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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6)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6)

강명구 일병 구하기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달릴 때 나는 무아의 지경에 빠진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내가 몇 시간이나 이렇게 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때가 있다. 다만 목마름과 허기짐 하늘의 태양 위치가 시간을 알려줄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기에 몰입하고 있을 때 기쁨이 물밀 듯 몰려든다. 내가 지금 달리고 있는지조차 잊는 시간에는 달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되고 만다. 그러나 일단 내가 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피로감과 고통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 되고 만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데도 발걸음은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옮겨졌다. 보폭은 한석봉의 어머니가 어둠 속에서도 가래떡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썰 듯 나의 보폭도 자로 잰 듯 일정하게 대지를 밟는다. 이럴 때면 생명이 가득 찬 육신은 고무공처럼 가볍게 통통 통 튀며 환희에 넘친다.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의 순간이 된다. 이제 비로소 자연과 교통하는 감각이 열리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마음의 문이 열린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아기들에게 먹고, 자고, 싸는 문제는 제일 중요한 일이다. 길거리에 나서니 지금 내가 딱 그렇다. 어디서 하룻밤을 자고 또 어떤 음식을 제때 먹고 잘 싸는가가 제일 중요한 하루 일과이다. 매일 숙소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샤워한 다음에 다음날 갈 곳을 찾아보고 그곳에 숙소가 될 만한 곳이 있나 검색하는 일이다. 40에서 50km 정도의 숙소를 검색한다.

 

일요일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슈퍼마켓까지 문을 닫아서 자칫 잘못하면 하루 종일 굶는 일이 발생할 수가 있다. 토요일 슈퍼마켓에서 우유 몇 병, 오렌지 주스, 그리고 우리나라의 동그랑땡 같은 것하고 감자 샐러드를 사서 담았는데 일요일은 다행히 식당을 제때 만나서 그 음식이 그대로 남았다. 월요일에 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서 안 버리고 가지고 다니다 2시가 다 되도록 점심 먹을 곳을 찾지 못해 우유를 한 모금 마시다 시큼하게 상해서 그대로 버렸고 동그랑땡은 괜찮은 것 같아서 다 먹어치웠다. 뭐 좀 먹으니 다시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식사를 식당에서 해결하는 일은 독일에 들어와서부터 꺼리게 되었다. 더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었지만 피곤한 육신이 마음을 바쁘게 만들었다. 식당에 들어가면 종업원이 메뉴판 가져다주는데 십여 분, 다시 와서 주문받는데 십여 분, 주문받아서 나오는데 2, 30분은 걸려서 참을성 없고 빨리 달리기를 마치고 그 시간에 쉬어야 하는 나로서는 어울리는 장소가 아니다. 오늘은 식당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은지 20분이 넘는 것 같은데 종원이 주문을 받으러 올 생각을 안해 몇 번을 불렀는데도 잠깐 기다리라는 소리만 한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의 편의점으로 들어가 빵과 우유를 사들고 나왔다.

 

독일에서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분명히 다르게 흘렀다. 그저 햄버거나 피자, 중국 음식 같은 패스트푸드를 주문해서 먹는 것이 제일 맞는데 그런 곳은 많지가 않다. 그야말로 큰 도시나 가야 있다. 그래도 저녁은 식당을 찾아가서 참을성 있게 잘 먹었는데 자려고 자리에 눕는 순간부터 밤새도록 화장실에 다녀야 했다. 낮에 먹은 우유와 동그랑땡이 문제였던 것 같다.

 

내가 맛을 탐하는 식탐가(食貪家)는 아니지만 독일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저 우리의 족발과 같은 슈바인 학센과 우리가 함박 스테이크라 부르는 것 그리고 우리가 돈까스라고 부르는 슈니챌을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 자우어크라우트를 함께 먹으면 그럭저럭 먹을만 하다. 햄버거는 독일에서 유래된 음식이다. 19세기 독일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흔히 말하는 함박 스테이크, 즉 '햄버그스테이크'가 함께 넘어간다. 이 명칭은 함부르크식이라는 뜻에서 "함부르거(Hamburg-er)" 라고 명명한 것이 시초이다. 이 햄버그스테이크를 빵에 끼워 팔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흔하게 먹는 음식이 된 것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역마차는 15세기에 처음 생겨났다고 한다. 일반 시민이 마차를 소유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시대에 역마차가 등장하면서 보통시민들도 여행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때부터 여행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고 보면 된다. 이 역마차의 하루 이동 거리가 45km 정도라 하니 내가 역마차 하루 이동 거리를 매일 이동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시외버스처럼 도시마다 일정한 역이 있어야 하는데 그 장소를 포스트(Post)라고 불렀다. 그 포스트가 있던 장소에 지금도 호텔이 있고 식당이 있다. 독일의 호텔은 거의 아침을 제공한다.

 

포스트는 현대의 역과 안내소, 우체국, 화물취급소, 식당, 호텔 등을 겸하게 되었다. 옛날에 포스트 여관이었던 호텔은 지금도 포스트 호텔이라는 상호를 그대로 쓰고 있다고 한다. 포스트 호텔은 근대적인 호텔은 아니지만 옛 정취와 멋을 그대로 보여준다. 역마차는 편지도 운반하게 되었는데 현재의 우체국 전신(前身)이기도 하다. 숙소를 찾는 일이 일과를 마치고 하는 어려운 일 중에 하나지만 약간의 어려움은 겪었지만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나는 며칠씩 방을 예약하지 않는다. 무슨 상황이 발생하여 일정을 변경하여야 할지도 모르고 몸의 상태를 보아가며 약간의 거리도 조절하기 때문이다. 하루 전에 예약한 티엔도르프의 호텔까지 갔는데 예약은 내일로 되어있고 오늘은 방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약을 취소할 수 없으니 방값은 내고 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달리다 보면 시간이나 날짜는 아무 의미도 없어지기 마련이다. 분명 내가 실수한 일이지만 잠도 자지 않은 방을 요금은 다 내고 가라니 그것도 황당하지만 작은 마을이라 주위에 다른 호텔도 없다.

 

말싸움해봐야 소용도 없고 그럴 기운도 없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이 서독과 비교되는 일들이다. 나와서 조금 걸어가니 고속도로 옆이라 맥도날드가 있다. 거기서 일단 허기를 채우고 날이 저물면 이 근처에서 야영하려고 SNS에 상황을 올렸다. 한국 시각으로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한인네트워크가 가동돼 ‘강명구 일병 구하기’에 나섰다. 우선 세계한인회장단 회의 참석차 한국에 가 있는 박선유 재독한인회장이 연락이 와서 조치를 취해 줄 테니 맥도날드에서 움직이지 말라고 해놓고 독일의 연락망을 완전가동시킨 모양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한국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독일의 정진헌 박사, 미국에 있는 친구, 태국에 있는 아내까지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바쁜 움직임으로 방과 캠핑 장소 그리고 커뮤니티센타까지 샅샅이 검색하고 아는 사람 연락망을 총동원하는 기동력을 보였다. 그렇게 두어 시간 부산하더니 바로 정진헌 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드레스덴에 사는 교민이 차로 맥도날드까지 가서 나를 태우고 집에 가서 재우고 다음 날 아침 그 자리에 다시 내려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적지에서 구출된 강명구 일병은 눈물이 핑 돌도록 가슴이 뭉클하여 차를 타고 드레스덴의 신중욱씨의 집으로 갔다. 집에 갔더니 하얀 쌀밥에 김치만 보아도 감격을 할 터인데 콩나물국에 참치구이와 소고기구이를 겸한 푸짐한 저녁 식사까지 하는 호사(豪奢)를 누리게 되었다. 2남 1녀를 키우는 다복한 독일의 한인 가정에서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며 하룻밤을 보내는 아름다운 밤을 선물로 받았다. 대부분의 다복한 가정의 사람등이 누리는 따뜻하고 아늑한 저녁 시간이었다.

 

내가 홀연히 길을 나섰을 때 풍찬노숙(風餐露宿)에 돌베개를 베고 자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마음의 다짐을 하고 출발하였다. 나는 온갖 낯설음에 매료될 준비가 되었다. 알아서는 안 될 욕망을 쫓아 발정 난 수캐처럼 온갖 낯선 것들과 질펀하게 사랑을 나누고 올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그것이 설령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줄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나는 혼자 달리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수많은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나를 염려하여 주었지만 내가 체력이 다하여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면 통일의 발걸음을 멈추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리라.

 

다음날 다시 어제 마친 맥도널드 앞까지 가서 달리기 시작했다. 엘베강을 품은 드레스덴은 14세기 베틴 왕족이 다스리는 섹소니 왕국의 수도로 17세기와 18세기에 최고의 번영을 누리던 곳이다.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도시로 예술과 음악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전파되었다가 통일 후 다시 명성을 찾아가고 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아름다운 엘베강 위의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넌다. 드레스덴은 ‘강가의 숲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슬라브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슬라브 민족이 살던 곳에 독일인이 이주해와 마을이 시작되었다.

 

어느 도시나 뒷골목에는 비주류의 어두운 삶의 그림자가 덮혀있다. 중세 유럽도 마찬가지이었다. 시민과 비시민이 존재했다. 거지와 도살업자. 광대, 장의사, 유랑악단, 망나니, 매춘부, 변소 치우는 사람, 유대인, 그리고 나병 환자, 간질병 환자 등이 여기에 속했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발각되면 대부분 불에 태워지는 중형을 받았다. 광장에서는 공개 처형이 일상적으로 행해졌고 이것은 좋은 구경거리 중의 하나였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러시아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이곳의 엘베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설정하였다. 종전을 3개월 앞두고 러시아의 끈질긴 요구로 영국군은 드레스덴에 대대적인 폭격을 한다. 그리고 미군이 마지막 공습을 가해 도시의 모든 것은 파괴되고 만다.

 

왕관 모양의 크로넨 문이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츠빙거 궁전 위로 지는 독일의 가을 석양은 눈이 부셨다. 참 바보짓을 한 것이 극적으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 잘 자고, 잘 먹고, 다음날 색깔도 좋게 잘 쌌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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