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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09)] 77. 캐나다(Canada)-4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109)] 77. 캐나다(Canada)-4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4. 내가 만난 사람 (3)

(문홍순, 박민서, 양형란)

 

▲(CN타워가 보이는 온타리오 호수섬에서 장재희 양형란 박민서 김통영 문홍순 김진원). ⒞시사타임즈


박민서가 모친 문홍순, 아내 양형란과 조카 장재희와 같이 토론토에 1994년 8월에 나를 보러 왔다. 뉴욕에 거주하는 김진원과 김통영도 마침 그때 나를 찾아 왔기에 우리는 같이 여행했다. 박민서는 수재로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적성이 맞지 않는지 3학년을 마치고 군복무를 필한 후 다시 서울대 입학시험을 거쳐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당시는 서울대에 몇 명 입학했느냐에 따라 명문고를 정하기 때문에 전주고가 대한민국 페스트5에 꼽히는데 나름 기여를 했다. (주)선경에 입사하여 차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민서는 기타도 수준급이어서 공대 화연회를 이끌었으며 연주회도 여러 차례 가졌다. 고교시절이나 대학 때 가끔 그를 만나면 그의 기타 반주에 맞춰 우리는 밤새워 노래했다. 그는 모친을 닮아 여행을 매우 좋아 했는데 중매로 만난 부인 양형란도 취미가 똑 같아 둘이는 세계에서 알아주는 여행부부이다.

 

▲ (한라산 백록담에서 박민서 가족과, 1995.7). ⒞시사타임즈


그는 결혼 후 주말이면 꼭 텐트를 가지고 삼천리 반도를 누볐다. 나도 가끔 동행했다. 우리 가족은 몸만 따라가서 밤에 노래만 같이 불러주면 된다. 차량, 먹거리, 텐트는 다 그가 준비했다. 내가 한국에 가면 그들과 여행을 하곤 하는데 지금도 모든 준비는 그의 몫이고 나와 아내는 몸만 따라 나선다. 지금은 애들이 커서 따라 다니지 않고 이제는 나와 민서 부부 네 명만 다닌다. 그는 또한 투망에도 소질이 있어 여름철이면 그가 투망으로 건진 즉석 물고기 매운탕은 천하 일미이다.
 

 

1995년에 민서의 어머니, 처, 아들 형석, 딸 선영 그리고 나와 아내 7명이 제주도에 갔다. 차를 렌트하여 제주도를 일주하고 마라도도 다녀왔다. 그리고 한라산을 등반하려 하는데 아내가 자기는 힘이 드니 혼자 호텔에 있겠단다. 그러자 문홍순 여사가 아내를 혼냈다. 72세인 당신도 백록담 등반에 기꺼이 참가하는데 40도 안된 아낙이 무슨 나약한 말이냐고 일갈하여 겨우 아내도 같이 한라산 등정에 나섰다. 쉬엄쉬엄 드디어 7시간 만에 백록담 정상에 우리는 올라섰다. 아내도.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 아내는 발이 풀려 나의 팔을 붙잡고 반은 나의 등에 업혀 내려왔다. 그러나 아내는 민서 어머니의 설득 덕분에 한라산 완등이라는 평생의 좋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민서는 어머니와 장모를 모시고 국내여행은 물론 해외여행도 잘 다니는 효자이다. 2011년 7월에는 페루에서 민서 부부를 만나 3주 동안 남미 일주 여행을 했고, 2012년 7월에는 필리핀에 찾아와 우리 두 쌍은 필리핀 세부 섬과 루손 섬을 일주했다.

 

부전자전. 그의 아들 형석이도 K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더니 2학년을 마치고 군복무를 필한 후에 다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레지던트 3년차 수련의이다. 딸 선영이는 행정 고시를 준비하다가 로스쿨을 나와 촉망 받는 변호사로서 현재는 법무법인 법승에 근무중이다.

 

민서 어머니는 일본 동경에 유학한 신여성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 여행도 많이 하고 활달한 성품이다. 그런데 세월에 장사가 없는지 91세 되던 20151년부터는 기억이 흐릿해졌단다. 아직 발의 힘이 좋아 어디든 갈 수 있는데, 기억을 잘 못 한단다. 우리 친구들 모임에 불효자모임이 있다. 김해강 회장, 최규원 부회장, 오승재 재무, 황의돈 섭외, 박민서 회원 그리고 내가 총무이다. 불효자 순서로 중요한 보직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회원자격은 엄격하여 ‘85세 이상 된 부모를 갖은 자로,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1%도 못 갚은 자’만 가입할 수 있다. 박정래는 자기는 불효자가 아니라면서 회원을 탈퇴했다. 그는 효자이다. 형제가 많지만 어머니 생계비를 굳이 혼자 감당한다. 부모의 은혜를 3%나 갚고 있다.

 

민서 어머니 기억이 더 나빠지기 전에 우리는 뜻을 모아 다음과 같이 ‘장한 어머니상’을 2015년 8월에 수여했다. 민서에게는 2명의 누나와 두 여동생이 있는데 모두가 8등신 미모에 하나 같이 수재로 명문 J여고와 명문대를 졸업하였다. 당시 전주에서는 ‘최진사댁 셋째 딸’이 아니라 ‘박원장댁 셋째 딸’이 유행하였으며 그 집의 사위가 되는 것이 성공 인증 샷이 되었다.

 

표 창 장

성명 : 문홍순 성도(1925.8.2생), 소속 : 전주 성당, 대한민국

위 분은 평소 하나님께 영광되게 믿음 생활을 하시면서

다섯 자녀(계영, 춘녕, 민서, 태영, 근영)를 모두

 성실한 대한건아로 양육하셨음은 물론

지역사회에서 선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모범을 보여 오셨으므로 이를 기려 “오늘의 어머니賞”을 드립니다.

2015.8.2

Korea International Agency for Parent Love

 

 

4. 캐나다의 생활

(캐나다의 여가 생활)

 

▲(아파트 수영장에서 송규영,1993.5). ⒞시사타임즈


캐나다는 겨울이 11월에 시작되어 4월까지 이어져 길고 춥다. 봄, 여름, 가을은 짧다. 위도가 몽골 울란바토르와 같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겨울에도 할 일이 많다. 스케이트, 스키, 수영이다. 겨울에 웬 수영이냐고?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아파트에도 시설이 잘 갖추어진 실내 수영장이 있다. 어떤 날은 수영, 스케이트, 스키까지 세 가지 운동을 다 할 때도 있었다. 스케이트장은 우리 집에서 가까이에 있는 노스욕 시청 광장에서 24시간 무료로 개장했다. 스키장은 10분 거리 시내에도 있었고 1-2시간만 가면 큰 스키장이 있었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조흥은행 이재준 부장 가족과 같이 스키 수영 스케이트 그리고 골프를 같이 했다. 이정호와 송규영은 스키 스케이트 수영의 단짝이었다. 우리들에게는 겨울이 춥지 않았고 길지 않았다.

 

▲(캐니다 스키장에서, 1994.1). ⒞시사타임즈
▲(캐나다 3만섬에서, 이재준 신한은행 김재준 부장 가족과, 1994.5). ⒞시사타임즈


4월 초순이면 골프장이 개장을 한다. 토론토 근교에 골프장만 350개 있다. 나는 30개 정도에 가서 운동을 했다. 11월 중순까지는 운동을 할 수 있다. 그러니 골프와 스키를 번갈아 하다보면 금세 1년이 흐른다. 또한 연중 볼만한 전시회 공연이 상시 있다. ‘오페라의 유령’을 관람한 것도 토론토 근무시절이다.
 

 

토론토 시내, 근교, 빛나는 호수 온타리호 주변, 우르릉꽝꽝 나이아가라 폭포, 밴프쟈스퍼 공원, 요호공원, 알공킨 공원, 빅토리아섬 등 여행지가 끝이 없다. 하긴 대한민국의 100배 땅덩어리이니 그 정도야 기본 아니겠는가? 여행 좋아

하는 나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2년 만에 그곳을 다 가봤다.

 

(캐나다에서의 재판)

 

내가 도착하여 1달 만에 자동차를 큰맘 먹고 구입했다. 처음에는 소나타를 구입하려했지만 국산차는 서울에서 살 수 있으니 관세가 없어 그리 비싸지 않은 크라이슬러 다이너스티를 구입했다. 3800cc에 3만 불을 준 것 같다. 그날 밤 기분이 좋아 가족과 같이 외식을 하고 집에 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경찰이 제지하더니 좌회전 금지에서 좌회전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좌회전이 비보호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된 점을 고려하여 선처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2주 뒤에 벌금 100불과 벌점 8점 통지서가 왔다. 나는 정식 재판을 택했다. 잘 못했다 하더라도 계도하면 그만이지 야박하게 웬 벌금이람? 큰 나라답지 않게 시리……. 하면서.

 

재판 날에 그 경찰관이 안 나오면 그 사실을 부정하면 내가 이긴다고 어느 교민이 나에게 귀띔해 줬다. 그런데, 원수의 그 경찰관이 나보다 더 먼저 와 있었다. 나는 좌회전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판사는 내 말을 반신반의하겠지만 저 경찰관은 내가 거짓말하는 것을 알게 아닌가?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은 다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경찰관의 말을 다 시인했다. 그러자 판사가 그런데 왜 불복하고 재판을 신청했느냐고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토론토에 온지 얼마 안 되는 자라서 이곳 사정을 잘 몰라 우리나라 교통법규에 따라 운전했으니, 저 경찰관이 나를 제지한 것은 좋으나 정상을 참조하여 계도하는 것이 올바르지 벌금을 먹이는 것은 너무 과한 법집행 같아서 이곳까지 오게 되었으니 판사의 선처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판사는 냉정한 법리가였다. “집행은 정당하다. 벌점 8에 처한다. 다만 신청인이 이곳 실정을 모르는 외국인이고 처음 과오를 범한 것을 참작하여 벌금은 면한다.”라고 판시하였다.

 

경찰관이 법정을 나오면서 나에게 물었다. 판결에 만족하냐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의아해 했다. 나는 지금까지 벌점이나 벌금을 받은 적이 없는데 이번 벌점 부과로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그가 내 면허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나는 며칠 전에 새로 나온 캐나다 면허증을 보여주었더니 문제없다는 거였다. 왜냐하면 자기가 단속할 때에는 내가 국제면허증을 제시했기 때문에 재판기록도 국제면허증만 명시되므로 새로 발급 받은 캐나다 면허증과는 상관없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만족한다고 하며 우리는 함께 웃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토론토에 막 도착한 이주자들에게는 법을 적용하되 처음에는 계도 위주로 하고 벌금 부과를 자제하여 그들에게 따뜻한 인상을 주라고…….

 

(퀘벡 두물머리 강가에서)

 

▲(맘씨 좋은 퀘벡주 두물머리 Deux-Rivieres 할머니와) . ⒞시사타임즈


1992년 8월, 우리 가족은 캐나다 동부로 여행을 떠났다. 토론토를 떠나 오타와를 구경하고 몬트리올에서 2박을 하며 관광하고 퀘벡으로 향하다가 날이 저물어 두강이 합류하는 소도시 두물머리(Deux-Rivieres)에서 1박 하려고 주변 호텔을 다 둘러봤으나 만원사례였다. 저녁을 먹고 나니 9시가 훌쩍 넘었다. 
 

 

나는 지나가는 마음 좋게 생긴 나이 60은 넘었을 할머니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어디 방이 있을 만한 호텔을 물어보니 없을 거라 했다. 나는 야영장 위치를 물었다. 텐트를 가지고 갔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불어로 알려주니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도 답답했는지 입구까지 안내해줄 테니 자기 차를 따라 오란다. 야영장 입구에 오니 비가 제법 뿌렸다. 고맙다고 할 때 우리 애들이 뒷좌석에서 따라 고맙다고 했다. 할머니는 애들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애들을 유심히 보더니 “애들도 있고 이렇게 비가 오는데 언제 텐트치고 자겠느냐.”며 자기 집으로 가잔다. 사양하는 나에게 한사코 가자고 하기에 못 이기고 따라갔다. 

 

집은 야영장에서 멀지 않았고 큰 2층집이었다. 나는 당연히 방 하나를 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2층으로 안내하더니 전망 좋은 큰 방을 우리 부부용으로 또 애들에게도 방 하나씩을 내주는 것이 아닌가? 방들은 모두 깨끗하고 고급스러웠다. 사연을 들어보니 할머니에게는 출가한 딸만 하나 있는데 그 딸에게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으며, 파리에 살고 있단다. 1년에 두 세 차례 오는데 이 위층이 딸 가족이 올 때 사용하는 방이란다. 궁궐 같은 방, 침대에서 피곤했던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튼을 젖히니 정원이 장난이 아니며 아래 두 강의 풍경이 양평 수종사에서 보는 두물머리 풍경 같았다. 세조 때 어느 시인은 수종사에 올라와서 그 풍경을 보고 천하 제1경이라 썼다는데 나는 그에게 이곳에 와 봤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할머니는 우리의 인기척을 들었는지 내려오란다. 아침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갓 구운 빵, 갖가지 손수 만들었다는 고급스런 잼에 우리가 내려가니 오믈렛을 또 즉석에서 만들어 주었다.

 

아침을 먹고 할머니가 준 목제 레고를 갖고 놀며 아이들은 정신이 나갔다. 내가 준비하고 떠나자고 해도 아이들이 레고에 정신이 팔려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 할머니가 하룻밤 더 자고 가라했다. 그곳 경치가 좋아 그러고도 싶었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휴가가 짧아 그럴 수 없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레고를 상자에 담아 아이들에게 선물하였다. 나는 손자들이 오면 찾을 텐데 하며 사양했지만 한사코 주었다.

 

▲(맘씨 좋은 퀘벡주 두물머리 Deux-Rivieres 할머니의 집에서, 1992.8) . ⒞시사타임즈


꿈같은 하룻밤이었다. 우리 내외는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말과 주소를 적어오고 할머니에게 “토론토에 꼭 한 번 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밖에는 달리 사례할 방법이 없었다. 그 후 할머니와 편지는 서너 차례 주고받았는데 끝내 할머니는 토론토에 오지 않았다. 물론 그 뒤 만나지도 못하였고 편지도 끊긴지 오래다. 프랑스 이름이라 어려워 이름도 잊었다. 그저 그 곱던 얼굴만 아련히 기억난다. 우리 집 어딘가에 그때 찍었던 사진과 비디오 필름이 있을 것이다. 언제 한 번 시간 내서 찾아볼 생각이다. 지금은 80이 훌쩍 넘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고운 귀품은 여전하겠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꼭 한번 다시 그곳에 가서 그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 꼬옥…….
 

 

우리는 그길로 P.E.I주의 주도인 샤롯 타운에 갔다. 섬은 영국 에드워드 왕자가 방문한 이후 섬 이름을 아예 P,E.I로 바꿨단다. P.E.I주는 캐나다 10개주 가운데서 가장 작은 주이며 주 수도인 샤롯타운은 조그마한 도시이나 관광객은 줄을 잇는다. 풍경도 아름답지만 뮤지컬 ‘빨간머리 앤’공연을 보러 오기 위해서다. 입장료는 보통권이 120불로 비쌌다. 어린이 입장권은 아예 없었다. 그때 아영이는 유치원생 규영이는 2학년이었다. 캐나다에 온지 몇 달 안 되었으니 이해도 못할 거였으나 어쩔 수 없이 480불을 주고 4매를 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우였다. 우리 내외는 그저 무대를 쳐다봤으나 애들은 다른 관객들과 같이 꺄르르 꺄르르 따라 웃으며 재밌게 보는 것 아닌가? 공연이 끝나고 나오는 길에 뮤지컬 ‘빨간머리 앤’ 테이프를 하나 샀다. 나는 그 테이프를 자동차 안에서 틀었다. 휴가가 끝날 쯤에는 애들이 그 안에 담겨진 노래를 다 외었다. 480불이 아니라 4,800불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롯타운은 ‘빨간머리 앤’ 뮤지컬 공연뿐만 아니라 그 소설 배경을 그대로 조성해 놓았다. ‘빨간머리 앤’이라고 도시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겁 없는 양학선 밴프쟈스퍼 공원을 날다)

 

▲(캐나다 밴프 공원, 1993.7)). ⒞시사타임즈


1993년 7월에 캘거리 밴프쟈스퍼 공원에 갔다. 물론 가족여행이다. 밴프쟈스퍼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차 지붕에 자동 셔터를 누른 비디오카메라를 달고 그저 달리기만 해도 어느 명감독 작품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실감 난다. 우리나라를 포함 세계 도처 방방곡곡이 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신비롭다. 그러나 아름다움에도 급과 격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밴프 쟈스퍼의 청정함, 수려함, 광대함, 장엄함, 상
쾌함은 다른 어디에 지지 않는다.

 

▲(내가 아영이를 안고 날은 반프공원의 돌다리 Stone Bridge, 1993.7)). ⒞시사타임즈


그 어디쯤에 스톤브리지(돌다리, Stone Bridge)가 있다. 커다란 계곡에 물이 퀄퀄 흐르는 곳에 병풍바위가 다리처럼 길이 30m쯤, 수면 위 높이가 15m쯤, 폭이 5m 쯤 되는 데 딱 중앙만 1m쯤 벌어져 있다. 나는 아영이를 안고 그 위를 걸었다. 아내를 포함 많은 관광객이 걱정스런 듯이 보며 나에게 돌아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돌다리 중앙에서 아래를 보니 계곡물은 급물살이었다. 나는 중앙에서 서 있다가 순간 저편으로 뛰었다. 아영이를 안은 채. 나는 뛴 순간 ‘어 떨어지면 죽는데…….’ 하는 생각이 퍼뜩 들며 몸에 전기가 파르르 하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1m 저편 바위로 양학선 선수가 도마에서 회전하며 착지하듯 착지했다. 아니 착암했다.
 

 

‘휴…….’ 아래로 내려와 말 없는 아내와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아내는 2-3시간 아무 말도 없었다. 나는 그저 내 무모한 행동에 화가 나서 그러려니 했는데……. 아내는 두렵고 떨려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반죽음 상태였다. 아내는 다음 날도 말이 없었다. 밴프쟈스퍼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밴프쟈스퍼 국립공원에 다시 가야 한다. 그 아름답고 청정하고 수려한 곳으로. 아내가 전혀 보지 못하였으므로 아내를 위하여. 그러나 그곳에 가도 이제는 돌다리를 아영이를 안고 다시는 뛰지 않겠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아영이는 이제 아내보다도 훨씬 크지 않은가? 아영이도 이제 강유주(康瑜株)의 엄마가 되었다. 진짜 양학선이라면 장성한 딸을 안고 그 돌다리를 뛸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아영이의 딸 강유주도 안고 뛸 수 없는 고희(古稀)라던가 불유구(不踰矩)의 나이가 되었다.  

 

꼬마 아영이를 안고 뛰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하나님, 그 시절을 돌려주세요!”

 

▲(송아영과 강유주, 2021.4.20.). ⒞시사타임즈


 (78번째 나라 미국 이야기로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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