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연예/북스

[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12)] 은비령


이순원 저 | 더스타일 | 336쪽 | 5,900원

 

 

이순원 소설세계와 그 의의

 

이순원은 구효서와 함께 1990년대 한국 소설의 한 정점을 이룬 작가이다. 이순원의 소설 역시 다성적인 목소리로 세상과 사람살이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데 초기작들이 빈곤이나 분단 등 강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내장하고 있는 것에 반해 후기에 이르러서는 토속적인 서정을 자전적인 기억 속에 투영시키면서 상처를 공유하고 내면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순원의 소설의 서사의 세계는 매우 다채롭고 공교하다. 내용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공히 다양한 프리즘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개의 작가들은 자기만의 특징적인 세계를 특화하여 보여주게 마련인데, 이순원은 그 어떤 세계라도 자기 소설로 만들어내는 장기를 지니고 있다. 이번 「59클래식Book」 시리즈 「은비령」에 묶인 여섯 편의 작품들은 제각각 소고하고 있는 주제가 다르지만 각각 그 주제와 어울리는 소설적 형상화에 훌륭하게 성공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의 공간적 현장은 매우 다양한데 군대, 광주항쟁, 민주화투쟁, 노동운동, 동구변화와 소련 몰락, 대학생활, 타락한 자본주의의 소비시장 등으로 우리 현실에서 중요한 문제적 공간은 거의 망라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언제 첨단의 시의성을 포착하여 매우 유의미한 징후들을 의미 있게 탐문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소설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데 있어서도 나름대로 실험적인 노력을 계속해 왔다.

 

소통과 서정의 정점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순원의 소설의 의의는 '소통'과 '서정성' 및 '비판'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단히 다양한 레퍼토리와 그에 걸맞는 다종의 기법으로 현실의 많은 국면들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해 왔는데, 대부분의 작품들이 독자와의 교감, 즉 문학적 '소통'에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집의 표제작이며 그에게 현대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준 「은비령」도, 거칠게 말하면 소통의 영원성에 대한 희구를 말하는 작품이다. 죽은 친구의 아내에게 느끼는 연정은 사사로운 욕망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2,500만 년이라는 시공과 아름답게 연계한다. 그것은 그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고향의 풍광과 별과 눈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투명하면서도 절실하게 다가간다. 그의 평이하고도 정확하고 정확하면서도 은유적인 시적 문장은 소통을 호소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도구로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순원의 소설이 한번 가볍게 읽고 지나칠 성격의 소통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문학적 소통의 진경은 그가 독보적으로 만들어내는 서정성을 통해 보다 그윽해진다. 그는 수사가 아니면서도 은일한 수사의 기능을 하는 행간의 아우라를 창출해내는 데 있어 일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은비령」, 「말을 찾아서」의 감동은 그 서정성에 대한 동의에 다름 아니다. 얼핏 보면 쉬운 문장 속에 역설과 아이러니와 상징의 무늬들을 효과적으로 구성해 놓음으로써, 그가 즐겨 다루는 강원도의 운무처럼 그의 작품 속 세계는 매혹적으로 혼효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독자들은 쉽게 읽고 재미있게 작품의 줄거리를 읽어 나가다가 순간순간 새로운 감정의 정화를 느끼게 된다.

 

날카로운 현실 비판

 

이순원의 소설은 또한 설득력 있는 현실 비판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요령 있게 현실 비판의 목소리를 낸다. 그가 보기에 온갖 악과 거짓 욕망으로 휘청거리는 현실은 순정한 개인의 진정한 욕망 충족의 방해물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개인이 지니고 있는 유년기의 기억 혹은 유년 시절의 꿈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그 시대를 장악하고 있던 현실적 폭력이기에, 그것은 응당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이순원에게 있어서 소설 쓰기란 허구적 욕망의 거품을 걷어내고 유년의 기억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예술적 행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 이순원 소개

 

상고를 1,2등으로 졸업하면 한국은행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1972년에 강릉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왼손잡이라 다른 아이들만큼 능숙하게 주판을 놓을 수가 없어서 이순원은 은행원이 되는 대신 고랭지 농사를 지어 돈을 벌기로 결심한다.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대관령으로 올라가 농군이 되지만 고된 농사일을 체력이 감당하지 못해 2년 뒤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그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눈부셨던 시절로 남아 있다. 앞으로도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고 한다.

 

1978년에 나온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까지도 소설에는 소설적인 문장이 따로 있는 줄로만 생각했던 그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통해 간명하고 정확한 단문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설 문장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순원은 1988년 「문학사상」에 「낮달」을 발표하며 데뷔 이후 왕성한 필력으로 문단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순원 문학은 작가가 비관주의자임을 명료하게 드러내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실현하는 것에 대한 비관이다. 이러한 비관주의는 부정적인 대상물을 찾아 극단적으로 부정적 요소를 과장하고 도드라지게 형상화하거나 역으로 작고 연약하고 위태로운 가치나 존재들에 대한 관심으로 형상화된다. 이순원의 작품세계는 「수색」연작들을 전후로 하여 성격을 달리하는데, 「압구정동」시리즈를 비롯한 「수색」연작 전의 작품들이 현실에 대한 발언의 수위가 높은 작품이고, 연작 이후의 작품들에선 구체적 삶의 체험과 내면세계가 밀도 높게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순원의 후기 작품들이 작가의 사적 체험을 소재로 하면서도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적 가치의 차원으로 확대시킨다는 것이다.

 

저자는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와 그 10년 후 속편 격인 『지금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통해서 일관되게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1편에서 자본주의의 타락한 욕망을 테러로 응징했던 저자는 속편을 낸 후 인터뷰에서 “나는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이 땅 천민자본 상류층의 끝간 데 모를 욕망과 타락을 연쇄살인의 형식을 통해 비판·경고했다.그러나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런 면에서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그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나는 여전히 혁명을 꿈꾸고 테러를 꿈꾼다.”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대 정동진에 가면」 등의 작품에서도 소외되고 연약한 존재에 대한 연민의 시선이 강하게 흐르며, 「순수」에서는 이같은 연민이 구체적인 사회적 발언을 입어 힘을 얻는다. 「순수」에서 40년전 잔칫날 동네 사내들이 혼사 주인공을 화제로 함부로 내뱉는 음담은 우리의 연약한 ‘누이들’에게 가해지는 아픔이 사회적 폭력의식의 깊은 뿌리를 갖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암시한다. 프랑스 로코코 시대의 음란상에 우리 사회를 빗대는 발언에서는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와 같은 맹렬한 목소리가 울려나온다.

 

그리고 가두어도 가두어도 비집고 나오고 또 갖고자 하면 저만치 달아나버리는 우리 내면의 욕망을 다룬 「수색」연작 이후로는, 우리 내면의 무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구체적 삶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최근작이며, 작가가 6년만에 내놓은 창작집 『첫눈』 역시, 말의 아름다움이 흩뿌리는 잔잔한 서정 안에서 현실의 아픔과 사회적 비극을 밀도 있게 그려내며 깊은 내면세계와 조응한다. 개인의 상처와 사회의 굴곡을 구체적 삶의 형상화를 통해 상기시키고, 따스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인의 아픔을 공유하고, 위로의 눈길을 건네고 있다.

 

창작집으로 『첫눈』, 『그 여름의 꽃게』, 『얼굴』, 『말을 찾아서』, 『그가 걸음을 멈추었을 때』 등이 있고, 장편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수색, 그 물빛 무늬』, 『아들과 함께 걷는 길』, 『순수』, 『첫사랑』, 『19세』, 『나무』, 『워낭』 등 여러작품이 있다.

 

출처 = 더스타일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종합지 -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