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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키지 마세요

[엄무환 칼럼]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키지 마세요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16절은 신구약 성경 전체 66권을 대표하는 요절로 복음에 관해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복음의 진수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 루터는 이 구절을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나 선명하게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심정으로 우리를 대하시는지를 알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이 한 마디에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복음이 사랑임을 천명하셨습니다. 즉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은 ‘사랑’이라는 샘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4장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4:7~8).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해석하는 열쇠는 요한복음 3장1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 한 구절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교통 정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구절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베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이 엄청난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성경을 모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에서 ‘세상’을 뜻하는 헬라어 ‘코스모스’는 ‘전 인류’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선민(選民=선택받은 민족)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 우월의식을 지녔지만 그러나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는 복음의 보편성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하자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오직 믿음’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은 무조건적이고 신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의 3인칭 단수 부정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그가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아가페’(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이 사랑은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사랑입니다. 그 아가페 사랑을 확실하게 증명해 보인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이처럼’입니다. ‘이처럼’이란 ‘극진히’, ‘너무나’의 의미입니다. 공동번역성경은 ‘극진히’라고 번역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사랑하사가 더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저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왜 입니까. 죄와 사망에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섭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와 같은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바울 사도는 그가 쓴 로마서 5장에서 이런 신앙의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도요한도 요한일서 4장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언급한 후 이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며 그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요한복음 3장16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 나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영혼의 구원은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너무나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반드시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영혼 살림'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1884년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 선교사를 조선에 보내셨습니다. 대한민국을 구원하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이 중국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를 보내셨습니다. 중국을 구원하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이 인도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윌리엄 케리 선교사를 보내셨습니다. 인도를 구원하기 위해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엄청난 사랑을 받아들이느냐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질투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34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성품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14절).

 

질투는 사랑을 거부할 경우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랑을 거부한다면 사랑한 만큼 질투가 당연히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는 개인이나 민족에겐 하나님의 질투가 부어집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한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그리스도, 즉 복음을 거부하자 하나님의 질투가 부어졌습니다.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선포하신 말씀이 이를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바 되리라”(마 23:37~38).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3:18~19)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서 이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가슴으로 누구보다 자기 동포인 유대인들에게 사랑을 전하길 열망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이처럼 바울사도는 비록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래도 자기 동포인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길 거부하자 마침내 발길을 돌리고 맙니다. 사도행전 13장에 이 장면이 소개됩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13:44~46).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 거부한 유대인들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질투는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A.D 70년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될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백 만 명의 인파가 예루살렘에 몰렸는데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그만 양식 저장 창고를 불태우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먹을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은 사람만 수십만에 이를 정도로 너무나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질투가 부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개인이나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거나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긴장감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작금의 우리 조국과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의 영적 상황을 한 마디로 진단한다면 위기의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민족이 바벨론 군대에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경우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킨 성전 안에 세워진 우상, 즉 혼재된 혼합주의 신앙이 그것입니다. 한국교회 안에 혼합주의 신앙, 즉 우상이 너무나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인 복음을 거부하는 모습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 대한민국 안에서도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심판과 유사한 일이 재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에 우리 조국과 한국교회의 영적 상황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는 것이 하나의 징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개인과 민족에겐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하는 일을 자행할 경우, 경고합니다!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개인과 우리 민족이 살 길이 여기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가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소금의 맛을 잃은 지 오래된 것 같아서입니다. 부디 제 생각이 사실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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