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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977)] 앙팡 떼리블

[책을 읽읍시다 (977)] 앙팡 떼리블
 
장 꼭또 저 | 심재중 역 | 창비 | 180쪽 | 10,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소설 『앙팡 떼리블』은 상식적인 도덕관념과 기성세대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며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10대의 두 남매를 둘러싼 짧고 강렬한 이야기이자 소설로 쓴 시이며, 장 꼭또의 예술관을 집약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동성애, 근친상간, 마약, 권총자살 등 사회적 규범에 반하는 내용을 담으면서도 그것에 몰입하는 아이들의 관점을 미학화하며 절대적 순수의 세계를 구현했다고 평가받는다.

 

『앙팡 떼리블』은 고립된 10대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기성세대의 사회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소설은 열다섯살 뽈이 자신이 좋아하는 동성의 학급 친구 다르즐로가 던진 눈덩이에 맞아 다친 채 친구 제라르의 보위를 받으며 집에 실려 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빠리의 몽마르트르 가에 있는 집에서 뽈이 두살 터울 누나와 병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은 예사롭지 않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엘리자베뜨와 당분간 학교를 쉬어야 하는 뽈은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는 뽈의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남매는 서로 욕설과 독설을 퍼붓다가도 함께 목욕을 하는가 하면, 매일 밤 연극을 고안해내고 시를 읊다가도 위험한 놀이와 끔찍한 술책을 펴기도 한다. 거기에 뽈을 남몰래 좋아하는 제라르, 그리고 엘리자베뜨가 잠시 의상실에서 일하다가 알게 된 친구 아가뜨가 동참하며 그 방의 캐스팅은 완성된다.

 

네 아이는 모두 부모를 잃은 고아다. 두 남매가 일상적으로 싸움하며 노는 사이 어머니가 그들 곁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제라르는 부모 없이 삼촌 집에서 더부살이하고 있고, 아가뜨 역시 부모가 자살한 내력이 있다. 어머니가 죽은 후로 뽈의 방에서는 그들 남매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모여 또 하나의 가족을 이룬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가족의 자리를 채워주며 깊은 애정과 증오를 거리낌 없이 표출한다. 뽈에게 집착하는 엘리자베뜨의 감정과 뽈을 향한 제라르의 은밀한 감정은 보통 사람의 눈에 근친상간과 동성애로 보일 법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 세계에서는 관계의 윤리가 재편되므로, 그런 감정과 애착 관계는 그들에게 자연스럽다.

 

이 고아 아이들에게도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은 있다. 제라르에게 마음씨 좋은 삼촌이 양육자 역할을 해주고 있었던 것처럼, 어머니를 진료하던 의사가 남매의 집에 가정부를 고용해주고 약간의 생활비를 대준다. 뽈과 엘리자베뜨 남매가 방 안에 구축해놓은 세계는 유별난 것이어서 보통의 어른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마리에뜨라는 가정부 한명만이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어른이었다. 제라르와 아가뜨 역시 완전히 그들의 세계에 합일되는 것은 아니었다.

 

장 꼭또는 형식을 불문하고 자신이 창작하는 모든 작품은 ‘시’라고 천명한 바 있다. 이때 ‘시’는 특정 형식에 국한해 합의된 운문 장르를 뜻하는 보편적 용어가 아니며, ‘영감’을 받아 내면을 스펙터클하게 표출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시는 포이에시스를 본질로 삼는 너른 의미의, 혹은 진정한 의미의 ‘예술’에 가깝다. 예술가의 작품이라면 형식에 무관하게 ‘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앙팡 떼리블』은 ‘시인’으로서 장 꼭또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대표작 중 하나다. 소설로 쓴 시인 이 작품에서 장 꼭또 자신과 화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가 『빠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창작자의 작업은 자서전”이라고 말했듯, 『앙팡 떼리블』 역시 작가 자신의 예술관을 가득 담은 시적 소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앙팡 떼리블』이 보여주는 아이들의 세계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조차 현실의 논리에서 벗어나 ‘상상계의 높은 하늘’로 올라가는 세계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방은 ‘영원한 유년’이라는 주제가 상연되는 무대이고, 아이들은 그 무대의 배우들이다. 기성세대의 질서를 거슬러 세상 모든 것에 신화적 후광을 두르는 능력을 가진 아이들은 그 무대에서 ‘예술품’ ‘걸작’으로 다시 태어난다. 『앙팡 떼리블』은 소설 속의 시적 세계를 가장 탁월하게 구현하며, ‘시’를 평생의 지향점으로 삼았던 20세기의 문제적 예술가 장 꼭또의 문학적 성취를 한눈에 보여준다.

 

 

작가 장콕또 소개

 

바그너식의 종합적인 예술가의 비전은 아니지만 만능 예술가로서 그 누구에 비해 손색이 없는 장 콕토는 프랑스 문화의 중심적인 인물이다. 친구 피카소의 기법을 도입해 입체감이 넘치도록 이미지를 구성한 시를 쓴 시인이었고, 아방가르드 연극인이었으며, 자신의 시집에 직접 삽화를 그린 화가였다. 뿐만 아니라 조각가이기도 하며 소설가, 영화감독, 문학비평가, 배우 등 그를 쫓는 직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것도 빠진다면 장 콕토에 대한 정당한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1889년 7월5일 파리 근교의 메종 라피트에서 출생한 그는 『알라딘의 램프』라는 첫 시집을 발표함으로써 화려한 인생을 시작한다. 한때는 6인조 그룹이라는 음악인 그룹을 조직하기도 하였고, 소설가로서도 명성을 날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열심이었던 것은 전위 연극이었다. 초기 전위 연극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1925년 희곡 『오르페『를 시작으로 1930년대에는 영화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현재 남아 있는 공식적인 첫 작품인 『시인의 피』(1930)를 시작으로 그는 사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영화적 공간을 창출한다. 혹자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단순하게 축약하기도 한다. “그의 영화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시와 소설적인 전통이 어떻게 영화로 옮겨질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정당하다. 시와 소설에서 출발한 만큼 문학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영역도 많다. 특히 시적인 대사와 음악 사용은 이러한 지적에 공감하도록 한다. 하지만 영화 매체에 대한 그의 성찰은 남다른 것이 많다.

 

『시인의 피』 『오르페』(1950) 『오르페의 유언』(1960)으로 이어지는, 3부작에서 전개되는 영화적 공간은 멜리에스 이후 콕토를 영화적 공간의 실험에 관한 최고의 권위자로 내세운다. 물론 시인의 삶과 죽음이라는 세계는 다소 신비롭기는 하지만 그가 노래한 오르페우스야말로 음악의 신이자 지옥의 문을 넘나든 신화적 인간이 아니었던가. 시인의 비전은 콕토의 영화 속에서 예술가의 초상으로 환원되고, 우리는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다시 삶과 예술이라는 낡은 주제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

 

한편으로 『시인의 피』를 만든 이후 첫 장편인, 그리고 낭만적이면서도 콕토다운 미녀와 야수』(1946)를 16년 만에 발표한 것은 비록 영화가 그의 비전은 아니지만 시와 다른 형태의 실험의 장이었음을 설명해준다. 그는 『미녀와 야수』로 대중적인 감독이 되기도 하였지만 영화에 인생을 걸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영화적 본질은 역시 영화를 통해 ‘개인적인 비전’을 선보이는 것이다. 3부작에서 보여지는 이중의 세계는 우리를 신화적 공간으로 유혹한다. “드러나지 않는 현실의 다큐멘터리”라고 일컬어진 『시인의 피』는 유언하듯 초현실적인 삶의 유혹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그에 대한 비난을 뒤로 하고, 트뤼포가 질의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상관없었던 콕토의 영화들을 떠올려 본다. 영화평론가인 로이 암스는 『오르페의 유언』이야말로 프랑수아 트뤼포가 나중에 받아들였던 『아메리카의 밤』의 세계와 유사한 것이 아니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어쩌면 영감과 사색으로 가득 찬 콕토의 비전이야말로 60년대에 프랑스영화가 새로워지는데 밑천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온당한 적자는 80년대 들어와서야 레오스 카락스라는 감독을 통해 완전하게 재현되었지만 이미 우리는 그의 다방면에 걸친 유산을 물려받은 지 오래다. 장 콕토는 1963년 10월11일 밀리 라 포레에서 사망하였다. 신화적이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죽음이었다. / 영화감독사전,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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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