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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칼럼] 인간론적 세계관: 유물론과 관념론의 지양으로

[칼럼] 인간론적 세계관: 유물론과 관념론의 지양으로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Ⅰ. 공부방법

맑스주의를 비판만 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알아야 될 문제를 똑똑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먼저 유물론과 관념론에 관한 문제를 소개해보도록 하자.

아울러 이해를 위해 이를 듣기만 할 것이 아니라 토론을 하여야 한다. 토론을 하지 않고는 절대로 이해가 안 된다. 자연과학은 어디까지 알고 모르는 것이 명백한데, 철학은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잘 모른다. 토론을 통해서 자기의 잘못된 생각이 깨닫게 된다. 그래서 토론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주제라도 정신문제 등은 계속 물어야 한다. 그리하여 발전수준이 대단히 높아진다. 하나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체 하는 것이 야단이다. 사심없이 공부를 해야 한다.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아는 체 하면 철학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으로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유물론과 관념론은 사실은 유물론과 유심론에서 출발하였다. 유심론은 또는 유신론(唯神論)이라 해도 된다.

사람이 자기 이외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벌써 큰 진보이다. 농촌에서 아이들이 우리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그저 먹고 뛰놀고 인간 밖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를 생각한다는 것은 큰 발전이다.

 

Ⅱ. 관념론(유심론)과 유물론

동양에는 중국인들이 이런 데는 대단히 발전했다. 2500년 전에 음양오행설을 생각한 것은 대단한 발전이다. 희랍에서 BC600년 전에 탈레스가 시작한 것이 세계의 물질이 무엇인가를 두고 물(水)이라고 하였다. 아마 물이란 것이 바다에 나가보면 무진장하게 있고, 파도가 치고 구름이 되어 비로 떨어지고 변화무쌍하다. 물이 수증기도 되고 비도 되고 또 얼음이 되고 그리하여 제일 많은 변화무쌍한 것을 두고 그리하여 물질의 기본으로 본 것 같다. 다음에는 불(火)이라고 했다. 인간생활에서 제일 귀중한 것이 불이다. 태양의 열이 없이는 살 수 없다. 불을 자체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인간발전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맹수와 싸우는 데서나, 자기의 체온을 유지하는 데서나 불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큰 진보이다.

물과 불은 상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서를 막론하고 물과 불이 기본이라고 하는 것은 의견이 같다. 땅(土)도 같고, 그런데 동양에서는 나무(木)와 쇠(金)를 넣었다. 서양인들은 공기(氣)를 넣었다. 공기를 무진장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이렇게 처음에 인간 외에 무엇인가를 생각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철학의 출발점이다. 그리하여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의 생활, 인간의 운명이 세계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즉 생과 사, 삶과 발전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내 운명을 지배하는 외부의 신비로운 존재가 있는가 없는가? 처음에는 이렇게 자신의 운명과 관련하여 생각했다. 절대적 존재의 유무를 두고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에 가서는 유신론자가 된다. 그런 것이 없다며 단지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 외는 없다고 하는 사람은 유물론을 지지한다.

다시 말하면 유물론이고 유신론이고 이것이 다 자기의 운명과 관련이 돼서, 즉 생과 사, 발전과 관련되어 갈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이론적으로 물질이 있는가 없는가 하기 전에 신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문제가 먼저 제기되었다. 신비로운 신이 있어서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는가, 그런 것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문제로 되었다.

 

그래서 신이 있다면 신비로운 존재로 신이라고 해도 좋고, 부처님이건 신비로운 존재가 있다고 증명하는 사람이 주로 유신론에 의지해서 관념론적으로 증명한다고 했다.

제일 우리에게 신비로운 것이 사람이 육체가 있는데 정신이 있는 것이다. 정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금방 살아서 말도 하던 사람이 죽게 되면 육체는 그냥 있는데 정신은 어디 갔는지 알 재간이 없다. 정신은 어디 갔는가? 생각하다 못해 하늘로 갔다, 정신세계로 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해서 육체와 정신을 갈라놓으면서 하나는 관념론으로 되고, 하나는 유물론으로 되었다.

자기의 운명과 관련이 되어서 문제로 된다. 뱀에 물려 사람이 죽었다. 그 놈이 비상한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그래서 처음에는 물신숭배를 하게 되어 산에 가면 산신령이 있고 바다에는 용왕이 있고 자꾸 이런 식으로 생각해왔다.

 

그런데 사람의 생활이 발전하면서 그런 것 같지 않으니 나중에는 한울님만 믿으면 다른 것은 믿지 않고 무시해도 되니 이스라엘의 일신교가 제일 먼저 발전한 것이다. 그런 데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상이 제일 먼저 발달했다. 그만큼 사람이 자유가 있게 되었다. 한울님 다음에는 인간이다. 한울님만 섬기면 다른 일은 해도 괜찮다며 이만큼 사람의 활동의 자유가 불어났다.

 

. 형이상학과 변증법: 운명(신비로운 존재)과 관련하여

그 다음에 사람의 운명과 관련해서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내 팔자를 내가 타고 나는가? 아니면 내 마음대로 고칠 수 있는가? 사람의 팔자를 고치고 변개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숙명적으로 타고난 것인가? 숙명론으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변화하는 방향에서 세계도 자신의 운명도 변화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형이상적인 사고방식 변증법적인 사고방식과 갈라지게 된다. 이것은 다 자기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

다시 한 번 얘기해서 우리의 운명과 관련해서 우리 운명을 외부에서 지배하는 신비로운 존재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유신론과 유물론이 갈라지게 되고, 우리의 운명을 고칠 수 있는가 없는가 이와 관련해서 형이상학 변증법이 갈라지게 된다.

 

이는 철학적인 용어를 쓰게 되면 존재와 운동에 관한 문제이다. 신비로운 존재가 있는가 없는가? 운동이란 변화를 의미하는데 운동의 본질이 무엇인가? 변화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것이 형이상학과 변증법의 차이이다. 형이상학은 전체적으로 볼 때는 우주를 당시에는 몰랐지만 세계는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부분적인 변화는 있지만 세계전체가 변화하는 것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한번은 사람으로 태어났다, 다음에는 짐승으로 태어나고 인과응보로 바뀐다고 사고했다. 변화는 있지만 결국에는 바뀌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주역은 바뀐다는 말이다. 변화가 어떻게 되는가를 푼 것이다. 고조선의 홍역과 주나라의 역경이다. 역이 바뀐다는 뜻이다.

세계는 존재한다는 것이 있고, 세계는 운동한다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존재하는 데서 인간을 두고 말할 때 인간 이외에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신비로운 존재가 있는가 없는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인간을 운명을 고칠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과 관련해서 운동에서 변화발전을 인정하는가 안 하는가의 문제가 나온다. 운동은 곧 변화이다. 운동하는 것만큼 변화된다,

 

그러면 발전은 무엇인가? 발전은 그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 그 전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힘이 있는 존재로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물의 상태가 정지 상태, 변화 상태, 발전 상태의 3가지로 나누어진다.

우리의 운명과 관련해서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좋은 방향에서 운명이 개척될 때 이것이 발전이다. 건강하던 사람이 앓을 수 있다. 이것이 변화이다. 앓았는데 고치니까 더 건강해졌다. 이것이 발전이다. 왜 그럴 수 있게 되는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어떻게 돼서 발전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가 나올 때, 형이상학과 변증법에서 하나는 조금 단순히 변화를 인정하고 하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는 데서 차이가 있다. 변증법은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변화도 하고 변화를 거쳐서 더 좋은 방향에서 변화된다. 이 때 발전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타고난 운명, 몸도 집안도 사회도 처음에는 타고 나지만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이 죽을 때까지 팔자를 타고 난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타고 나지만 노력하면서 변화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노력에 의해서 자기가 타고난 것보다 훨씬 더 큰존재로서 변화될 수 있다. 이것이 발전이다.

그러나 여기서 제일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 결국 정신인가 물질인가 하는 것이다. 정신이 물질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물질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정신이 거기에 따라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의 반영이다, 두뇌의 반영이다, 그림자다, 이렇게 보았다. 관념론자들은 정신이 따로 있다. 정신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몸에 와서 머무를 때는 몸을 지배하게 되고 몸과 떨어져서 딴 정신세계에 가 있다고 하면 이것은 유심론이고 관념론이 된다.

이 육체가 있고 물질이 있는 것은 형식이고 정신을 본질로 보는 것이 관념론이고 유심론이다. 이와는 반대로 정신이란 물질의 하나의 성질 또는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며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물질이 기본이고,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 정신이다 이렇게 보면 유물론이다.

이렇게 유물론인가 관념론인가 계속 싸워왔다. 여러 가지 형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신이 본질이고 물질이 발현형태인가, 아니면 물질이 기본이고 거기서 정신이 발현되는가의 차이이다.

 

Ⅳ. 인간중심철학: 발전의 변증법으로 생명과 정신을 밝히고

이를 둘 다 일면적이라고 주장한 것이 인간중심 정치철학이다. 모든 존재라는 물질(사물)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 점에서는 유물론이다. 유물론이 옳다. 그러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이 있고,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이것을 부인하면 미친 사람이 아니겠는가? 인간에게서 생명과 정신을 떼놓으면 인간이 되겠는가?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가? 정신, 생명 이것은 존재하는 물질의 성질이다. 생명은 벌써 성질이다. 정신도 역시 성질이다. 이는 무슨 성질인가? 이것을 지금까지 해명을 하지 못했다. 무슨 성질이 자꾸 발전해서 생명이 되고 정신이 되었는지를 모른다. 이를 인간중심철학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인정하던 안하던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인간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자연은 존재했다. 인간의 정신이 나오기 전에도 물질은 존재했다.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던 것이 다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생명을 다 가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돼서 생명이 나오게 되고 정신이 나오게 되었는가? 이것을 지구가 발생한 데서부터 쭉 진화발전해온 과정들을 분석해서 내온 결과이다. 그 동안 그 결과를 정신과 생명과 결부시키지를 못했다.

이를 여기서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에게는 의심할 수 없이 생명이 있고 정신이 있으므로, 짐승은 생명은 있지만 정신이 똑똑하지 않다. 식물은 생명은 있지만 정신은 없다. 더 낮은 단계의 무생명 물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운동한다는 것만 공통성이 있다.

 

그러면 운동은 왜 일어나는가? 이것은 처음에 철학자들이 물질세계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높이 들어간 것이다. 왜 운동이 일어나는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운동하지 않는 것이 없지 않는가?

맑스주의자들은 여기서 운동의 원인은 묻지 말라고 하였다. 운동은 물질의 존재하는 형식이다. 왜 운동하는가를 묻는 것은 왜 존재하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운동의 원인에 대해서 자연과학자들도 하나도 얘기한 것이 없다.

뉴턴한테 자꾸 물어보니까 "나는 가설을 세우는데 반대해요"라고 했다. 뉴턴역학의 기본원리는

① 관성의 법칙: 모든 존재는 지금 있게 되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운동하게 되면 운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

② 가속도의 법칙: 물질에다 충격을 주게 되면 속도가 높아진다. 중력이라는 것이 가속도이다.

③ 작용과 반작용이 같다.

이 3가지 원리가 뉴턴 역학이다.

운동의 원리를 물었을 때 모른다고 했다. 움직인다는 것은 가속도의 법칙에서 충격을 줘야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가속도인데 누가 충격을 주었는가? 충격을 주어서 계속하여 운동이 일어날 때 최초에 충격을 준 것은 누구인가? 아마 그것을 가지고 한울님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모르겠는데 최초에 가서 충격을 준 것이 그것이 한울님이겠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아예 운동의 원인에 대해 묻지도 않았다. 자연과학자들은 운동의 원인을 해명하지 못했다.

기독교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생기고, 바다가 있으라 하니 바다가 생기고, 그렇게 해놓고 보니 그것이 재미있다, 흥이 있다 보니까 신이 다 만들어 놓은 것으로 되었다.

 헤겔의 경우는 자연도, 인간도 없는 데서 절대정신이 있어서 그것이 자꾸 발전되어 나가면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서 창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정·반·합(正·反·合)에서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힘든 논리로 들어가 보자. 세상만물에서 칸트는 4가지를 알 수 없다고 했다. 이율배반(antinomy)이다.

하나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세계가 무한한가 유한한가? 이것은 알 수가 없다. 무한하다고 말할 수 있고 또 유한하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는 존재하는 것이 단순한가 아니면 결합되어 복잡한가? 이것도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세 번째는 모든 것이 필연의 법칙에 따라서 운동하는가 아니면 자유가 있는가? 모든 것은 일정한 원인이 있게 되면 결과가 있게 되어 인과율에 따라 변화되는가? 즉 필연적으로 변화되는가? 아니면 자유가 있는가? 이것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모든 원인에서 인과도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있는가 없는가, 즉 신이 있는가 없는가? 이것도 알 수가 없다 하였다.

네가지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선 우주가 무한한가 유한한가는 지금 당장은 필요없고, 또 우연인가 자유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도 좀 있다가 말하고, 무엇부터 해결해야 되겠는가? 존재하는 것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단순하게 되어 있는가, 아니면 결합되어 복잡하게 되어 있는가 하는 이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이다.

 

Ⅴ. 동일성(공통성)과 차이성(독자성과 차별성): 연속성과 불연속성

지금까지 보면 모든 사물은 분열되어 존재할 수도 있고, 결합되어서 복잡하게 존재할 수도 있다. 이것은 불연속적으로도 존재할 수 있고 연속적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곳에 가장 근본적인 형태가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다.

그것이 무엇으로 표현되는가? 동일성과 차이성으로 표현된다. 분열되면 분열될수록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분열된 것만큼 차이성이 나온다. 분열되어 따로따로 있는 것만큼 차이성이 나온다. 또 결합되면 결합될수록 공통성, 동일성에 의해 결합되어 나간다.

동일성과 차이성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특징이다. 세상에 차이성만 있고 공통성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공통성만 있고 차이성이 없는 것도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꼭 같은 것도 있을 수 없는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것도 있을 수 없다. 여기까지 사고를 하면 깊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하고 소립자하고 존재한다고 하는 데서는 공통적이다. 운동한다고 하는 데서 공통성이 있다. 인간에게서 운동의 원인이 있으니까 공통성이 있지 않을 수 없다. 연속성의 견지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인간에게서 운동의 원인이 있다고 하는 것은 명백하다.

내가 여기 왜 나와 있는가? 강의를 하기 위해서. 내가 왜 먹는가? 몸을 보전하기 위해서. 운동이 다 원인이 있고 목적이 있다. 다 원인이 있다. 생명체에 대해서는 다 운동의 원인이 있다. 이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그 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너무 미미하여 운동의 원인이 똑똑하지 않다. 그러나 운동하는 것은 같다. 연속성의 견지에서 보면 역시 거기에도 공통성이 있으므로 ①존재하는 것 하고, ②운동하는 것 하고, ③운동의 원인하고 이 3가지는 다 공통성이 있다. 이렇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할 때 인간이 운동하는 것은 왜 운동하는가? 자기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먹지 않으면 죽으니까.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운동하는 것을 보면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무생명(물질)도 마찬가지다. 왜 운동하는가? 자기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다.

 

불연속적 존재, 즉 단순한 존재는 단순한 존재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운동을 한다. 연속적인 존재는 연속적인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운동한다. 연속적인 존재는 자신을 결합하여 같은 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끌어당기는 인력(引力)작용을 한다. 자기의 독자성, 차별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배척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단순한 존재도 인력작용과 척력(斥力)작용을 한다.

우리의 인식능력으로는 그것을 구분할 수가 없다. 아직도 부족하다. 태양내부에서 원자핵들이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km인데 비해서 초속 300km로 뛴다. 그런데도 충돌이 안 된다. 배척하기 때문이다. 초속 300km란 대단한 에너지를 가지고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지는데도 배척하는 힘은 1000배다. 그러므로 충돌이 안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단순한 존재도 다 운동을 하는데 그 원인은 자기자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한다. 단순한 물질도, 인간도 너무 가까이 가게 되면 싫어한다. 어떤 물질이든지 너무 가까이 가게 되면 배척한다. 일정한 한계 이상으로 접근 못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너무 떨어져 있어도 견디지 못한다.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유인력과 만유척력이 작용한다고 하는 것은 모든 물질이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보존하기 위한 운동이 어떻게 되어서 발전하는가? 결합되어 협력함으로써 발전하게 된다. 차이있는 물질이 결합되면 결합될수록 운동에서 자기를 보존하려는 주동성과 다른 물질과의 능동성이 자꾸 발전한다.

어느 정도 발전하게 되면 생명물질이 나오게 되는가? 능동성과 주동성이 발전하게 되면 생명현상이 나타나게 되는가? 다른 물질과 상호작용해서 끌어당겨서 그것으로서 자기 조직을 만들게 되는 동화작용의 경우에 일어난다.

누에가 뽕잎을 먹고서 자기를 키워나간다. 이것이 동화작용이다. 자기 후대를 만들어 유전할 때 즉, 자기 복제능력을 가지게 될 때, 이것을 유전작용이라고 하는데, 이런 정도로 능동성과 주동성이 강화되게 되면 생명물질이 나온다.

어느 정도로 결합되어야 그렇게 되는가? 물은 수소와 산소가 결합되는데 결합의 양은 g으로 잴 수가 없기 때문에 비교숫자로 재는데 물의 분자량을 18이라고 한다. 단백질은 1만 내지 10만이다. 그런데 생명을 가지기 위해서는 단백질과 핵산, 효소 등이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인데, 단백질도 1만~10만까지다. 그만큼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무생명 물질인 물의 분자량이 18인데 비해서 생명물질의 가장 기초적인 핵산(DNA:생명의 기초)은 800억이다.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이 결합되어 주동성과 능동성이 강화되었는가? 그런데 우리 단순한 생명체 가운데서 박테리아(virus)에서 제일 실험을 많이 하는 것이 대장균인데 이의 생세포가 단백질이 3,000종, 핵산이 1,000종, 다른 물질이 1,000종 해서 5,000종이 결합되어 있다. 단세포이다. 단세포균들이다. 인간의 세포는 60조~100조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될 때는 다음의 것들이 인간존재의 구성부분으로 된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손이 아니라 기계가 만든다. 이것은 다 인간을 대신한 것이고 인간이 만든 창조력의 결과이다.

 

Ⅵ. 사회적 관계는 협력관계로: 레이저 광선, 압축공기와 같이

사회적 관계에서 협력관계가 동물처럼 타고난 것이 아니라 목적의식적으로 협력을 해서 협력관계가 자꾸 발전을 하게 되면, 법률, 정치, 경제, 문화관계들이 이런 것이 제도화되고 객관화되어 계속 대를 이어가면 발전이 계속된다.

결합되어 협력하는 데서 새로운 힘이 나온다. 이것이 발전의 동력이다. 주동성과 능동성이 강화된다. 빛은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지만 일정한 정도로 결합시켜서 협동하게 되면 레이저 광선이 된다. 레이저 광선은 쇠를 찌르고 들어간다. 공기도 압축공기가 되면 막 뚫고 나간다. 물도 압축하게 되면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산도 뚫을 수 있다. 이렇게 긴밀하게 되어 협동하게 되면 그런 힘이 나온다. 처음 지구가 생겨날 당시에는 이런 유기물질이 없었다. 이런 힘이 자꾸 병합되고 결합하는 데서 10억년이 걸렸다. 10억년 동안 단순한 물질이 결합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단백질도 나오게 되고, 핵산, 효소가 나오게 되었다. 효소가 중요하다. 효소는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그러나 자체 분열하기도 한다. 생물학 전문가들은 생명물질의 한계를 구분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동화작용과 유전작용을 할 때부터 생명이 있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이 생명체가 결합되어 생명협동이 발전하게 되면 생명활동을 지휘하는 기능이 발전하게 된다. 생명체란 살려는 욕망이 있고, 이를 욕망에 맞게 운동하는 운동능력이 있다. 그 운동능력과 찾자는 목적을 결합시켜야 한다. 복잡한 것을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를 지휘하여야 한다.

처음에는 세포핵이 세포활동의 운동을 지휘했다. 그러다가 자꾸 발전하면서 지휘만을 하는 세포가 나오게 되었다. 그것이 신경세포이다. 더 발전하여 신경절이 나오게 되고, 더 발전하여 중추신경이 나오게 된다.

한때 누에알에서 금붕어가 나온다고 했다. 그런데 누에라고 하는 것은 뇌수가 없는 곤충인데 금붕어는 척추동물이다. 아예 몇억년 차이가 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이렇게 사람들이 무식하다. 지금도 잡지에서 UFO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얼마나 무식한가? 자연과학에는 통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기계를 만들어 제품은 잘 쓰는데 기술은 없는 것 같다. 포유동물이 나오기 전에는 공룡같은 파충류가 지배했다. 포유동물이 나와서도 원숭이 종류가 제일 두뇌가 발전했다.

 

싸우는 능력으로 보게 되면 사자나 호랑이, 곰이 세다. 그러나 생활이 단순하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도 아래서도 살 수 있다. 나뭇잎도 먹을 수 있고 초식도 할 수 있고, 곤충도 잡아먹을 수도 있고 손이 발전되고 아주 복잡하게 생활이 다양하게 되었다. 다양한 생활을 지휘하는 뇌수가 발전했다.

몸의 무게에 대한 뇌수의 비중이 침팬지의 경우는 1/80이다. 동물의 왕이라고 하는 사자는 1/700이다. 인간은 1/47이다. 뇌수가 우리 혈액의 25%, 산소의 25%를 뇌수가 쓴다. 지휘기능이다. 지휘기능을 잘 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정신이다. 이러한 연구는 몇 10년 걸려서 나온 결과다.

 

맑스주의자들도 이를 해명하지 못했다. 맑스주의도 생명이란 단백체의 존재방식이라고 보았다.

이것이 결국은 물질적 존재가 객관적인 존재인 동시에 주체로서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맑스주의자들은 관념론자라고 한다. 철저하게 이들은 주관주의의 속성을 부인한 사람이다.

그런데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것은 왜 운동의 원인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인간도 물질적 존재로서 인간의 모든 행동을 보게 되면 원인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되어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원리가 관계되게 된다. 세상에는 꼭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동시에 세상에는 다르기만 하고 공통성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모든 사물의 동일성의 측면과 차이성의 측면을 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일성만 있고 차이성이 없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차이성만 있는 동일성이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기에 자기를 보존하자는 성질이 결합되어 동일성을 보존하자는 작용을 할 때는 척력이 작용한다.

그러므로 원래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하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대립만 되어서 어떻게 통일이 되겠는가? 대립만 되는 사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성과 함께 통일성이 같이 있는데 어느 면이 더 우세한가에 따라서 대립된 면이 강화되면 분열이 되고, 통일성의 면이 강화되면 통일이 된다.

 

Ⅶ. 숙명론(운명론): 타고 나지만 의지의 단련으로 변화되고

다음에는 의식의 발생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의식과 심리를 혼동하고 있다. 아이들은 고열상태가 되면 주사를 놓아도 아픈 것을 모른다. 이것을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의식이 원래 없는데 의식은 객관적으로 표현하게 되었을 때 의식이라고 한다. 의식은 사회적 의식이고 사회정신으로 된 것이다.

그런데 아프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감각이다. 감각으로 느끼고 지각으로 인정하고, 어린아이에는 지각도 없다. 어린아이에게는 책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뿌옇게 보일 뿐이다. 조금 커서도 남자는 다 아빠라고 하고 여자는 다 엄마라고 한다. 구별 못한다.

그러니까 인도에서 발견한 아이들을 개가 갖다 키웠는데 개와 같이 생활하고 키워준 엄마 개를 모방해서 물도 개처럼 먹고 기고 살았다. 하나는 3살이고 또 하나는 8살이었는데 3살짜리는 목사의 부인이 지성을 다해 키웠는데도 죽고, 8살 여자아이는 17살에 죽었다. 다 큰 나이인데 어릴 때부터 기는 버릇이 있어서 급하게 되면 긴다. 무척 애를 써서 키웠는데도 8살 정도의 지능 밖에 가지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몸은 인간이라도 정신은 못가진다. 정신은 부모로부터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정신을 가질 수 있는 소질은 타고 난다. 그만큼 우리의 두뇌의 발전수준이 100만년 전만 해도 우리 두뇌의 용적이 1kg가 잘 안되어 있었다. 지금은 대체로 서양인들은 1kg 400정도이고 동양인은 1kg 350정도 된다.

그런데 뇌수가 크다고 해서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다. 뇌수의 세포수는 140억개이다. 한번 형성되면 더 불어나지는 않는다. 줄기만 한다. 90세가 되면 반감한다고 한다. 이들을 기억 소자라고도 하는데 30%정도 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인의 뇌수의 무게가 제일 큰 사람이 노동자인데 2kg이다. 러시아의 작가이며 정신병자 비슷한 토스토예프스키의 두뇌의 크기가 2kg 200이다. 천재적인 작가인 아나톨리 프랑스는 1kg 100밖에 안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뇌수도 1kg 300밖에 안 된다. 일반적인 사람보다 작았다. 그렇기 때문에 뇌수의 크기와 머리 좋은 것 하고는 관계가 없다. 뇌가 크다고 해서 공부 안하면 소용이 없다. 노력하는데 달려 있다.

 

손금 보는 것, 사주팔자 보는 것, 이런 것들은 다 쓸 데 없는 짓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특색일 뿐이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존재로서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정신적인 발전의 수준이 자꾸 달라지고 성격도 달라진다. 물론 기질적인 측면에서 혈액도 있고 한방에서는 태음, 소음, 태양, 소양 등 4상(四象)(한의학에서 사람의 체질을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으로 나누어, 각각의 체질에 따라 다른 약을 써야한다고 하는 주장. 조선 고종 때, 의학자 이제마(李濟馬)가 내세운 한의학설임.)이 있지만 기질적인 측면에서 약간은 영향이 있을 수 있지만 문제가 안 된다.

 

유전자가 중요하지만 유전자도 변형을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를 더욱 더 고칠 수 있기 때문에 의지를 단련시켜 나가야 한다. 의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숙명론(determimsm: 결정주의, 결정론)의 대립개념으로 혁명을 두고, 서양의 자발주의(voluntarism)는 주의설로 혁명과는 다른 개념이다. 숙명론이라고 하는 것은 팔자에 타고 난대로 된다는 것인데, 팔자를 고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말하자면 사회혁명이 아니고, 인간의 운명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데서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사회적 변혁하고 혼동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혁명이란 天命을 바꾼다는 정권교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은 숙명론의 반대용어가 혁명론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은 한울님이 왕이 되라고 성명을 내려서 김씨 왕조, 이씨 왕조 이렇게 했는데, 성을 갈고 다른 사람이 한울의 명을 받들었다 하는 것이 한울의 명(령)을 받아 성을 고친 것을 이를 역성혁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철학적으로 말하는 숙명론하고는 다르다. 天命은 동양사상인데 모든 물질, 모든 존재의 성질은 한울이 규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은 천명이다. 유교사상(공자의 사상)으로 중용에 있는 말이다.

 

天命之謂性(한울의 명이 인간의 본성이다)

率性之謂道(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 도이다)

修道之謂敎(도를 닦는 것이 종교이다)

 

天命은 한울이 특별히 무엇을 준 것으로 동물 등의 성격을 준 것이다. 그 성질이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가 하는 것은 별문제이다. 정신은 인식인데 우리의 생명활동을 지휘하기 위해서 나온 것으로 생명이 발전하면서 정신이 자꾸 발전한다.

 

Ⅷ. 결론: 지구를 완전히 관리할 수 있고

세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객관적인 존재는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으로 존재한다. 두 번째는 모든 사물은 자기보존성을 가지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인력과 척력이 작용한다. 결합될수록 자기보존능력이 강화된다. 자기보존 능력이 강화되면 다른 사물을 끌어당겨서 자기를 조직화하고 동화작용을 하고 자기 후대까지 복제해낼 수 있다. 이때 생명이 나온다. 생명의 활동을 더 생명의 요구에 맞게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 지휘기능으로서 뇌수의 지휘기능으로서 정신이 발생했다. 이상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본 것이다. 이런 줄거리를 가지고서 인간중심 정치철학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끝으로 협력, 결합, 통합을 두고 핵융합에 대해 설명해보자. 핵융합을 통해 평화산업에 이용하기 위해서 5,000명 집단의 전 세계 학자들이 매달려 있다. 원자탄이라고 하는 것은 우라늄235의 일정한 량의 플로티늄을 모아두면 연쇄반응을 한다. 연쇄반응을 해서 나올 때 질량이 0.1kg이 줄어든다. 핵융합을 할 때는 0.5%가 줄고 태양에서 할 때는 0.7%가 준다. 우라늄을 이용할 때는 0.55가 줄고, 분열할 때도 줄어드는데 하나는 융합해서 줄면서 에너지가 되고, 하나는 분열되면서 질량이 0.1% 주는 것이 열이 되는데 이것을 원자탄이라고 한다. 원자탄이 되면 1억도까지 올라간다. 태양내부에서 속도가 초속이 300km인데, 1억도까지 올라가게 되면 초속이 900억도까지 된다. 이런 정도로 되면 핵이 융합된다.

그러므로 원자탄은 핵이 융합을 일으키는 성냥역할을 한다. 이를 이용해서 수소와 수소를 결합시킨 것이 수소폭탄이다. 원자탄의 1,000배 이상의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 열이 이렇게 많이 난다. 이것을 북한이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열은 1억5,000만도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런데 특수 장치로 열을 올리는데 그것을 결합시켜서 얼마나 계속되는가 하는 것이다. 원자탄은 1초가 잘 안 된다.

그러므로 이를 핵융합으로 평화산업에 오래 쓰게 돼야 하는데 이것이 아직도 해결이 안 되었다. 학자들은 2050년도에 가게 되면 대체로 가능하다고 한다. 프랑스, 스위스, 하와이 등에서 실험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보급해서 쓸려고 하면 50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이것만 되면 에너지문제는 당분간은 불편이 없게 된다. 이제 이렇게만 되면 0.7%만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 에너지로 만들게 되면 1g의 0.7%는 7/1,000g인데, 그런데 1억5,000만 칼로리가 나오는데 1g을 완전히 전소시키면 215억 칼로리가 나온다. 1g의 0.7%만 에너지로 전환시켜도 1kw히터를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20년간 계속 켤 수 있는 에너지가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1g을 완전히 에너지로 바꾸게 되면 2,500만kw의 전력이 나와 큰 발전소 하나가 된다. 그러니 이것만 성공하게 되면 인간이 자동차에 갖다 넣을 경우 자동차가 삭아서 없어질 때까지 휘발유 넣지 않고도 갈 수 있다. 따라서 사막을 개척하는 문제, 남극대륙을 개척하는 문제, 다 해결될 수 있다. 그때 가면 이제 지구는 완전히 인간이 관리할 수 있다.

 

융합, 협력의 이론과 사례를 통해본 인간중심 세계관의 통일세계관이다.

 

* 본고는 황장엽 선생님이 평소 ‘인간중심정치철학’에 대해 강의한 내용을 ‘통일의 세계관’으로 정리해본 글이다.

 

글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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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damah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