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04)] 75. 노르웨이(Norway)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04)] 75. 노르웨이(Norway)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Romsdalen 계곡의 Rauma 강). ⒞시사타임즈
▲(노르웨이 지도) (노르웨이 위) . ⒞시사타임즈
▲< 국기 >1821년 멜쯔너에 의해 제안,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 적, 청, 백 3색은 스칸디나비아국가들의 공통 색깔로 자유를 의미. < 국장 > 사자가 도기를 들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붉은 방패위에 왕관이 놓임. ⒞시사타임즈

  

< 국가 개관 >

노르웨이 왕국은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쪽에 있는 나라로 얀마옌 섬, 스발바르 제도, 부베 섬으로 이루어졌다. 동쪽의 스웨덴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북쪽지역은 남쪽은 핀란드, 동쪽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오슬로이다. 북극해와 바렌츠해와 접하고 있는 해안선은 피오르드로 아름답다. 국토의 대부분이 높은 지대여서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선사 시대 이후의 빙하 지형이 남아 있다. 석유, 천연 가스, 석탄, 목재, 해산물이 풍부하며, 대량의 수력 발전이 있다. 2011년 현재 세계 3위의 천연가스, 5위의 석유 수출국이다. 노르웨이 펀드는 현재 한화 650조에 달하는 세계 주식시장의 1%를 보유하고 있다. 6.25 때 의료단을 우리나라에 지원해준 우방국이다.

 

The Kingdom of Norway is a Scandinavian unitary constitutional monarchy whose territory comprises the western portion of the Scandinavian Peninsula, Jan Mayen, the Arctic archipelago of Svalbard and the subantarctic Bouvet Island. Rising nationalism throughout the 19th century led to 1905 referendum granting Norway independence. Norway maintains close ties with the union and USA. Norway has petroleum, natural gas, minerals, lumber, seafood, and hydropower. 

 

1. 국명(Country) : 노르웨이(Kingdom of Norway)

2. 수도(Capital) : 오슬로 (Oslo)

3. 면적(Territory) : 385,207㎢

4. 인구(Population) : 540만명

5. 국민소득(GNI) : US$75,000불

6. 언어(Language) : 노르웨이어(Norwegian)

7. 국경일(National day) : 1814.5.17(헌법 제정)

 

바이킹의 후예, 노르웨이

 

유럽의 최 북쪽

스칸디나비아 서쪽 

남북 사천리 가늘게 뻗어

겨울엔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나라

 

깨끗하다 피오르드 해안

정답구나 칠선녀 폭포

낭군은 언제 보나

 

바윗길 크셰라볼튼

묘하다 암벽 사이 바윗돌

뛰어도 끄떡없네. 

 

피오르드를 향해 툭 나온 바위

아찔하다 프레이케스톨렌

수직 절벽 삼천 척

 

노라, 인형의 집에서 나오네

세계 제일 여권신장 이루네

 

은색 도끼 든 사자여

우리 모두 노르웨이를 위하여 

진군하자 내일로!

 

그렇도다. 노래하리라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하리라…

 

Viking's Descendants, Norway

 

At Western side of Peninsular Scandinavia

In Northern tip of the Continent Europe

Stretching slimly 1700km south to north

Land of the white night in winter

 

How pure and clean, the fjord shore

How friendly, Falls Seven Sisters

How ardently they wish to meet their better halves

 

The rocky trekking way to Kjeragboltn

How queer, the rock between rocky walls

How safe, no move even when I jump on it.

 

A protrudent rock to the fjord

How dizzy, I am on Preikestolen rock

900m, the vertical cliff!

 

Nora having left home blindly

Making Norway nation of best woman right

 

Lion with a silver hatchet

Forward on all together

For tomorrow of Norway!

 

Surely yes, we shall sing

We will love this land forever~~~

 

 

1. 노르웨이 약사

 

현재의 노르웨이 땅에 사람이 거주한 흔적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륙 빙하가 녹기 시작한 선사 시대이다. 1만 년 전 오늘날 노르웨이인들의 조상은 순록을 비롯한 동물들을 사냥하며 북쪽으로 전진했다.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노르웨이의 바이킹은 대대적인 해상 원정을 벌였다. 노르웨이인의 후손이 아이슬란드에 뿌리를 내렸고 한때는 지금의 캐나다의 일부까지 이르렀다. 1000년 무렵 바이킹은 그린란드와 미국을 발견하였고, 기독교가 노르웨이에 들어갔다. 노르웨이 농민의 작은 집단이 차차 큰 정치적, 군사적 지역으로 모였다. 1164년 최초의 국왕을 맞이했고, 10세기 초 하랄 1세가 등장하여 국가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1015년 올라프 2세 성왕이 노르웨이 전체를 완전히 통일하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2세기에 걸친 바이킹의 습격은, 994년 왕이었던 올라프 1세가 기독교를 승인한 이후로 점차 줄어들었다. 1217년 호콘 4세가 즉위하여 내란을 점차 평정하고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1397년, 노르웨이는 덴마크-노르웨이에 흡수되었고, 이는 4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397년 포메른의 에리크 3세가 노르웨이 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도 겸하였다. 그는 1442년 폐위되었으나 이후로도 오래도록 덴마크 왕의 지배가 계속되었고, 종교 개혁 운동으로 1539년 크리스티안 3세는 노르웨이를 루터교로 개종시켰는데, 현재도 노르웨이 기독교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루터교 신자들이다. 

 

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가 덴마크에게 독립한 후인 1814년, 노르웨이인들은 노르웨이가 스웨덴에 할양되는 것에 반대했고, 노르웨이 왕국 (1814년)을 수립하고 새로운 헌법인 노르웨이 헌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노르웨이에 대항하여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전쟁을 했고, 결국 노르웨이가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에 들어와 스웨덴의 왕이었던 카를 14세를 섬기는 대신, 노르웨이의 독자적인 헌법을 유지시켜 주기로 합의했다. 19세기 내내 일어난 노르웨이의 독립에 대한 움직임은, 결국 1905년 노르웨이의 독립을 일구어 냈고,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의 종결을 이끌어냈다. 

 

1866년에서 1873년에 이르기까지는 제1기의 대규모 이민 시대로서 미국에 약 10만 명, 그리고 1900년∼1910년 제2기의 대규모 이민 시대로서 20만 명이 바다를 건너갔다. 비록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노르웨이는 중립국으로 남았지만, 전쟁 중에 많은 선박들이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5년동안 점령당했다. 이때 독일에 협조했던 비드쿤 크비슬링은 전후에 반역죄로 총살당했다.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은 노르웨이가 나치독일의 지배를 받을 때에 저항운동을 했다. 1949년, 노르웨이는 중립을 끝내고 NATO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인근 바다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된 뒤로, 노르웨이의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1972년과 1994년, 유럽 연합 가입 총선거가 치러졌지만, 두 번 모두 가입이 무산되었다. 1814년 헌법에 의해서 노르웨이의 기초가 섰으며, 입헌군주제로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49년에 NATO에 가맹하였고, 충실한 사회보장제도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1959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한국 전쟁 때는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야전병원 등의 의료지원을 하였다. 노르웨이는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고, 한국은 1994년 동계 올림픽 때 릴레함메르로 선수단을 파견하였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 수상을 위해 노르웨이를 방문하였다. 

 

 

2. 노벨 평화상

 

2. 노벨 평화상과 안중근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오바마,

 

노벨상은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경제학상 그리고 평화상 등 6개 분야가 있다. 이중 평화상은 노르웨이가 결정하며, 나머지 5개 분야는 스웨덴이 결정한다. 각 분야 공히 세계최고의 권위를 누구나 인정한다. 우리나라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게 평화상 수상자로 2000년도에 수여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노벨 평화상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1909년도당시 대한의군 안중근 참모중장이었다. 그의 동양평화론과 이토오히로부미 저격 14가지 이유를 보면 세계평화에 대한 그의 이론과 실천력이 노벨 평화상에 마땅히 수상되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일본이 강탈하여우리는 그의 업적을 노르웨이나 스웨덴에 전혀 알릴 길이 없었다. 나아기 그의 행위를 일본은 테러행위라고 왜곡 보도하고 사형에 처했다       

 

그 후에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 가장 먼저 평화상에 뜻을 두고 그에 근접한 사람은 1992년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었다. 그는 1) 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인류화합, 2) 중국, 동구권,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 소위 성공적인 북방정책으로 세계평화, 3)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공화국과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등 한반도평화 기여 등으로 노벨 평화상에 근접했으나, 12.12사태 책임과 쿠테타 등 반 민주적 행위로 수상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다음으로 평화상에 뜻을 두고 이에 근접한 사람은 1997년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었다. 그는 1) 대한민국 민주제도 정착에 대한 기여, 2) 남북관계 개선으로 한반도 평화에 기여 등으로 노벨 평화상에 근접하였으나,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첫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되어, 한반도의 평화가 정착이 부진하여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지 못했다.      

 

그  다음으로 평화상에 뜻을 두고 이에 근접한 사람은 2000년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그는 1) 대한민국 민주제도 정착에 대한 기여, 2) 소위 햇볕정책 등 남북 첫 정상회담 개최로 한반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드디어 한국인 최초로 노벨상의 평화상을 2000년도에 수상했다.

 

2000년 10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소식을 들은 김영삼전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로비로 DJ가 그 상을 탔으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DJ와 YS의 민주여정을 똑같게 높은 평가를 하고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YS의 노벨 평화상에 대한 그 지적은 전혀 공감하지 않고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2000년도 DJ의 노벨 평화상 선정으로 노벨 평화상의 권위가 한층 더 높아졌다고 평가한다. 나는 DJ의 평화상 수상을 1999년도부터 이미 100%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단독수상이 아니라 북의 김정일과 공동 수상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왜냐하면, 적대 관계에 있는 양 세력이 화해를 하고 평화에 기여하는 경우, 두 진영의 책임자를 그 해의 노벨 평화상 공동수상자로 그동안 예외 없이 선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DJ는 평화상 수상자로 적격하지만, 김정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이야 그의 아버지 책임이지 그의 책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가 비민주적으로 물려받은 권좌를 지키기 위해 많은 비인권적 조치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의 평화상선정위원회는 DJ와 김정일을 공동 수상자로 선정할 줄로 나눈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선정위원회는 엄밀히 심사하여 DJ만을 단독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나는 노벨평화상이 더 한층 권위가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나는 아프리카 지부티에 출장 중인 2009년도 10월에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벨평화상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평가를 내렸다. 왜냐하면, 오바마는 대통령에 취임한지 이제 8개월 밖에 안되어, 세계평화에 대한 어떤 공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게 평가하여, 신임 미국 대통령에게 세계평화에 대하여 큰일을 하라고 격려하는 것이고, 혹평한다면 미국 대통령에게 아부를 한 것이라고 나는 평가한다. 그리고, 실제로 오바마 대통령은 그가 재임한 8년 동안 미국의 의료보험체계 개선 등 국내 실적은 있다 해도, 한반도 평화 등 세계평화에 대한 공적은 낙제 점수였다고 나는 평가한다. 2000년에 YS가 노벨 평화상에 대한 그러한 평가를 20009년도에 했다면, 나는 YS를 더욱 깊게 존경했을 것이다. 설령, DJ가 로비를 해서 그 상을 수상했다 하더라도 전임 한국 대통령으로서 그런 발언은 삼가해야 맞다. 그리고, 어디 노벨상이 로비에 의해 좌우되는 상인가? 단지 어느 나라든지, 자국의 인사가 노벨상이 수상되도록 적절한 설명이나 홍보를 개을리 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동안 국제협력분야에서 40여년 동안 활동하며 많은 국내외 인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교류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 인사 중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만한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사랑해, 톤즈!’로 유명한 이태석 신부는 유명을 달리 했으니 그렇다 치고,  우선 1) 22년 넘게 분쟁지역과 오지를 다니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 보듬고 흑백사진으로 세계인에게 전하는 박노해 시인, 2) 에스와티니에서 ‘꼬꼬 할머니’라 불리며 주민들과 23년 넘게 동고동락하는 김혜심 약사, 3) 말라위에서 ‘시시터 백’이라 불리며, 31년 넘게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구하려고 혼신을 다하며, 병원과 간호대학을 설립한 백영심 간호사, 4) 세계평화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지구를 526동안 한 바퀴 발로 뛰어달린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등 참으로 많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할 자겨과 업적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가 문제투성이의 두 지도자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여, 북미회담을 성사 시키고, 남북정상회담을 여러 차례 열고, 능라도 운동장에서 열광하는 평양시민 15만 명 앞에서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한반도평화와 평화통일의 비전과 방향를 제시할 때, 나는 뜨거운 박수와 존경을 보내며, 노벨평화상은 차려 놓은 밥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 연설을 했을 뿐, 그 다음의 조치는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없었다. 그의 약속을 기다리다 못해 북은 급기야 우리의 재산인 남북연락사무소를 보란 듯이 폭파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나의 존경의 최상위 리스트에서 문재인이라는 이름을 지웠다. 그가 심기일전하여 능라도 연설할 때의 그 위상을 되찾기에는 불행이도 그에게 시간이 별로 없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일 수가 있다. 그가 좌고우면하지 말고, 그가 평양시민 15만명 앞과 전 세계인의 귀와 눈을 집중시킨 가운데 약속한 것만, 8천만 한민족의 앞날만 생각하여 실천해 나가기를 나는 충심으로 기원한다. 그러면 그도 다시 한 번 나의 존경자 리스트에 복원되고, 노벨 평화상 후보에 거명될 것이다. 그 길이 촛불혁명으로 그 자리에 앉은 그의 책무이고 8천만 한민족의 준엄한 명령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 (박노해 시인) . ⒞시사타임즈
▲(어린이와 김혜심 약사) . ⒞시사타임즈
▲(말라위 학생들과 백영심 간호사) . ⒞시사타임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 ⒞시사타임즈

 

 

 

3. 노르웨이 풍경

 

▲(노르웨이 왕궁, Oslo) . ⒞시사타임즈
▲(Oslo 전경) . ⒞시사타임즈
▲ (Bergen 전경) . ⒞시사타임즈
▲(Trondheim 전경) . ⒞시사타임즈
▲(노르웨이 농촌 풍경) . ⒞시사타임즈

 

 

(76번째 우크라이나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 iysong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