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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 김봉규의 행복칼럼 ] 두 갈래 길

[ 김봉규의 행복칼럼 ] 두 갈래 길


[시사타임즈 전문가 칼럼 = 김봉규 논설위원]

 



김봉규 논설위원 ⒞시사타임즈

 

빛을 향해 서 있는 자에게 그림자는 항상 뒤에 있고,

빛을 등지고 있는 자에게 그림자는 항상 앞에 있다.

 

올림픽 양궁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당연히 과녁 정중앙에 화살을 맞히는 일일 것이다. 한 양궁선수가 있었다. 그는 오랜 시간 인고의 훈련을 통해 마침내 신궁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어떤 환경에서도 원하는 목표물을 맞힐 수 있게 된 그는 득의양양해서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리고 정말 예선전의 100발을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전부 과녁 한 가운데에 명중시켰다. 올림픽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예선에서 탈락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다른 과녁을 쏘았다.

 

벗어난 과녁(hamartia)! 사랑해서는 안 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처럼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마음이 향했다. 판단의 오류가 낳은 비극적 결함이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날리 없다. 올림픽에는 과녁판을 알려주는 집행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의 양궁선수인 당신이나 나에겐 집행부가 없다. 혹시 지금 당신의 화살이 어디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행복을 원한다.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 바쁘게 살아간다. 마치 모두가 행복을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행복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상하다! 어딘 가를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른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이에게 “지금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라고 물었을 때, “네? 아, 저는요! 근데 제가 지금 어디 가는 거죠?”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물론 그럴 일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는 정확히 안다. “저요? 장보러 가는 데요!”, “회사에 출근해요!”, “은행가요!” “영화 보러요!” 등. 누구나 길을 안다. 하지만 누구나 삶의 길을 아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라는 모호하고, 추상적인 기호를 막연히 따라 갈 뿐이다. 그래서 까뮈(A. Camus)는 무대가 무너지는 때를 말한다. 매일 시계추처럼 직장을 오가는 회사원이 평소처럼 콩나무시루같은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중에 문득 생각한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

길은 알지만 정작 삶의 길은 모르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그 때까지 진리였던 인생의 무대는 무너져 내린다.

 

삶엔 처음이 있고 마지막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모르는 처음에 진정 ‘시작’은 없다. 마찬가지로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마지막에 완성으로의 ‘끝’은 없다. “그래 그 정도면 잘 살았다. 이제 미련 없이 떠나자!” 의미의 끝은 항상 새로운 의미의 시작을 동반한다. 하지만 끝이 없는 미완성의 마지막엔 불안과 불확실성, 그리고 두려움만 남는다.

 

근대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에게 이성의 빛을 비추길 원했다. 합리적 이성! 그것은 목적에 적합한 수단의 인식능력이다. 인간은 의식이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그 때마다 선택한다. “점심은 뭘 먹을까?”, “대학은 어딜 갈까?”, “정년 뒤엔 뭘 해야 할까?” 그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능력이 합리적 이성이다. 문제는 인생의 행복은 짜장면과 짬뽕사이의 선택과 다르다는 것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그것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찾아야 할지 알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있는 당신은 도대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진리를 찾아서 구도(求道)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진리를 모르면 길을 알 수 없고, 길을 모르는 사람은 도착할 수 없다. 그리고 도착하지 않은 사람은 출발하지 않은 것이다. 늘상 진리를 찾고 있는 자는 진리를 찾지 않는 자와 같고, 허상을 진리로 착각하는 자와 다를 바 없다. 도(道), 즉 길은 그 길의 끝에 있는 진리를 알 때 비로소 도(道)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도자들은 스스로를 위로한다. 삶이란 어차피 ‘길 위에’ 있는 것이라고, 인간은 어차피 ‘도중’의 존재라고! 최선을 다하는 삶, 그것이 중요하다고!

 

인간은 어리석다. 그는 자신의 것들을 늘 미화시키려 한다. 초등학교 시절이나 군대생활의 추억을 들으면 세상에 멋지지 않은 인간이 없다. 하지만 행복은 아름다움과 추함의 문제가 아니다.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다. 빛을 향해 서 있는 자, 그리고 빛을 등진 자! 그림자를 안고 사는 이들은 길을 모르기에 정진(精進)이라 하고, 진리를 모르기에 무상(無常)을 말한다. 하지만 ‘생각 내려놓기’를 생각하는 것은 생각이 많다는 증거이고, 생각이 없다는 방증이다. 진리의 세계에서 진리를 만나지 못한 자들은 모두 비진리일 뿐이다.

 

빛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행복은 무지개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자신의 자리에 그 진리로 존재한다. 다만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두움의 삶을 사는 이들이 행복이 아닌 무지개를 찾아 산을 넘는 것이다. 진리가 아닌 비진리, 실재가 아닌 허상의 산을 넘는 것이다. 프로스트(R. Frost)는 옳았다. 우리는 누구나 나그네 몸으로 인생이란 숲을 건너는 존재들이다. 그 곳엔 두 갈래 길이 있고, 반드시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말할 것이다. 숲속에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했고, 그것 때문에 인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당신은 그냥 있어도 살고, 그냥 있어도 죽는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참 쉽다. 그래서 제대로 알고 바르게 죽는 것은 정말 어렵다.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스트는 지혜로울 가능성이 높다. 그는 ‘사람이 덜 다닌 길’을 선택했다.

 

김봉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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