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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고난을 당해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엄무환 칼럼] 고난을 당해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고난을 당해 매우 힘들어 하는 분들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제가 장병들에게 고난을 주제로 설교한 내용입니다. 끝까지 한번 읽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난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이라는 단어조차도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고난이란 글자 그대로 괴롭고 어려움을 말합니다. 누가 괴롭고 어려운 인생을 살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고난이라는 단어가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삶 자체가 고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 고난이라는 먹구름이 자주 밀려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병이 들고 죽음이 찾아오듯이 고난도 우리 삶에 자주 찾아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난주에 살펴본 고통의 문제나 오늘 살펴볼 고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나 고난의 먹구름이 밀려오면 삶을 원망하거나 절망에 빠지는 경우가 일쑤입니다. 그리고 극단적 삶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이나 고난이 오히려 축복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고난이 축복이라구요?” 예 그렇습니다. 고난이 축복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비밀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고난을 이해하며 고난의 파도타기를 할 것인지를 말입니다. 이 비밀을 알게 되면 이제부터 고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게 다가오는 고난을 오히려 환영하며, 고난의 파도타기, 즉 서핑의 스릴을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고난이 축복이 되는 비결을 알려드리기 위해 여러분을 구약성경 룻기의 현장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인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흉년이란 비가 오지 않은 가뭄으로 인해 농사를 짓지 못해 식량을 얻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흉년이 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불거지겠지요. 그래서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라는 부부가 아들 둘을 데리고 모압이라는 나라로 이민을 갑니다. 모압은 요단강 건너 동쪽에 있는 나라로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나오미 가족이 우상을 섬기는 나라로 이사를 갔다는 사실은 먹고사는 문제로 인해 하나님보다 우상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건 분명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인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컸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를 가리켜 사사시대라고 하는데 사사시대의 특징은 사사기 21장 25절의 말씀처럼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즉 가나안 땅 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우상을 받아들이고 그 땅의 문화와 풍습을 받아들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적 가치관과 세상문화에 종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불행의 책임을 하나님 탓으로 돌렸습니다. 죄를 보지 못하는 시대요 영적 캄캄함이 이스라엘을 덮어버린 시대입니다.

 

저는 지금의 우리 시대도 이와 유사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각자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아주 농후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조차 성경이 어떠하다 해도 내 생각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질 않는 모습을 봅니다. 자기 생각이 하나님인 것이지요. 자기 생각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생각에 틀리다고 여겨지는 설교나 심지어 성경까지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은근히 비판을 합니다. 자기 생각이 진리요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경우엔 절대로 자신의 죄가 보이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소경이요 영적인 캄캄함에 덮여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든 것처럼 지금 우리나라도 경제적 어려움의 먹구름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이 땅에 드리우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가 찾아왔다는 징표입니다. 이땐 회개가 답입니다. 하나님에게 무릎 꿇어야 합니다. 내 마음 중심에 앉아 있는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 소경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고난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가르침입니다. 고난은 죄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은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내 안의 우상을 보게 하는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고난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시편기자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세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

 

왜 회개가 축복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안에 풍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흉년이 찾아오지만 하나님 안에 있으면 풍성함이 부어집니다. 하나님 안에 거할 때에만 평강이 주어집니다. 기쁨이 주어집니다. 삶에 풍성함이 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흉년이 찾아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3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준엄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15~18)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머니(money)의 유혹을 받아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최고야’하며 하나님 대신 머니에게 키스하고 머니에게 절하고 머니를 섬긴다면 망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아닌 자기를 기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세상 유혹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망하는 인생의 지름길입니다.

 

나오미 가족이 그러했습니다. 흉년이 왜 왔는지를 살피려 하기보다 흉년이라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모압 나라로 피신을 갔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생각과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는 모 회사 광고내용이 생각납니다. 지금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로 바뀌었지요. 선택이 내 신앙의 색깔을 드러냅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합니다. 나오미 부부의 선택은 신앙적인 기준에서 보면 빵점입니다. 매우 잘못된 선택입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런 경우 연속적인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혹 떼려다 도리어 혹 하나를 더 붙인다는 말처럼 고난을 피하려다 오히려 더 센 고난을 맞게 됩니다.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를. 나오미 가족이 모압 땅으로 이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인 엘리멜렉이 죽는 고난이 엄습합니다. 남편이 죽으니 나오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시엔 여자들이 맞벌이 할 일이 별로 없던 시대입니다. 나오미 가족이 베들레헴에선 그래도 비교적 유력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피신했지만 그곳에서 남편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흉년이라는 고난에 이어 남편의 죽음이라는 고난의 먹구름이 나오미의 인생에 밀려온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오미의 두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이라는 여자와 결혼했습니다. 두 여자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불신 여자와 결혼한 것입니다. 원래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에서 심판을 받을 때 겨우 두 딸과 함께 산 속에 숨어 살다가 두 딸이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 동침하여 난 아들 모압과 암몬의 후예들입니다. 이처럼 불륜관계에서 출생된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암몬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 23:3)고 선포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두 아들이 모압 여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이 규례를 어긴 것입니다. 이 규례를 어기면서까지 나오미의 두 아들이 모압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나오미 가족이 평생 모압 땅에서 살려고 작정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나오미가 두 아들의 배우자를 모압 여자를 선택한 것은 분명히 성경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피신을 선택한 것도 잘못된 선택이요, 두 아들의 배우자를 모압 여자로 선택한 것도 잘못된 선택입니다. 그래선지 결혼한 지 십년 쯤 되어 두 아들이 모두 죽습니다. 흉년을 피하기 위해 모압이라는 나라로 이사를 왔건만 그곳에서 남편이 죽고 이제 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나오미의 인생에 고난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밀려드는 형국입니다.

 

자식을 하나도 아니고 둘 모두 잃은 나오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너무나 고통스러워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 하라고까지 합니다. 나오미란 이름의 뜻은 “희락, 즐거움, 행복”입니다. ‘마라’란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인생이 고통스럽고 괴로웠다는 것이지요. 한 여자의 인생에 이와같이 연속적으로 고난이 밀려오면 어떻게 입가에 미소를 짓고 살겠습니까. 어떻게 두 다리를 쭈욱 펴고 잠을 자겠습니까. 절로 “아이구 내 팔자야”하고 탄식이 나오지 않을까요.

 

나오미가 이와 같이 올바른 신앙관을 갖지 못한 나머지 연이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그 당시 올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가르친 영적 지도자가 없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나오미 만을 탓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시대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비록 징계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징계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8)고 말합니다.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징계가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오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인생이지만 나오미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짐을 봅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지나가고 곡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그렇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인 나오미가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회복입니다. 이게 살 길입니다. 고난이 밀려올 때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고난이 극심할지라도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면 삽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유대 땅을 향해 길을 가다가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러자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미 곁을 떠납니다. 하지만 룻이라는 며느리는 상반된 모습을 보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놀라운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오미의 신앙을 보면 며느리에게서 이런 신앙고백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룻이라는 며느리가 개떡같은 나오미의 신앙을 통해 놀랍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본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룻에게 신앙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주권입니다.

 

신앙의 사람은 눈에 보이는 환경에 따라 처신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편에 섭니다. 룻의 고백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더욱이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이 고백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룻이 나오미 가정에 시집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징표입니다.

 

룻은 신앙같지 않은 신앙을 가진 시어머니였지만 그러나 그 시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룻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결과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보입니다.

 

나오미가 룻의 확고한 결심을 보고 함께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옮기게 됩니다. 룻의 이 선택은 대단히 중요한 선택입니다. 신앙적 관점으로 선택한 이 선택은 룻의 인생에 놀라운 삶의 결과를 갖게 했습니다.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 이 말은 룻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모압 여인 룻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되었고, 구약성경 룻의 주인공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녀는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습니다. 그러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축복받은 여인이 됩니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나오미 가정에 찾아온 고난이 룻에게는 축복의 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고난이 어떤 사람에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밀려올 때 하나님 편에 서십시오. 폭풍가운데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늘로 비상하십시오. 고난의 파도가 밀려올 때 하나님과 함께 서핑하십시오. 그러면 그 고난이 나에겐 축복의 문이 될 것입니다.

 

고난이 축복이 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시인인 미즈노 겐죠씨입니다. 겐죠 씨는 우리나라 뇌성마비 시인인 송명희 자매와 비슷한 분입니다. 1937년생으로 국민학교 4학년 때 이질에 걸려 고열로 뇌성마비가 와서 얼굴 부분을 제외한 상반신과 하반신 전체를 꼼짝도 못하는 장애우가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 앞에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옥 같은 하루하루입니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원망과 슬픔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겐죠 씨는 미야오 목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미야오 목사님께서 겐죠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합니다. 미야오 목사님은 끈기 있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차츰 마음 문을 연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헌신적인 어머니 우메지 여사가 일일이 성경 책장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다가 고린도후서 12장9절의 말씀을 통해 뜨거운 감동을 받게 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는 말씀입니다. 겐죠 씨는 이 말씀에서 엄청난 은혜를 받고 용기를 얻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위해 기도하였고, 시를 쓰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 그렇습니다. 말도 못하는 그였기에 벽면에 시력 검사 판처럼 일본 히라가나를 붙여 놓고 그 어머니가 한 자 한 자 짚어갈 때 그가 원하는 글자에서 눈을 꿈쩍이는 방법으로 글을 썼습니다. 이렇게 쓴 그의 시를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 여사가 선정하여 시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시집은 수많은 장애인과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미즈노 겐죠씨가 쓴 대표적인 시가 <괴롭지 않았더라면>입니다.

 

만일 내가 괴롭지 않았더라면 /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였을 것을

만일 모든 형제자매들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을

만일 우리 주님이 괴롭지 않았더라면 /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을

 

겐죠씨의 이 시는 일본 사람들의 가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고난이 축복으로 다가왔음을 보여준 그의 인생 승리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축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부활의 아침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어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어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이 교회도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고난을 당한 결과물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비록 잘못된 선택을 하여 겪은 고난이지만 그러나 그 고난이 결과적으로 룻에게는 엄청난 축복으로 다가왔습니다.

 

경제적 고난의 파도가 지금 우리나라에 밀려오고 있습니다. 아니 경제적 고난의 파도 뿐 아니라 더한 고난의 먹구름이 우리나라에 밀려올 수도 있습니다. 이 고난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근심을 갖게 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예상된 결과들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이 어떤 사람에겐 축복의 문이 되기도 합니다. 그 비결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는 그것입니다. 오직 그곳만이 안전한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해결책이 있으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성경이 고난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비밀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고난은 내 죄를 살피라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특히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회개의 메시지입니다. 동시에 고난이 누군가에겐 축복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룻이라는 한 여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룻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권면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고난을 당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핸드링 하셔서 축복의 인생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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