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463)] 느리게 배우는 사람
토머스 핀천 저 | 박인찬 역 | 창비 | 288쪽 | 12,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필립 로스,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네명의 소설가로 꼽히는 핀천은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통찰하는 특유의 상상력과 과학소설에 끼친 영향으로 싸이버펑크 SF문학의 선조로 인정받는 소설가다. 『느리게 배우는 사람』은 초기에 쓴 다섯편의 단편을 모아 작품을 쓴 때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84년에 출간한 것이다. 데뷔 장편이 나온 이듬해에 발표된 「은밀한 통합」(1964)을 제외한 나머지 단편들은 모두 핀천이 대학생 시절에 쓴 작품들이며 소설집에 실린 초기 다섯편의 작품을 보면 핀천이 이후에 발전시킬 주제와 스타일, 취향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집에 담긴 다섯편의 이야기는 소재나 배경 등이 각기 다르지만 죽음, 무기력, 권태, 획일화, 무질서, 파국, 단절감을 공통적으로 그리고 있다.
핀천의 첫 단편 「이슬비」는 군대라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죽음과 다를 바 없는 무기력한 삶을 반복하는 청춘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러바인은 도망치듯 군대에 들어온 인물인데, 그는 군대를 떠나려 하기보다 반복적이고 정체되어 있는 그곳에 안주하려 한다. 주인공은 허리케인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인근 뉴올리언스에 파견되어 시신 인양작업을 하면서 죽음의 문제와 맞닥뜨리고 우연히 만난 여자와 의미없는 섹스를 한다. 그런 뒤 그는 휴가를 가는 대신 군대생활로 되돌아간다. 작가는 주인공의 삶을 폐쇄회로와 같은 고립적이면서 단절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로우랜드」는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책임있는 성인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거기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롭고 활기찬 삶을 꿈꾸는 남성의 이야기이다. 결혼하여 도시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주인공 데니스 플랜지는 젊은 시절 바다에서 해군 장교로 지낸 기억을 되살리며 집에 찾아온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하나 아내에 의해 쫓겨나 쓰레기 폐기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쓰레기 폐기장에는 1930년대 테러리스트들이 파놓은 은신처가 있고 현재는 집시들이 그것을 사용하고 있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집시 소녀를 만나 새로운 삶을 계획하나 작가는 이 장면을 환상처럼 묘사함으로써 그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일지, 아니면 또다른 굴레일지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다.
「엔트로피」는 핀천 문학의 브랜드처럼 여겨지는 엔트로피 개념을 문학적으로 처음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후 핀천 소설의 원형이 되는 작품이다. 아파트 삼층에 사는 멀리건은 재즈 사중주단 친구들과 함께 사흘째 광란의 파티를 벌이고 있다. 또 바로 위의 사층에서 학자로 보이는 칼리스토는 방을 온실처럼 만들어놓고 죽어가는 새를 살리려 하고 있다. 작가는 삼층과 사층을 번갈아가며 묘사하는데 삼층의 파티가 상징하는 무질서·소음·혼란·고갈과 사층의 온실이 상징하는 질서·규칙·통제·보존 간의 갈등이 소설의 핵심구조를 이룬다.
「언더 더 로즈」는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의 패권을 놓고 각축을 벌일 무렵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독일의 스파이 몰드웝과 그것을 저지하려고 애쓰는 영국의 스파이 포펜타인이 이집트에서 쫓고 쫓기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소설은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역사가 움직이게 되며 역사가 결국 파국에 이르고 만다는 묵시록적 비전을 담고 있다.
「은밀한 통합」은 기존의 관습과 규범을 따를 것을 강조하는 어른들과 그것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십대들이 등장한다. 어른들과 아이들의 대립구도는 신흥 주택가에 흑인 가족이 이사 오면서 더욱 분명해진다. 알코올중독자인 흑인 음악가 칼 매카피를 만난 직후 소년들은 칼 배링턴이라는 흑인 소년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 어른들과는 달리 그 흑인 소년과 같이 어울리며 인간적으로 통합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종문제를 배후에 깔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흑인을 대하는 백인 어른들의 시각이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의 시각에서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핀천이 작품 속에 끌어들인 지식의 범위가 방대하고 미국 대중문화가 빈번히 소설 속에 등장하지만 이번 번역본에서는 충실한 옮긴이 주를 통해 이 문제를 대부분 해결하고 있다. 또 말장난 같은 동음이의어나 처음 보는 약어, 20행이 넘는 아주 길고 복잡한 문장들이 독해를 어렵게 만들지만 핀천의 문체를 살리면서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충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을 꾀했다.
작가 토머스 핀천 소개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언급될 뿐만 아니라 영어로 글을 쓰는 현존 작가들 가운데 최고의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1937년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1953년 고등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하고 장학생으로 코넬 대학 공학물리학과에 입학하였다. 2학년 때 문리학부로 전과해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1959년 전과목 최우수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다.
1960년에 보잉사에 취직하나 1962년에 그만두고 이후 일정한 거처 없이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등지에서 살았다. 1963년 첫 장편 『브이』를 발표하여 문단의 극찬을 받았고 그해 출간된 최우수 데뷔소설에 주는 윌리엄 포크너 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두번째 장편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발표하여 리처드 앤드 힐다 로젠탈 상을 수상하였으며 1973년 세번째 장편『중력의 무지개』를 발표하여 전미도서상을 수상하였다.
그밖의 장편으로 『바인랜드』 『메이슨과 딕슨』 『그날에 대비하여』 『고유의 결함』 『블리딩 에지』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는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종합지 -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을 읽읍시다 (465)] 물과 땅이 만나는 곳, 습지 (0) | 2014.04.15 |
---|---|
[책을 읽읍시다 (464)] 헤밍웨이 단편선 1 (0) | 2014.04.14 |
[책을 읽읍시다 (462)]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0) | 2014.04.10 |
[ 전문가 칼럼 ] 벚꽃놀이 가기 전 내 피부부터 체크하세요 (2) (0) | 2014.04.09 |
[책을 읽읍시다 (461)] 역린 1: 교룡(蛟龍)으로 지다 (0) | 2014.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