은 오바라 부친의 죽음, 오바라가 성과 이름을 갈아 치우며 정체성을 바꾼 방식 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경찰 조사를 통해 오바라가 수많은 여성들을 강간했으며 그중 일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대중은 범인인 오바라뿐 아니라 피해 여성들에게도 비난을 던진다. 낯선 남자의 아파트까지 따라 들어간 것은 성관계에 동의했다는 표시가 아닌가? 어쨌거나 그들이 택한 호스티스라는 직업이 떳떳하지 못한 것은 사실 아닌가? 비난의 화살은 피해자의 가족에게까지 향한다. 사람들은 루시의 아버지와 여동생이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적극적으로 미디어를 이용하고 이미지를 연출해 관심을 끌려고 하는 것에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들은 루시 부모의 이혼 경위를 까발리고, 루시의 가족이 자원봉사자들의 선의를 악용했다고 매도하는 한편 오바라가 제시한 거액의 배상금을 받아들였다고 저주한다.
저자 리처드 로이드 패리는 이와 같은 대중의 반응이 도덕적 우월감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사건 외부에 있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당사자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음을 강조하며 루시의 생애를 하나하나 복원한다. 그리고 각자의 삶을 통해 루시를 추모하고자 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목소리를 모음으로써 하나의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애도하고 기억하는 것뿐임을 알린다.
한편으로 저자는 일본 경찰이 오바라에게 피해를 입은 호스티스들의 고발에 진작 귀를 기울였더라면 루시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지적한다. 루시가 살해되기 몇 년 전 호주 여성 카리타 리지웨이가 오바라에 의해 죽음을 맞았고 오바라에게 강간당한 여성들 중 일부가 경찰을 찾아 피해 사실을 고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그들이 외국인이거나 혹은 ‘불건전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로 관심을 갖지 않았고 결국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저자 리처드 로이드 패리는 간토대지진 직후의 조선인 대학살에서부터 2000년의 영국인 여성 실종, 용의자 검거 후 재판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전모를 아우르며 사회의 음지에 돋아난 ‘뒤틀린 검은 나무’를 그리고자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과업이었으나 이렇게 탄생한 『어둠을 먹는 사람들』로 저자는 죽음 이후에도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루시 블랙맨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다.
작가 리처드 로이드 패리 소개
영국의 기자이자 작가. ‘더타임스’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오랫동안 도쿄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했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의 종식을 둘러싸고 벌어진 폭력의 양상을 취재한 『광기의 시간』으로 돌먼 여행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10년에 걸쳐 루시 블랙맨 사건을 취재하여 집필한 『어둠을 먹는 사람들』은 2011년 사무엘 존슨상 후보, 2012년 오웰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17년 『쓰나미의 영령들』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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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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