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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칼럼] 통일민주주의 시대의 도래: 정의와 사랑으로

[칼럼] 통일민주주의 시대의 도래: 정의와 사랑으로

 

[시사타임즈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 민주주의 시대: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으로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c)시사타임즈

1. 오늘은 민주주의 시대이다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의 차이는 자기생명의 주인으로서,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가 하는 차이이다. 오늘 우리는 남·북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제생활을 해오면서 평화통일의 행복한 삶을 도모하지 못하고 여전히 불안정한 정치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정치체제(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여기서는 민주주의의 전개과정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궁극적으로 인간중심 정치철학으로 보다 완성된 통일의 민주주의 정치사상(정치학)을 추구해보고자 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오늘은 민주주의 시대이다. 민주주의 시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현재 시대를 어떤 시대로 봐야 되겠는가? 앞으로 시대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그런 문제를 이야기 하려고 한다.

 

2.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의 차이

첫째로 민주주의 시대가 반봉건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왜 민주주의 시대라고 하고, 새로운 역사적 시대라고 봐야 되는가? 그것은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까지의 생활하고 그 후의 인간생활이 본질적으로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막스주의자들은 이것을 계급주의적 각도에서 계급 해방이 되었는가 안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것을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좀 더 전 인류의 역사적 과정에서 보고자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사람이 동물세계에서 벗어나서 점차 사회적으로 생활하게 되었는데, 물론 봉건사회만 보더라도 동물세계에 비하면 그것이 질적인 변화를 하고 있다.

 

 

그러면 봉건 사회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어디에 있는가? 신분제도가 제거된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고 그 밑바닥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봉건 사회만 하더라도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서 산다. 인간에게 정상적인 생활방식이 무엇인가? 이런 각도에서 보게 되면 봉건사회하고 자본주의 사회는 큰 차이가 있다. 동물은 자연에 예속된 존재다.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의 혜택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때도 사람들이 동물들 하고는 차이가 있었지만 그 원시사회가 오랫동안 계속 되어 동물적인 것이 많았다. 자연에 예속되고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이 많았다. 봉건 사회에 와서 상당히 인간의 자체의 힘으로서 살아나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결국은 농업이 기본이었고 자연 기후 조건에 지배를 받았고, 그러니까 풍년과 흉년이 되는 조건이 사람의 노력보다 기본은 기후가 어떤가에 달려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 나간다 하는 생각을 가지지 못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자기가 자기생명의 주인으로서 누구에게 예속당하지 않고 자기의 힘으로 살아 나간다고 하는 것, 여기에 동물과 인간생활을 구분하는 기본징표가 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는 인권도 그렇다. 자기 생명의 주인은 자신이다. 그런데 그 봉건사회의 수준을 가지고서는 그런 생각이 나올 수 없다. 사람이 외부의 혜택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예속 되지 않고서 자기 힘으로 살아 나가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생존방식이다. 그런데 그전까지는 이것이 확립 안 되었다. 인간의 고유한 생존방식인 자신의 힘으로 살아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봉건사회만 하더라도 세워지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도 사실 완전하게 되려면 공업이 위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개선인데 우선 사람이 창조적인 노동에 의해서 생활 수단들을 생산해 나가는 공업이 위주로 된다. 농업이 계속 위주로 되어선 자연의 혜택으로서 살아나간다는 사상에서 벗어 날 수 가 없다.

 

3. 주권재민의 사상: 신분제도의 타파로 자유와 평등 사상이 나오고

주권재민의 사상에서 자유와 평등의 사상이 나오게 되어 신분제도의 타파로 되었다.

인간이 자기 자체의 힘으로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아가게 하는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을 때, 어쨌든 자본주의와 같은 사상이 먼저 나오게 되었다. 그런 사상들이 나오게 되면서 사회를 변혁시키는 운동으로 되어서 타고난 신분제도부터 없애야 되겠다, 사람은 다 같다, 사람은 다 같이 자기운명의 주인이다, 자기 생명의 주인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주권이 즉, 특권계급이 아니라 일반 백성, 일반인민들에게 있다는 것으로 주권재민의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사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자유의 사상이란 남의 간섭이 없이 자신의 살려는 욕망()을 실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 사람에게서 제일 중요 조건이 살려는 욕망인데, 살자는 욕망을 자유롭게 누구의 간섭을 받거나 예속되지 않고 이것을 실현 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다.

 

 

평등은 무엇인가. 평등이란 같은(공정한) 대우(평가)를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수단과 관련 되어 있다. 평등한 대우를, 평등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양반들이 한 노동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주고, 상놈들이 한 노동, 즉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한 노동에 대해서는 평가를 안 해주고, 이것은 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등하고 공정하게 평가를 받는가 하는 데서 기준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은 생활을 실현해나가는 노동, 이것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살자는 것이 인간의 생명인데 이는 인간의 활동을 통해서만 된다. 힘의 작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데 그것에 대해서 공정하고 동등하게 평가해주어야 된다. 이것이 평등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자유와 평등이 서로 같기도 하지만 구분해서 하게 되면, 하나는 욕망을 자유롭게 실현하라는 것, 즉 욕망에 대해서 남의 간섭, 남의 예속 이것을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나가는 방법, 수단에서 공평해야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놀고도 먹을 수 있고 이것은 안 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상이 옛날엔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에도 묵자라는 색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유교사상하고도 다를 것이 없다. 그는 상현(尙賢) 상동(相同) 두 가지를 강조했다. 상현이란 출신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것을 그대로 평가해주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 생활해나가는데 있어서 삶의 욕망을 누구한테 제약을 받고, 누구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마음대로 살 수 있다,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 욕망을 실현한다. 이것이 상현, 자유이다.

 

그 다음에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한데 대해서는 다 공평하게 평가해 주어야 된다, 이것이 상동이다. 자유를 욕망하고 결부시키고, 평등은 우리의 활동, 노력, 힘하고 결부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이때부터 인간으로서의 생존방식이 달라졌다고 하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막스주의자들은 그것을 몰랐다. 상부구조요, 계급적인 차별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주장을 계속하다 보니까 그 구분을 못했다.

 

4. 인권사상과 주권(재민)사상

인간중심철학은 생존방식(사고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로 욕망의 자유와 노력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다. 인권사상은 자기생명을 주인으로 하며, 주권재민은 집단자체를 주인으로 하는 사상이다.

 

인류 역사 발전에서 가장 큰 변혁이라고 하는, 생존방식에서 근본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이것을 우리는 똑똑히 이해해야 한다. 인류의 생존방식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다. 여기서 인권사상 주권사상이 나오게 된다.

 

자유의 측면으로 볼 때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생명이 누구의 것인가? 자기 자신의 것이다. 자기 자신이 살려는 욕망을 자체의 힘으로 실현해 나가는 자기의 생명인 것이다. 인권이라고 하면 복잡하게 정의를 하는데, 결국은 자기 생명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권은 노동의 산물이 아니다. 누가 준 것도 아니고 타고 난 것이다. 그런 생명을 타고 난 것이다. 노동의 산물이라면 주고받고 나누어 먹을 수 있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아예 인간으로서 타고 난 것이다. 그것의 주인은 나다. 개인이 다 자기 생명의 주인이다. 이것이 인권사상이다.

 

사람들이 합해서 사회를 만들고 국가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관리 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가지는가. 이것은 집단 자체가 가져야 된다. 거기에 속해있는 인간들 자신이 주인이 되어야 된다. 이것이 주권사상이다, 주권재민의 사상이다. 주권은 그 사회를 관리하고 사회 운명을 결정 할 수 있는 권한으로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에 속한다. 다른 특권 계급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인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다. 인권과 주권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이 인간중심철학의 사고방식이다. 다른 식으로 해서는 이러한 정의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을 주목해야 한다. 인권과 주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 따라서 이는 민주주의에 관한 것으로 인간중심철학에 기초해서만 정확히 해결되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주권재민의 사상이 민주주의 기본사상으로 그것이 당장 실현 될 수 있는가, 완전히 실현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없다. 그렇게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선 봉건사회, 즉 민주주의 이전 사회로부터 나온 것으로 낡은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고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나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먼저 인권 사상이 나오고, 자유와 평등의 사상이 나왔다. 실력 있는 자들이 봉건 계급과 마찬가지의 착취와 압박을 하고 권세를 쓰고 특권행세를 한 것이다. 자본주의 초기의 자본가들은 무자비 했다. 그래서 막스주의자들이 이런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도 봉건사회와 같이 착취를 한다. 그래서 막스의 노동계급이 출헌한다.

 

엥겔스가 영국의 개인주의사회를 두고 노동계급의 상태를 연구해서 발표한 책이 있다. 그것을 보면 봉건사회의 착취계급이 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봉건계급을 자본가 계급이 대신한 거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도 봉건적 낡은 잔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개인주의사회의 정의의 원리의 한계는 상상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사랑의 원리로 결합해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개인주의사회에서는 일정한 성과도 있었지만 집단을 잘 모른다. 일제시대에는 계급이라는 말을 못쓰게 하고, 이를 단체라고 하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드니 지금은 집단주의를 독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명정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개인적 존재이면서 집단적 존재라는 것, 큰 정의로 보더라도 정의의 원리 사랑의 원리를 배합해가야 하는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잘 사는 것을 인정해야지, 빈부의 차이 없이 다 같이 잘 살자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물론 나쁜 빈부의 차이는 없어져야 한다. 정의의 원리로 개인주의(자본주의)를 실시하다가 그 다음에 조건이 성숙되면 사랑의 원리로 집단주의(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빼앗아 먹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인간을 사랑하면서 집단적으로 결합할 때 상상할 수 없는 힘이 나온다. 정의의 원칙만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의 원칙을 잘 모른다.

 

자유로운 평등, 경쟁을 하다보면 이기고 지고 하는데, 그리하여 부화방탕한 사람도 있겠지만, 필요한 불평등은 인정하면서 제한해가야 한다. 참아야 할 불평등이란 머리를 써서 기계를 구입하여 생산하는 자 등과, 상속문제로 계속해 자기 생명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두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공산주의체제하에서 농사를 하는데 많이 지으나 적게 지으나 수입은 같은데, 수확을 많이 올린 결과, 오히려 가마니를 짜야지 운반해야지, 더 많은 부담을 지게 되니 먹을 것만 짓고, 심지어 농사짓는 것보다 물고기 잡는 것이 생활에는 낫다고 하여 힘든 일을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발전의 정도를 보아가면서 자유와 평등, 경쟁, 정의의 원리와 협력, 협동, 명예, 상호방조, 사랑의 원칙을 앞으로는 결합해가야 한다. 개인주의사회가 절대로 좋은 것으로 그렇게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 민주주의의 철학적 사고(생존방식)에 대해

1. 사람은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 존재이다

민주주의의 둘째 문제는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철학적 사고(생존방식)로 사람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체적인 것으로 결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생활해 나가는데 있어서 각각 특색 있는 자기 육체를 단위로 해서 자기의 생명을 가지고서 살아나가는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생활이 있고, 또 집단으로서 대를 이어서 사회를 형성해서 생활해 나가는 집단생활, 이 두 측면이 있다. 이것도 사람들이 크게 생각을 못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 인간의 집단도 생명을 가진다고 하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제일 힘들다. 어떻게 집단이 생명을 가지는가? 생명을 가지는 것은 개인 밖에 없는데 자꾸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개인 밖에 생명을 안가진다면 개인의 생명은 한 대로 끝나는데 왜 인간은 계속 살아 있는가. 또 생명이 개인의 생명만이라면 왜 자기의 아이를 낳으려고 하나? 또 비석이라도 세워서 자기의 이름을 남겨 놓으려 하는가? 개인만으로는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없다. 이것을 우리가 똑똑히 알아야 된다. 부모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니까 개인이 있다가 우리 협력하자, 사회를 만들자, 이렇게 해서 집단이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사회적인 집단이 있었다.

 

처음부터 사람은 개인적인 존재인 동시에 또 집체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인간의 선조들은 동물 상태에 있을 때부터도 벌써 그런 식으로 되어 있었다. 다만 사회적인 존재가 못되었다. 사회적인 의식이 없고, 그렇지만 유치한 상태로라도 집단적으로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적으로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생명체가 존재 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이 역시 철학적인 사고이다. 모든 것, 모든 물질까지 다 자체적인 것이 연결되어 통일되어 있다.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서 철학적인 견해를 가져야 한다. 이것을 몰라서 칸트도 사람의 지혜로는 불가능하다고하여 사람의 인식(능력)으로서는 다음의 4가지를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4가지 불가지론(不可知論)도 대립물의 통일로 이해해야 한다.

 세상이 유한한가, 무한한가, 무한한 것 같기도 하고 유한한 것 같기도 하고, 유한하다면 그 밖에는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끝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건 도저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세계가 단순한 것으로 결합되어 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복잡한 것인가?

 인간은 자유로운가 필연적 운명인가.

 신은 있는가(유신론) 없는가(유물론).

 

무한하면서도 동시에 유한하다, 또 단순하면서도 복잡하다, 이렇게 사고를 못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운동도 안 되고 발전도 안 된다는 것을 그때는 이해를 못했다. 하나만 가지고서는 운동도 안된다. 라이프찌히 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단자다. 가장 단순한 요소가 하나 있어서 그것이 결합되어 진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안된다. 가장 원시적인 존재인 이 빛도 광자(양자)가 있고 동시에 그것은 빛의 파장으로서 존재한다. 원자를 이렇게 설명을 하면 원자에는 원자핵이 있고 그것을 전자가 도는 걸로 그린다. 그렇게 해서 전자라고 하는 알맹이 하나가 도는 것으로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전자자체는 알맹이인 동시에 파장으로 돈다. 그래서 그전에는 불확정성 원리로 하여 그것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 광선을 투입하게 되면 그것이 충격을 주어서 더 빨라지고, 그래서 위치를 알자면 속도를 알 수 없고, 속도를 알자면 위치를 알 수 없고, 뭐 그런 식으로 말했는데, 그것이 다 근본적으로 물질이 두 가지가 대립된, 두 가지 모순된 것이 통일 되어 있다 하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것이 명백해지고 있다. 이것이 소위 뉴턴의 광양자론(입자론)과 호이겐스의 파장론이다.

 

그래서 인간도 절대로 영원히 개인적인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하게 된다. 인류발전의 초기에는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고 인간의 이익을 생각한 것으로 개인중심의 민주주의가 먼저 발전한다. 민주주의 혁명 초기에는 개인주의, 자본주의가 먼저 발달한다. 개인적인 욕망에는 무엇보다 육체적 욕망이 기본이고, 이는 물질적인 것으로 이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문제가 개인주의 민주주의이고 그래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된다. 개인민주주의가 경제분야에 치중한 민주주의가 되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되었다. 자본주의라고 이렇게 안 불러도 되는데 경제발전이 특징이 되다보니 그렇게 불리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인간이 개인적인 존재인 동시에 집단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식한 것이 아니다. 이제 민주주의 사회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그런 상태로 왔는데, 이는 생활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먼 앞날의 집단의 생활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보다 당장 자기가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는가, 내가 더 잘 살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경쟁 할 것인가, 이것이 기본이지 우리가 다 같이 잘 살고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 할 수 없다.

 

또 인간이 개인적 존재로 살면서도 무엇이 제일 중요하겠는가? 생활에서 먹고 입고 사는 경제적인 생활이고, 정신적 힘을 키우는 것도 있고, 사회적으로 연결을 가지는 3가지 부분이 있는데 그때 제일 중요한 것은 당장 먹고 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나온 것이 곧 경제생활에 적용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경제적인 민주주의로 되었다. 자본주의라는 말을 안해도 된다. 사실은 이것이 개인주의적인 민주주의인데 경제에 그것이 적용되어서 경제생활에서 큰 변혁을 일으키다보니까 자본주의 사회로 말하게 되었다.

 

 

2. 집단주의(사회주의) 민주주의의 출현: 민주주의의 완성으로

주권재민의 집단주의와 막스주의의 관계는 신성가족, 독일 이데올로기 그리고 공산당선언을 통해서 알 수있다.

 

집단주의의 사회주의에서도 주권재민은 어느 의미에서는 더 강조한다. 민주주의를 더 완성하기 위해서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주권재민은 특권계급의 것이 아닌데 그런데 집단주의가 실현이 안 되므로 계급주의를 집단주의에 결합시킨 것이 막스주의다.

 

막스도 처음에는 진정한 민주주의사회로 집단주의 민주주의를 생각했다. 신성가족,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렇게 말한다. 진정한 완성된 인도주의적 민주주의로 집단주의를 생각했지만, 그 후에 가장 발달한 계급이 사심이 없는 무산계급으로 무산계급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으므로, 따라서 무산자 프로레타리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열정과 공산주의 철학을 결합시켜 계급주의를 강조하게되었다.

 

그 후에는 공산주의사상과 노동계급이 같은 것으로 된다. 이것을 뚜렷하게 한 것이 공산당선언이다. 역사의 발전과정을 계급투쟁의 발전과정으로 본 것이다.

 

이것을 막스주의자들은 인민이 다 평등하게 자유와 평등을 얻어야 한다며 노동계급이 주권자라고 설명을 했다. 그런데 노동계급이 전체 인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가 있겠는가? 주권재민의 목적은 같다고 하지만 민주주의사상과 배치되는 것이다.

 

이는 첫째로 인간은 다 개인적 존재이자 동시에 집단적 존재라는 것을 몰랐다. 두 면이 다 필요한데, 그리하여 처음에는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발전시켜가야 한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앞서 발전하는 것인데 이를 바꾸려고 한다.

 

둘째로 막스주의의 계급주의는 민주주의 자체를 배반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처음에는 주권재민을 주장했지만 나중에는 실제적으로 주권재민이 되지 않은 것으로 되었다. 노동계급이 주권재민을 이상적으로 대표하는 것으로 논리를 전개하다보니 노동계급의 이익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 되어 인민정권이 된 것이다.

 

 

주권이 인민에게 있고, 노동계급이 인민의 이익을 잘 대변하고, 노동계급의 이익을 공산당이 대변하고, 그러므로 '독재'도 가능하게 되고, 한 발짝 더 나아가 앞을 내다보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수령인 것을 두고 스탈린처럼 궁극적으로 주권은 영도자에게 귀속되게 된다.

 

막스주의는  유물론에 입각해서 경제중심적으로 나아가는 원리와  계급투쟁을 방법론으로 내걸다 보니까, 이것이 주된 것으로 되어 군국주의와 독재를 강화하여 집단주의를 왜곡시켰다. 왜곡된 집단주의가 된 것이다.

 

그런데 봉건말기에는 자본가가 제일 압박을 받고 착취를 받던 계급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민주주의는 개인주주의적인 민주주의로 발전했는데 그것도 경제중심의 민주주의의로 되었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혁명)시대에 들어서면서 초창기의 발전된 민주주의가 되었다. 이것을 요즘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런데 자유민주주의는 결국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두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봉건적인 잔재를 많이 가지고 있어서 민주주의로서의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개인주의적인 민주주의였기 때문에 집단주의적인 요구를 표현 할 수 없다는 이런 두 가지의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비판해서 집단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 빈부의 차이를 없애야 되겠다 하고 나온 것이 사회주의다. 그래서 그 다음시대는 사회주의시대이다. 자본주의는 낡았음으로 자본주의를 대신 해서 나온 것이 사회주의다, 사회주의란, 사실은 집단주의인데 거기다 계급주의를 첨부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해보니까 잘못되었다. 계급주의도 잘못되고 계급투쟁 무산계급 독재도 잘못되고 집단주의를 주장했던 사회주의도 잘못되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자를 그 때는 신이 나서 비판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결합을 비판했다. 막스는 거기다 계급적인 것을 결부시켰는데, 과학적 사회주의자들도 그렇게 해서 다 잘 살아야 된다며 마지막 결론은 집단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무슨 결론을 지을 수 있는가? 민주주의 시대는 아직 발생으로부터 발전해서 완성되어야 되는데, 개인주의적 민주주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그래도 발생·발전으로 거의 완성되어 나가고 있지만, 그런데 민주주의 시대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는 아직도 출발점에서 몇 백 년 밖에 안 되었다. 이것이 계속 발전해야 완전한 민주주의로 계속 발전해야 되겠는데, 이게 끝났다, 사회주의로 넘어가야 된다, 요즘은 또 제3의 길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 잘 몰라서 그렇다. 무슨 3의 길이 있겠는가? 민주주의 길이 아직도 제대로 개척도 안 되었는데 무슨 3의 길을 가겠는가? 자본주의길,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 완성 되어야 된다.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신 할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그런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은 있다. 막스도 그것을 시도한 것 아닌가?

 

3. 8·15 해방의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집단적 민주주의로

인도 공산당도 개인중심의 민주주의로 시작을 하였따.

지금도 자꾸 좌경으로 나가자는 사람들은 그런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그 사람들 그것 잘 모른다. 다 같이 잘 살자는 조건이 왜 나쁜가 하면서 처음에는 다 그랬다. 8.15 해방 후에 노동자 농민을 위한 민주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다 자꾸 이야기 하고 우리가 다 잘사는 사회를 건설 한다고 하니 그럴듯해보였다. 그것이 왜 잘 못되었는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그러나 지금 와서 보게 되면 그것은 안 된다. 인간은 개인적 존재이면서 집단적 존재라는 것은 사실이다. 두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 민주주의가 좀 결함이 있다고 해서 집단적 민주주의로 하면 더 낮겠는가. 그것은 더 안 된다. 왜 더 안 되는가? 아직도 개인의 생존의 요구가 충족되지 못한 조건에서 교체해서 안 된다 하는 것이다.

 

지금 출발한 개인 중심의 민주주의를 더욱더 완성해 나가면서 집단의 요구도 받아들여 완성해서 다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해야 된다. 다 같이 잘 살자고 해서 잘 살게 되는가? 우리는 인도에 여러번 여행을 다녀왔다. 3세계의 나라에서는 제일 큰 나라이고 공산당 계통하고 사업도 하고, 1996년 마지막으로 갔을 때 공산당에서 찾아왔다. 이거 경제가 고도성장이 되어서 1년에 13%씩 장성 하는데 빈부의 차이가 커져서 야단이다,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이었다. 거기에 공산당이 2개다. 막스주의 공산당과 막스레닌 공산당이다. 벵골주가 큰 주인데 그 벵골주와 2,3개 주가 합쳐서 인구 1억 이상이 되는데 그 정부를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다.

 

막스주의자라고, 거기 총비서를 하는 젊은 친구가 늘 우릴 찾아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12번 왔는데 그전에는 너무 거지가 많아서 보기가 참혹했다, 뉴델리를 저녁에 나가보면 거지들이 잠자리를 다투고 있었다. 어디를 갈래도 자꾸 구걸하는 사람이 많으니 힘이 들었다. 방글라데시는 더했다. 1년에 홍수로 100만이상은 매년 죽고, 대사관에서 차로 나갔다가 사람을 하나 치었다. 그래서 파출소에 가서 내가 차를 몰고 오다 실수해서 사람 하나 치어서 죽었다 하니, 아 됐다고 가라고 했다. 사람하나 치어 죽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거지가 많았었는데 1996년에 12번째 갔을 때 거지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욕 했다. 보라 지금 없어지지 않았는가? 생산이 자꾸 발전되면 다 잘 살게 된다, 그것을 앞에 해야 된다.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하는가? 공산당은 다른 당하고 협력해서 이 정책을 잘 지지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참다못해서 욕을 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자기가 잘 살자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동정하는 성질이다. 인간은 개인적 존재이면서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생존과 발전의 개인주의도 집단의 생존과 발전의 집단주의도 인간본성의 두 가지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두 측면이 있다. 어느 것도 잘 되고 잘못 되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느 것을 중심으로 하는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룻소의 사회계약설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계약을 체결하는 것인데, 그런데 개인의 생명이 유한하다 보니 다수결로 하는데 이는 반드시 집단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주의자는 집단의 생명을 영원한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개인은 집단의 생명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요즈음 잘못하게 되면 그것이 선한 것 같이 보여서 자꾸 집단주의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오지 않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다. 그래서 막연히 3의 길을 추구하고 있으나 3의 길은 없다. 닝전종식으로 민주주의 길 밖에는 없다. 민주주의를 좀 더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지금은 여전히 역시 민주주의 시대다. 또 사회주의가 망하니까, 그 다음에는 협동(주의) 뭐 자꾸 이야기 하는데, 민주주의를 똑똑히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말한다.

 

공자보고서 죽음이란 무엇이냐고 물으니, 삶도 모르면서 죽음을 왜 물어 보느냐고 했다. 민주주의 자체를 똑똑히 모르는 사람이 이것이 삶의 길이요, 뭐요, 자꾸 이야기 한다. 민주주의를 개선 완성할 생각은 안하고, 그러니까 지금 시대는 역시 민주주의 시대다. 민주주의를 개선 완성해 나가는 시대인데, 이제 세계를 민주주의화 해나가는 시대에 도달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시작되었는가? 냉전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난, 제국주의가 없어진 때로부터 세계가 민주화해 나가는 방향으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있다.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해서 계속 국가 권위주의적으로 나가는 것, 계급주의적으로 나가는 것이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그러나 큰 역사의 흐름으로 볼 때는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냉전 종식으로 자본주의 제국주의를 벗어나서 세계가 민주화시대로 들어섰다.

 

자본주의가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이대로 나가면 안 된다. 실업자를 자꾸 내서 되겠는가? 실업자 없애야 된다. 그러니까 이것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빈부의 차이를 없애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하는데 이것은 다 위선자다. 빈부의 차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빈부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빈부의 차이를 부정하면 어떻게 되는가? 일하는 사람이나 일 안하는 사람이나 도둑놈이나 보통사람이나 같은 대우를 해주자는 것이 말이 되는가? 능력이 많고 일을 많이 하고 재능 있는 사람이 더 잘 살아야 된다. 부당하게 잘 사는 것, 또 일할 권리조차 없게 되어서 실업자를 내는 것, 이런 것을 없애야지, 뭐 추상적으로 빈부의 차이를 없애야한다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 나쁘다. 자기는 남보다 더 잘 살면서, 그런 데에 속지 말아야 한다.

 

. 정치의 과업: 인간중심 민주주의로 부단히 발전시켜가야

셋째,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의 완성인 통일민주주의 도래를 두고, 자본주의사회의 정당제에 관해 말해보도록 하자. 자본주의사회는 다당제인데, 정권은 사적인 노동의 산물이 아니다. 개인주의사회의 경제분야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을 조절하지 않고 정치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 의회민주주의이다. 따라서 다당제는 인민의 정권이 아니다. 정당의 정권이 된다. 예를 들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쟁대상을 날조해가지고 서로 공격하지 않는가?

서로 사양해야 사람일텐데 장사군들이 물건팔 듯이 계속 자기 선전을 하는데, 이것이 인간본성에 맞겠는가? 정권이 정당정치로 표만 얻으려고 하니, 정권은 공적이어야지 사적이어서는 안 된다.

 

정권은 자본주의적 개념으로 쟁탈적, 도박적 산물이 아니다. 이것부터 고쳐야 한다. 정권은 사적인 노동의 산물이 아니다. 인민의 이익에 충실하는 공적인 정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인권과 주권은 노동의 산물이 아닌 공적인 것이다.

 

자기선전을 계속하여 시장원리로 하는 자본주의개념 자체가 잘못되었다. 자본주의정치가 타락하는 것이다. 자꾸 남을 비하하는 것은 야비하지 않은가? 북에는 천재가 일명이지만 남에는 남보다 잘낫다고 하는 천재가 너무 많아서 탈이다.

 

부인을 대동하는 등, 이런 것들이 봉건적인 산물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는 엄격하다. 지역감정, 권위주의, 이런 것을 토대로 하는 사람들을 인물로 생각하는데 이런 것 자체가 봉건적 사상의 잔재가 아니겠는가? 삼권분립의 자본주의적 권력구조를 비롯하여 봉건적 잔재를 극복할 것이 많다.

 

당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동맹관계로 나아가는 생산적 정치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것이 안 되니 정경유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역사의 발전단계임으로 개인중심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면서 집단주의적 접근을 해야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이데올로기를 통일민주주의로 부르고자한다.

 

막스주의자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실업자를 없애고, 교육·급식 등 후생을 생각하는 상생관계로 여기지 않고, 무산계급이 유산계급을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도산했지만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허위와 기만으로 왜곡되었지만 70년 이상을 버틴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기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두 측면을 보면서 나아가야 한다. 발달의 방향은 인간사회의 발전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정치의 과업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발전을 위해서는 계속하여 사상, 정신문화를 연구해가야 한다.

 

큰 원칙으로 자본주의가 정의의 원칙으로 점차로 조건이 성숙하게 되면 집단주의사상의 사랑의 원칙으로 나아가야 된다.

 

발전과 관련된 행복을 생각할 때 영구불변한 최종의 이상사회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상사회가 실현되면 이미 행복이 아니다. 온갖 근심걱정에서 해방이 되어 더 이상 고된 고통도 없고 근심걱정이 없다면 이것은 죽음이다.

 

한때 모택동이 김일성을 만나 공산주의건설에 대해 200년 정도 걸리겠다고 이야기하니 김일성은 평양으로 돌아와서 그러면 종교를 믿지 공산주의를 믿겠는가 하고 반문했다. 막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아침에는 사냥을, 저녁에는 극장에 가고, 밤에는 철학을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행복의 목표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계급해방에 관한 학설은 엥겔스가 제시했는데 이는 계급통일을 목표로 인류의 영원한 발전을 목표로 한 것이다.

 

현 단계에서 인류의 영원한 발전의 길은 정의의 원칙에 맞추어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개인주의의 일면성을 고치는 동시에 집단주의로 사상개조를 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상황은 개인주의가 천박한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는 막스와 결별하고도 "개인은 개인적 존재이면서 집단적 존재라고 하는 것"을 아는데 30년이 걸렸다.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다는 말이다. 단지 우리는 쉼없는 "학습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운명을 바꾼다"고 하는 격언을 유의하면서 앞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따라서 인간중심의 완성된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 민족과 세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기어코 이루어 내어야 하겠다.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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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damah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