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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9)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29)
집 잃은 개와의 동행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세르비아에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은 드물다. 당연히 세르비아에 대하여 아는 체 할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유라시아대륙횡단 루트를 짜다가 루마니아로 통과하려니 루마니아에는 높은 산악지역이 많아서 할 수 없이 세르비아를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테니스를 즐겼으므로 노박 조코비치가 세르비아 출신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다였다.

 

세르비아는 유럽에 있으면서 유럽연합에서 받아주지 않는 나라이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보스니아의 독립을 막기 위해 자행한 인종말살(人種抹殺) 행위가 내가 아는 다였으니 차라리 산악지형인 루마니아를 통과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지도 모를 거라는 알 수 없는 두려운 생각을 무수히 많이 했다. 그러나 나그네의 발길 앞에는 돌부리만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조우(遭遇)하는 기쁨도 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발칸에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뚜렷한 경계가 있다. 이슬람을 믿는 나라와 가톨릭을 믿는 나라, 1차대전 때 오스트리아, 헝가리 측에 가담한 나라와 그 대척점에 섰던 나라, 2차대전 때 나치에 협력했던 나라와 그 반대에 섰던 나라, 라틴 문자를 쓰는 나라와 키릴문자를 쓰는 나라. 세르비아는 언제나 두 번째에 속했다.

 

어렵사리 국경을 넘으니 무대가 확 바뀐 것 같았다. 1막이 끝나고 2막으로 바뀐 것 같았다. 마치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아서 긴장도 되었다. 집들은 오래되어 무너져 내려도 손볼 여력이 없는 것 같았고, 대부분의 마을은 사람들이 못살고 떠났다. 허물어진 지붕 위에는 칡넝쿨이 덮어버렸다. 도로에 갓길은 없고 차들은 쌩쌩 달린다. 이런 곳은 보행자보다 차가 우선이다. 시궁창은 차에 치여 죽은 개의 죽엄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길 양옆에는 젊은 날 사망한 망자의 사진과 십자가가 전봇대보다 많이 보였다. 그런 묘비석은 자동차를 조심하라는 엄중한 경고나 다름 아니었다. 달리는 괴물들은 야생의 늑대나 곰보다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폐허처럼 어둡고 낙담한 모습으로 길위에 어슬렁거렸다. 쓰레기더미는 여기저기 쌓여서 썩은 냄새를 풍겼고 떠돌아다니는 집 잃은 개들의 충혈된 눈동자는 언제 공격할지 모를 공포를 주었다. 사람 살기도 벅차니 개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내전이 할퀴고 간 상처는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것은 집 잃은 개와 고양이뿐만 아니었다. 나이 지긋한 노인도 가끔 그런 데서 무엇인가 찾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문명의 질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아침에 우중충한 ‘센타’라는 마을을 벗어날 무렵 누렁이 한 마리와 멀리서 눈이 마주친다. 지금껏 살면서 아주 많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인생의 가장 찬란했고 또 한편 우울했던 젊은날 몇 번 정도는 경험했던 그런 눈빛이었다.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되면서 눈 밑에 미묘한 떨림이 전해지던 어떤 소녀의 눈빛 같은 것이었다. 집 개들은 막 짖으며 사람에게 달려들고 들개들은 경계하고 슬그머니 도망치는데 이 녀석은 내게 강렬한 눈빛을 준 이후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계속 나를 쫓아온다.

 

그 눈동자는 분명 내게 호감을 가진 것이었지만 순간 겁이나 나는 슬그머니 셀카봉을 집어 들었다. 이럴 때 셀카봉은 호신용(護身用)으로 그만이다. 저만치 쫓아오는 녀석의 눈은 첫눈에 보기에도 산채로 버림받은 짐승 특유의 불안한 눈이었지만 선한 눈동자였다. 전혀 공격할 그런 눈동자가 아니었다. 지금은 셀카봉이 필요할 때가 아니다. 상대방은 첫눈에 나에게 반하여 동행하려고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나도 같이 가면 위로도 받고 같이 가고 싶었지만 지금 내 형편에는 저 녀석과 같이 동행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녀석이 쫒아오지 못하도록 몇 번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르면 꼬리를 내리고 야속한 눈초리를 지으며 멈칫거리다가 내가 돌아서 가면 다시 저만치서 쫓아온다.

 

녀석은 운명적인 만남을 직감한 것처럼, 나를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나와 함께 평화마라톤을 완주할 기세로 끈질기게 쫓아온다. 그래도 녀석이 쫓아오면 질주하는 차량들 때문에 대형사고가 날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전쟁터에서 집 잃은 개와의 평화마라톤을 동행하는 것이 의미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갓길도 없는 국도를 천방지축(天方地軸)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녀석과 같이 가는 일이 운전자들에게 너무 방해될 것 같기도 하고, 위험도 하고 현실적으로 잠잘 때도 그렇고, 국경을 넘을 때도 문제가 될 것 같아 여러 번 쫓으려고 소리를 지르며 실랑이를 했지만 15km나 쫓아왔다. 어떻게 해서라도 쫓아버리려고 돌멩이를 던져도 그때뿐이다.

 

그러다 어떤 마을에 들어서니 셰퍼드처럼 큰놈이 자기의 영역에 들어온 이 녀석을 공격하였다. 역성이라도 들어달라는 듯 내 쪽으로 순식간에 달려오고 나는 순간적으로 셰퍼드처럼 큰놈에게 한혈마로 앞을 방어하고 집었던 돌을 던져 누렁이를 보호해주었다. 이때부터 녀석은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옆에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쫒아왔다. 나도 더 이상은 운명적인 만남을 거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쫓아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녀석은 가끔 달리는 내 다리에 몸을 부비기도 한다. 어느덧 우리 둘 사이에는 교감이 생기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간식을 먹을 때도 녀석과 나누어 먹고 물도 주었다. 녀석은 감사의 인사라도 하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녀석은 나를 쫓아오면서 처음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의 불안정한 눈동자가 많이 안정되어 보였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면 내 눈동자도 이 녀석과 함께 많이 안정되었다고 할 것 같았다. 나도 역시 이 어수선하고 폐허같은 곳을 지나면서 동행자가 생겨 한결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휘~ 휘휘휘휘 휘휘휘 휘휘 휘휘휘... 나는 어느덧 강아지 왈츠를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고 녀석의 꼬리는 세르비아 평원의 가을바람에 아기코끼리의 걸음마처럼 기분 좋게 흔들렸다. 25km쯤 달려왔다. 식당이 문제였다. 밥은 먹어야 했으니 식당이 보여서 이른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가 나오니 녀석이 안 보인다. 작별인사도 못 하고 녀석과 헤어진 것이 한편으로 마음에 걸린다.

 

세르비아의 개만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나를 대하는 것이 미치도록 친절하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웃음을 날려주고 악수를 청하고 사진 촬영을 요청하고, 지나가는 차들은 경적(警笛)을 울려서 환영해준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저만치 차를 세우고 기다리더니 초코렛바 두 개를 쥐여주며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라고 응원도 하고 식당에서는 “on the house”라고 그냥 가라고 하면서 물병과 콜라병을 덤으로 싸서 주기도 한다.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의 후한 인심이라 마음이 더욱 포근하다. 그날 밤 묵은 호텔에서는 대단한 일을 한다며 10유로만 내라고 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그날 샤워를 마친 후 그 호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두 남녀가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남자는 베체이 방송 카메라맨이고 여자는 기자라고 소개를 하면서 인터뷰 좀 할 수 없냐고 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누군 줄 알고 인터뷰를 하자고 하냐?”고 물으니 기자들은 동물적 감각으로 안다고 농담을 하면서 내일 아침 몇 시에 출발하는지 출발하기 전에 인터뷰하고 출발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싶다고 한다.

 

아침 일찍 호텔에서 10분 거리의 티자강가의 전쟁 기념비로 촬영을 위해서 갔다. 그들은 나의 평화마라톤의 의미에 자기들이 치룬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되새기며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담았다. 인터뷰는 잘 됐다. 나는 유라시아대륙 횡단 평화마라톤을 하는 이유와 특히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사는 세르비아 국민들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를 지키는 노력에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한다고 강조하였다. 방송의 효과는 그 다음 날로 바로 나타났다. 길을 달리는데 자동차 경적 소리가 음악처럼 자주 들려오고, 사람들이 흔들어주는 손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이런 땅,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전쟁이 벌어지고, 인종 말살이 자행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위정자들은 전쟁터에서 사람들이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는 광적인 애국의 열기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힘차게 군가를 부르면서 하나가 되는 경험은 민중들에게 짜릿한 모험심과 영웅심을 유발시킨다. 적폐 청산할 게 많은 나라일수록 전쟁은 모든 적폐를 한꺼번에 해결해줄 것 같은 야릿한 유혹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유혹이 흡수통일을 주장하게 한다. 공동의 적과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하찮은 논쟁으로 분열되었던 사람들은 우리는 하나라는 일체감을 느끼게 하는 마약(痲藥)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그러나 그 대가는 처절하다. 몇십 년이 지나도 치유가 안 되고 오히려 상처가 곯아 터지고 덧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하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럽연방에 포함되기를 희망하며 제일 먼저 독립을 선언했다. 1991년 6월 25일 세르비아계 장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유고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침공하며 유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크로아티아로 침공하고 서로 간에 공방전이 벌어진다. 1992년 4월 6일에는 보스니아 시민들의 집회에 무차별 총기 난사를 벌이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발칸은 2천 년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민족이 서로 다투며 이곳에 살아왔다. 오스만제국은 효율적인 통치를 위하여 서로를 대립시켰다. 중세의 한동안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적 완충지대(緩衝地帶)를 이루고 있었다. 또 티토 때 잠시 평온을 유지했지만 이후에는 열강이 그 뒤를 따랐다. 분쟁과 대립이 있는 곳은 제 3자가 조정하기 수월했다. 한반도도 그런 이유에서 열강이 분쟁을 부추키고 있으니 무거운 마음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1389년 오스만의 침략으로부터 1878년 러시아, 오스만 전쟁까지 500년간 발칸은 유럽에 있으면서 유럽이 아니었다. 오스만은 슬라브인에게 이슬람교 개종을 강요했다. 오스만의 지배로 발칸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유리된 채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발칸은 세계사의 주역이었던 서유럽과 이슬람 세력 사이에서 억눌리고 왜곡된 역사를 보냈다. 30년 종교전쟁, 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사회주의 독재를 견디고도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잃어버린 20년을 보내고야 이제야 방향을 잡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근 100년간 이 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총 3년 8개월간의 내전 끝에 휴전했다. 3년 8개월의 전쟁은 30년이 다 되어도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우리의 6.25 3년 전쟁이 65년이 지나도록 마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것과 비견된다. 전쟁은 그렇게 참혹한 것이다. 전쟁은 인간에게뿐만 아니라 개와 고양이에게도 참혹했다. 아까 쫓아오던 누렁이가 눈에 밟힌다. 자기가 자리 잡던 곳에서 25km를 나를 쫓아오면서 그 동네 개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데 다시 자기가 있던 곳으로 잘 돌아갔을까? 아니면 새로운 터전에서 토박이 개들에게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갈까?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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