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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1)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1)

왈츠 운율에 맞춰 오스트리아를 달린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나의 발걸음의 속도에 맞춰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는 줄 알았던 가을이란 여인은 내 사랑을 얻으려 어느새 나를 앞질러 가서 내 가는 길목을 멋진 채색을 하며 바쁜 걸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뒤로는 겨울이란 거친 사내가 내 사랑을 질투하며 세찬 바람을 일으키며 곧 나를 추월하여 내 사랑을 범해버릴 기세로 쫓아오고 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여행은 찬란한 가벼운 바람 속으로 나의 일상을 날려 보내는 것이다. 중력(重力)을 벗어버린 가벼운 시간 속에 드러나는 자신의 벗겨진 자태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너무 가벼워지면 삶은 날아가 버릴 것 같고 비현실적이며 무의미해진다. 이 길고 긴 여행의 가벼움을 치열한 달리기로 연줄을 삼아 당겼다 놓았다를 하면서 긴장을 유지하는 일은 힘들지만 멋진 일이다. 분명 삶은 무겁지만 그 무게가 우리의 삶을 더 치열하고 진실하게 해준다.

 

나는 체코를 달리는 동안 체코의 조상님들에게 완전 반해버렸다. 그리고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을 자랑으로 여기며 잘 보존하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감사하고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와인과 맥주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다채로운 맛의 고향이기도 하고 인심이 넉넉하기도 하다. 어떨 때는 하루 종일 사람 구경도 못하고 숲속 길을 달릴 때가 있다. 말이 달린다는 거지 내가 지나온 체코의 지형은 거의 산악지형이어서 70kg이 넘는 손수레를 밀며 하루에도 몇십 번씩 고개를 오르내려야 하니 거의 걷는 수준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데슈트나로 가는 길에 정적만이 감도는 구불구불한 깊은 숲속을 달리다 저 앞에서 전기톱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거리고 들려왔다. 다가가니 벌목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지나가던 내게 손을 흔든다. 그들도 쉬어야 할 이유를 찾았고 나도 쉬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나도 발걸음을 멈추며 이마의 땀을 훔쳐내며 조금 과장되게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들은 남자 셋에 소녀 둘이다. 소녀들도 남자들과 함께 거친 일을 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그들은 반갑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한다. 한동안 서서 대화를 나누다가 한 친구가 필슨너 맥주 한 병 하지 않을 거냐고 묻는다. 왜 그 좋은 맥주를 거절하겠는가? 목도 마르던 참이었다.

 

필슨너 맥주의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목젖을 타고 내려가 온몸에 퍼지니 평화가 찾아온다. ‘맥주가 있는 곳엔 인생이 즐겁다.’라는 체코 속담이 있다. 맥주를 같이 나눠 마시며 한 남자가 한 소녀를 가리키며 나에게 한국으로 데리고 가라고 한다. 몇 살이냐고 물으니 열아홉이라고 한다. 내가 나이가 많은데 그래도 괜찮으냐고 소녀에게 물었더니 얼굴을 붉히며 나이는 상관없다고 한다. 우리는 한동안 껄껄 웃었는데 이 소녀 표정이 자못 진지하다. 어쩌면 벌목꾼 소녀에게 나는 동방의 나라에서 내려온 멋진 천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날개옷을 어디다 벗어두었는지 두리번거렸을지도 모른다.

 

나도 잠시지만 숲속에서 만난 선녀의 날개옷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어 좋았다. 소녀의 야릇한 표정이 바보 같은 남자에게 얼마나 힘을 주는지 여기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바보 같은 남자도 그녀의 거울이 된 양 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정신을 되돌려놓았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좋은 기분을 안고 찾은 예약한 목적지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지도에 표시된 곳은 구글맵을 따라 가보면 없고 다시 나와서 왔다 갔다 몇 번을 하다 지나가는 여자에게 물으니 자기는 영어를 못하고 아들이 영어를 잘하니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제이콥도 작은 마을인데 길 이름을 모른다. 난 다시 예약확인 메일을 펴보니 예약한 업소는 영업하지 않고 대신 다른 도시의 호텔을 대체하라는 메일이 와있었다. 지금 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제이콥은 길모퉁이에 펜션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가보라고 한다. 그 외에는 이 근처에 숙박할 만한 곳은 없다고 말하고는 엄마와 함께 가버렸다.

 

그 펜션에 가서 벨을 누르니 제봉틀 앞에서 일하던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와서 여기는 더 이상 영업을 안 한다고 한다. 대신 다른 곳을 알아봐 준다고 여기저기 전화를 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여력(餘力)이 없으니 창고나 방 한구석이라도 재워달라고 사정을 하고 있는데 제이콥이 다시 나타났다. 본인도 그곳이 영업하는지 확신이 안 가서 내가 혹 난처한 상황에 빠질까 봐 가던 길을 돌려 다시 온 것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그 아주머니가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한 3km 되는 곳의 민박집을 알아봐 주었고 제이콥이 그곳까지 차를 태워주었다. 나의 ‘한혈마’는 그곳 창고에 맡기고 아침에 찾으러 오겠다고 하였다. 춥고 비가 오는 날씨에 꼼짝없이 노숙하게 된 상황에서 제이콥이 선한 사마리탄이 되어주었다. 그곳은 정식 숙박업소는 아니었고 뜨내기들을 싼 가격에 재워 보내는 집이었는데 정원에 가을꽃이 아름답게 피어있고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이었다. 숲속에서는 결코 요정을 만나지 못했지만 피곤함은 밤마다 나의 요정이 되어 잠들기 좋게 내 요람을 흔들어준다. 꿈도 없는 더없이 달콤한 잠에 빠진다. 이런 예기치 않은 일들은 언제나 벌어질 것이고 나는 그럴 때마다 그런 일들과 친구가 되어 울고 웃어야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체코는 아름답고 숲이 우거지고 인심이 좋고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정감이 가는 나라이다. 그러나 나는 체코를 달리면서 제때 식당을 만나지 못해 아주 힘들었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그 감각은 익숙한 감각이 아니었지만 바삐 돌아가는 영화의 필름 같은 풍광에 배고픔을 잊기가 쉬웠다. 내심 유럽에서는 저렴한 가격으로 육류를 많이 섭취할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장거리 달리기란 결국 얼마나 영양보충을 잘 해주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이 미국만큼 육류소비가 크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소고기는 농촌 지역에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치즈나 요거트 소시지는 흔했다.

 

그 옛날 지구상 어디에도 고기는 귀한 음식이었고 서민들은 빵이나 밥, 죽, 또는 지역에 따라서 감자나 옥수수만 먹으며 생활했다. 벼농사를 짓는 아시아와 옥수수 농사를 짓는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달리 유럽에서는 농경과 목축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비교적 자주 육류를 섭취하였다. 그래도 서민들이 신선한 육류를 섭취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연중 신선한 고기를 먹는 것은 부유한 귀족이거나 대도시의 중산층 이상 시민들이었다.

 

이제 체코의 마지막 도시 노바 비스트르지체를 출발하여 거친 고갯길을 올라간다. 네팔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하는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는 길은 여인의 아련한 속치마처럼 안개가 잔뜩 끼었다. 안개를 뚫고 성당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온다. 숲은 너무도 깊고 넓어서 영원히 빛이 들 것 같지 않았다. 체코에서 험한 산악지형을 오르내리느라 기진맥진하였는데 국경을 넘자 이제부터는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된다.

 

“슬프고 마음이 아프면 춤으로 풀자! 생각이 많으면 춤을 잃어버리고, 리듬을 놓친다.” 어느 무용수의 말이다.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요한 슈트라우스의 운율이 흘러내리는 듯하다. 내리막을 달리는 발걸음은 자연히 왈츠의 운율에 맞춰 경쾌해지고 있었다.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알프스의 꿈결 같은 경치와 중세 유럽의 품격과 예술적 영감이 가득한 땅.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무대가 되었던 곳, 요한 슈트라우스와 모차르트, 하이든 같은 음악가가 태어나고 활동하던 곳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알프스의 그림 같은 경치와 중세유럽의 멋과 낭만이 가득한 땅. 지금은 영세중립국이지만 인류가 저지른 가장 야만적인 전쟁인 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잉태(孕胎)한 땅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오스트리아에서 나고 자란 히틀러가 빈에서 미술 학교에 다닐 무렵 레닌이 이곳에서 활동했고 그 얼마 후 스탈린이 혁명의 영감을 얻으며 꿈을 키우고 있었던 억센 기가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로마인들이 일찍이 1세기 때 이곳에 성루(城壘)를 건설했다. 북쪽 게르만족의 침입이 있자 로마인들은 도나우강에 방어진을 구축하였는데 이 진지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하여 오늘날 주요 도시가 되었다. 로마는 결국 게르만족에게 무너지고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 오스트리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자부하며 프랑크 왕국에서 분리된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수백 년에 걸쳐 경쟁한다. 지금은 유럽 중앙의 작은 나라지만 합스부르크왕가 시절 프랑스 서쪽으로부터 발칸반도와 흑해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이루었었다.

 

이제 꼭 40일째 달려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를 품은 도시와 마을들을 지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유라시아대륙을 달리며 나는 나의 상상력과 에너지가 무한대로 확장되는 것을 느낀다. 이 길을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달린다면 한반도 남쪽에 갇혀있던 작은 이념들과 관념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알게 될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달릴 때 시간은 일직선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다. 생각은 과거와 미래 현재를 넘나들며 홍수 때 물처럼 폭을 넓혀간다. 이제 나에게 있어 손목에 찬 시계는 의미가 없어진다. 하늘에 뜬 태양과 달이 시간을 알려주고, 위장의 허기가 식사 시간을 알려주고 계절마다 변화하는 숲이 큰 시간을 알려줄 뿐이다.

 

나는 지구 반 바퀴를 돌면서 혹성탈출의 설렘을 맛본다. 세상은 이제 인터넷의 발달로 실시간에 연결되는 네트워크로 연결되었다. 지금은 다국적 기업의 총수가 칭기스 칸의 제국보다도 더 큰 영역에서 더 큰 이익을 남기고 어쩌면 더 큰 권력을 자손들에게 교묘하게 물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종교, 이념 등의 문제로 이 길은 미지의 길로 남아있다. 그 미지의 길을 두 발이 찍어내는 촘촘한 발자국으로 평화의 벨트로 연결할 것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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