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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8)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8)

발바닥으로 연주하는 신세계 교향곡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가도가도 이어지는 산마루, 단풍은 길 따라 끝없이 이어지고, 하늘이 맑고 바람도 맑고 햇살 눈 부시어 정신이 몽롱하다. 이 길을 따라가면 요정이 살고있는 황금 궁전의 문이 열려있을 것 같다. 숲길을 꿍꽝꿍꽝 달리면 숲은 사각사각 교성을 쏟아낸다. 이럴 때면 내 달리기는 가학과 피학의 접신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듣노라면 육신의 고통도 기쁨으로 승화된다. 넬라호제베스는 블타바강 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지친 몸을 이끌고 해 질 무렵이 다되어서 그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르네상스식 거대한 궁전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만산홍엽(滿山紅葉) 화려한 숲속의 궁전 벨트루시 성이다. 낙엽이 쌓인 블타바강 변에 지친 발걸음을 멈추니 벨트루시 궁전이 강물에 드리웠다. 고운 가을빛과 어울리는 궁전을 담고 흐르는 물을 잠시 응시한다. 아직 조금 남은 김치를 마지막으로 떨어 넣고 햄을 썰어 넣어 끓이는 김치찌개의 뽀글뽀글 끓는 소리가 배고프고 한국 음식에 주린 나그네에게 신세계 교향곡으로 들린다. 저녁을 먹고 나니 성을 담은 강물에 며칠 치 모자란 둥근달이 박혀서 물결 속에서 넘실거린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는 달이 휘영청 하다. 가을이 기우는 한밤, 이런 곳에서는 잔잔한 강물에 담긴 보름달같이 둥근 알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찬다. 내가 마주 서 있는 건 초저녁 어둠이 품은 휘엉한 달빛, 신선한 강바람이었으나 나는 어느덧 푸르고 시리도록 젊은 날 한 여자 때문에 방황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운 날을 마주 보고 있었다. 고된 여정 중에 어린 시절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날 나는 종로 2가에서부터 힘없는 발걸음을 질질 끌며 끝없이 헤매며 걸었었다. 모든 것을 잃었던 그 날 밤 달은 유난히 하늘에 충만했다. 하늘 가득 찬 영광 같은 충만함이 사랑을 얻지 못한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베토벤은 ‘불멸의 연인’을 찾기 위해 평생을 헤매며 걸었다. 그 여정이 그의 음악이었다. 나의 마라톤이 나의 그리움, ‘불멸의 연인’을 찾아 나선 여정이다. 달빛을 타고 ‘달빛 소나타’가 강물로 흘러드는 것 같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강변 옆 아담한 숙소 근처에 ‘신세계 교향곡’을 작곡한 안톤 드보르작의 생가가 있다. 엊저녁 너무 피곤하여 바로 옆인데도 들르질 못했다. 신세계 교향곡은 아폴로 11호에 실려 우주여행을 한 음악이 되기도 했다. 푸르고 평화로운 블타바강과 잘 보존된 아름답고 장대한 고성(古城), 사방을 둘러싼 숲을 지나는 나그네의 발길에 어느새 음들이 요정처럼 동행한다. 어느덧 나그네의 발걸음은 천재적 음악가의 미적 감각이 조화를 부린 악보처럼 구성된다. 사실 드보르작은 천재적 음악가는 아니라고 한다. 가을 햇살도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장인의 손가락같이 경쾌하다. 내 발바닥도 가을 대지의 건반 위를 날아다니는 장인의 손가락같이 경쾌하다. 이곳에서는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도 교향곡의 한 소절 같이 들리는 듯하다.

 

숲에는 수백 년도 넘었을 우람하고 키 큰 나무가 서 있었다. 이런 나무는 스스로 물을 빨아올리기 힘이 들어 안개가 수분을 공급해 준다는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은 것 같다. 안개를 먹고 자란 나무는 신령한 기운이 있어 오고가는 사람들이 소원을 빈다고 그랬다. 아마 이 나무 아래서 젊은 드보르작은 뛰어놀았고 젊은 드보르작이 음계를 적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령한 기운이 있을 것만 같은 나무에 무사한 여정과 우리나라의 평화통일을 빌어본다.

 

무대의 커튼이 올라가며 지휘자의 은은한 손짓이 허공을 휘젓기 시작하면 첼로의 남성적 선율이 사랑을 속삭이듯이 감미롭게 소리의 물결을 일으킨다. 뻐근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켠다. 아침 햇살에 어둠이 무대의 커튼 젖혀지듯이 물러날 때 나의 발바닥은 아다지오의 매우 느리게의 속도로 대지의 현을 켠다. 아직 몸이 달구어지지 않았다. 활기찬 발바닥과 만나는 가을 대지는 악기의 공명판처럼 작은 두드림에도 섬세하게 반응한다. 대지의 반응은 곧 전신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진다.

 

동이 트기 전 어둠과 한낮의 땡볕 아래 달리면서 휘몰아쳤던 꿈과 희망과 격정들, 사람들과 만나면서 싹텄던 우정과 기쁨, 평화통일의 꿈이 연기처럼 날아갈까 움켜쥐며 달린다. 그 모든 순간의 희열과 열정이 나의 발끝과 대지의 만남으로 울림이 되어 퍼져나간다. 흐르는 강물과 구름, 대지에 떨어지는 낙엽의 소리가 모두 음표가 되어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서주(序奏)가 끝나면서 그 적막에 가까운 아련한 소리 위로 호른이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옛 터전 그대로 향기도 좋다. 지금은 사라진 동무들 모여”의 음을 연주하고 어느 순간 호른과 플릇이 플로어에서 손을 맞잡고 댄스를 추듯이 소리를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유라시아대륙을 달리는 나와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내게 힘을 주는 모든 이는 조금씩 다른 음색의 소리를 내면서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간다. 이때쯤 나는 온몸의 모공이 열리며 우주와 소통하는 감각이 열리고, 발걸음은 경쾌하게 리듬을 타고 앞으로 나간다.

 

그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달리는 발걸음은 크레센도로 빨라진다.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격정적인 포르테의 흥겨움을 발산하면서 달리노라면 정신도 최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맘때면 심장의 고동 소리가 팀파니의 강렬한 울림으로 연주되어 나오고, 아직도 절정에 다다르려면 멀었지만 고통은 최상에 다다르게 된다. 그 고통의 터널을 잘 견뎌내면 음들은 어느덧 잦아지고 북극곰이 사는 빙하와 같이 순결한 순간이 찾아온다. 삶에도 음악에도 마라톤에도 평화통일의 길에도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비로소 만나는 열락(悅樂)의 세계가 있다.

 

지휘자는 천상에서 날개옷을 입고 노니듯이 허공에서 음을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누에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듯이 음을 잣아내고, 어느덧 잉글리쉬 호른 주자의 현란한 손놀림처럼 대지의 음공을 현란한 발바닥으로 두드리며 자연과 대지와 혼연일체가 되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마치 여기서부터는 잉글리쉬 호른의 독주를 연주하듯이 신나게 치고 나아간다. 그리고는 더 이상 합주를 허락하지 않는다. 환상적인 음에 관객들이 숨을 죽이듯 평화마라톤을 응원하는 이들이 나를 숨죽이며 바라본다.

 

연주가 무르익어 가면 음은 음 이상의 것이 되어서 사람의 가슴을 두드린다. 그리곤 블타바강으로 흘러 들어가 강물의 고요 속에 잠긴다. 달리기가 최고조에 이르면 그 순간은 거침없는 무애(無碍)의 참 자유의 공간이 얻게 된다. 육신의 경계를 넘어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세계에 들어선다.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어 갈 때 오보에 소리가 시작되어 잉글리쉬 호른 소리와 왈츠를 추듯이 서로 휘감아 흐를 때면 나무 위에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발걸음 소리 위에 얹히고, 그럴 때면 영락없이 삶의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박수갈채 소리가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그 지울 수 없는 화상 같은 기쁨과 환희가 언제나 나를 유혹하여 아침 일찍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리게 만든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독일은 무한 질주의 아우토반같이 질주하는 사회인 줄 알았는데 독일을 지나오면서 더 이상 부나 첨단 문명을 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악착같이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도 승진에 목을 매는 직장인도 명예에 영혼을 파는 지식인도 흔치 않다. 그런 것들은 인간 보편적인 가치가 아니라 이곳에서는 선택의 사항에 불과했다. 이들은 조금 불편한 것은 환경친화적이라는 이름으로 즐기게 되었다. 독일에는 미인들이 많지만 패션잡지에서 금방 걸어 나온 듯한 첨단 유행으로 온몸을 휘감은 미인을 보기란 힘들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뽐내고 자신감으로 멋을 더할 뿐이다. 이들은 걸음걸이가 느리고 말이 바쁘지 않다.

 

고속도로의 한복판에 멈춰 서서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자동차에 불과했던 나는 독일을 지나 체코의 들판을 달리는 야생마처럼 자신의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생명이 되었다. 긴 겨울을 준비하며 붉게 물든 나뭇가지 위로 휘감아 부는 돌풍이 최고의 고음을 내면 달리는 발걸음도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음표(音標)들이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듯이 발바닥도 길 위에서 격렬하게 상하운동을 하게 된다. 육체가 최고점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흘러나오는 절정의 인간 정신을 축출하여 씨줄과 날줄로 엮어 나의 삶을 재생시키고, 사람들과 함께 평화통일의 신세계를 가꾸어나가는 것이다.

 

악공의 손이 악기 위에서 자유자재의 음을 만들어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듯이 나의 발바닥은 길 위에서 자유자재로 평화통일의 꿈과 희망의 음표를 만들어낸다. 발바닥은 가을바람에 춤추는 낙엽의 신명을 싣고 달린다. 나와 나의 발바닥 연주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데우면서 최고의 피날레를 향하여 달려간다. 평양을 거쳐 광화문까지 앙코르의 연호가 하늘 가득히 메아리치기를 기대하면서. 그 힘찬 피날레는 신록의 계절 마른 나무에 물이 오르는 재생의 숙연한 순간이며, 불가마 속에서 진흙이 명품 도자기로 태어나는 연금술의 순간이요, 강화도령이 대관식을 치르는 장엄한 순간이기도 하다.

 

평화마라톤은 나의 몸이 음표가 되어 고통과 환희의 음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사람들의 가슴 속에 묻혀있는 염원을 모아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고통과 즐거움, 불확실과 확실성 그리고 보수와 진보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 속에서 화해시킨다. 평화는 관악기와 현악기, 타악기를 서로 화해시키고 조화를 이끌어내며 서로 협력하게 하여 찢어진 마음을 기우고 삐뚤어진 인간 정신을 바로 세우는 장엄하고 성스러운 음을 만들어내는 그런 것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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