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2)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2)

불구가 되어 행복한 가족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아침에 눈을 뜨니 창밖으로 어둠 속에 안개가 꿈처럼 아련하게 깔렸다. 추꼬바츠라는 강변의 작은 마을은 안개에 덮여서 잠에 빠져있는 이른 새벽이다. 나는 오늘 평소보다 긴 거리를 달려야 했으므로 일찍 일어났다. 어제 호텔 주인이 아침 일찍 떠난다는 나를 위해 미리 특별히 만들어놓은 영양식 샌드위치를 먹고 힘차게 출발하였다.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눈꺼풀을 비비고 길을 나설 때 밤은 충분히 어두웠지만 밤새 교대자를 기다리듯 나를 기다리다 바로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지만 앞이 구분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밤은 긴 시간 어두운 길을 달려오며 피로를 쏟아냈으므로 휴식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호텔은 안개 속에 강 위에 방주처럼 떠 있는 멋진 호텔이다. 어제 이 호텔을 찾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큰 도시에 있는 호텔이 아니라 작은 휴양지의 강가에 있는 곳이라서 외진 곳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어제 어렵사리 호텔을 찾아 입구에 들어서니 호텔주인이 멀리서 나를 알아보고 달려오듯이 다가와서는 반가이 손을 잡고 인사를 한다. 아까 운전을 하고 오다가 길 위를 달리는 나를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음료수를 마음대로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라고 권한다. 호텔비는 15유로만 내라고 하면서 방도 예약된 방보다 더 좋은 욕조가 딸린 방을 주었다. 오랜만에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에 뭉쳤던 근육이 이완되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영혼마저도 이완시킨다. 목욕하고 호텔 식당으로 내려가니 주인의 아버지가 아들을 혼내며 15유로도 도로 내어주며 저녁도 비프스테이크와 맥주를 무료로 준다고 한다.

 

비프스테이크를 한입 깨물어 입에 넘기면서 창밖에 내다보이는 하늘과 강물에 온통 오렌지빛을 뿌린 석양이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주인의 아버지가 나에 대하여 자기 친구에게 소개하자 그러지 않아도 낯선 동방의 손님을 힐끗힐끗 곁눈질하면서 식당에 앉아 식사하던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는 지난번 베체이 TV에 나온 비디오를 한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너도나도 같이 사진 촬영을 하자고 내게로 다가온다.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안개 낀 이른 새벽 거리는 한산하였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안개가 걷히자 집집마다 양유(羊乳)를 짜서 집 앞에 내놓은 풍경이 이국적이다. 나뭇가지를 이어 만든 담 밑에 가을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조랑말을 탄 농부가 콧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양유 수거차가 지나가고 사람도 차도 안 보이더니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뒤에서 할아버지가 모는 경운기 하나가 지나가다가 서더니 나를 불러서 다가갔더니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내 여정에 관하여 물어보는 것 같았다. 헤어져서 다시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저 앞에 아까 그 경운기가 다시 서 있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거기가 아마 그의 집 앞인 모양이었다. 나를 손짓으로 불러 그에게 다가가니 집에 들어가서 커피 한잔하고 가라고 아예 내 손을 잡아끈다. 이제 그 말은 내가 알아들었다. 오늘 갈 길이 평소보다 멀어 마음이 바빴다.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리 마음이 바쁘기로서니 평화마라톤, 소통의 마라톤이 이런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다. 나는 어쩌면 사람들의 호의를 바라며 이 여행에 나섰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집에 초대될 때마다 나는 새로운 행성을 여행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집에 들어서니 대가족의 식구들이 모두 나와 꾸밈없는 반가움으로 맞는다. 할아버지는 아내와 며느리, 아들과 손주를 일일이 식구들을 소개하더니 누가 빠졌는지 손주에게 뭐라고 한다. 곧 손주며느리가 젖먹이 증손자까지 데리고 나오니 4대가 함께 사는 집이다. 거기에 아들의 친구까지 놀러 와 있다.ㅏ들의 친구가 영어가 조금 되어서 그가 통역을 해주었다. 이 시간에 모든 식구가 함께 집에 있는 것이 일거리가 별로 없어 보였다. 며느리한테 커피를 끓이라고 하더니 라키야를 들고 와서는 한잔 따르더니 쭉 마시라고 한다.

 

그들은 내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신기한 듯 키득키득 웃었다. 좁은 응접실에서 우리는 살갗을 맞대고 앉아야 했다. 액자를 들고 와 보여주는 가족사진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가족의 행복한 웃음 띤 얼굴이 담겨있었다. 이 노인은 말만 통하면 자기 이야기를 상대방이 전혀 사실처럼 들리지 않을지라도 시침을 딱 떼고 우수 어린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추억들이 많은 것 같다. 아니면 음담패설이라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노인은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니 눈치를 챘는지 여러 가족과 내 앞에서 바지를 걷어 올려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보여준다. 자신의 치부를 보여준 노인은 저쪽으로 가더니 술병을 들고와서는 한잔 따라주고 자신도 따른다. 나와 친구가 된 의식을 치르고 싶은 것이다. 이 사람들은 귀한 손님을 오면 이렇게 한잔 나눈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해장술까지 하게 되었다. 시간은 지체되었지만 한결 가벼워진 마음은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만들었다. 언제나 초대를 받아 귀한 대접을 받고 그 집을 나설 때마다 좋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나올 때보다 더 진한 감동이 드는 건 사실이다.

 

아들 친구의 서툰 영어 통역으로 대충 알아듣기로는 그 불구의 다리가 이들 가족에게 행운을 가져다 줬다는 것이었다. 노인의 아내가 그의 다리에 입맞추자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아마 다리가 불구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거나 전쟁 초기에 부상으로 제대하여 죽음을 면했을 수도 있겠다. 다리를 하나 내주고라고 삶을 택할 수 있으면 그건 좋은 것이 분명했을 거니까! ‘인생만사 새옹지마’란 말이 여기서 유래하지 않았나! 자세한 설명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2차대전 때 어느 병사는 다리에 파편을 맞은 날을 기념하여 매년 가족과 함께 파티했다는 것을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그날도 도나우강에는 새신부의 웨딩드레스처럼 하얀 안개가 끼었지만 안개 낀 것이 베오그라드에는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날도 안개가 자욱이 끼었다. 십 대의 프란치프와 두 친구는 베오그라드의 부두에서 상기된 얼굴로 증기선에 올라탔다. 출렁이는 물결 소리 뱃고동 소리와 물새 소리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세 사람은 모두 헐렁한 코트를 입었고 코트 안으로 두 개씩의 폭탄을 지녔고 허리춤에 권총을 꽂았다. 주머니에는 실탄을, 그리고 다른 주머니에는 청산가리를 휴대하였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출발한 증기선은 물살을 가르며 사라예보로 향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남동쪽에 가시 같이 박혀서 오스트리아가 선점(先占)하고 있는 권력을 위협했다. 1년 전 발칸전쟁으로 불바다가 되었던 곳이 세르비아로 인해 다시 불안해졌다. 전쟁에서 오스만튀르크를 이긴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알바니아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것이 오스트리아에 위협을 주는 전략적 요충지(要衝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국경 가까운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전개하기로 했다. 지금의 한미 군사훈련을 연상시키는 그런 군사훈련이었다. 아마 미국에게 북한만큼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골칫덩이였던 모양이다. 1924년 6월 28일 오전 9시 45분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는 무개차(無蓋車)를 타고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이때 7명의 암살단원도 사라예보에 도착했다. 암살 작전은 참으로 엉성했다. 첫 번째 요원은 무서워서 총도 꺼내지 못했고 두 번째 요원이 가까스로 떨리는 손으로 수류탄을 던졌지만 수행원만 다치고 말았다. 암살 작전은 무산되는 듯싶었는데 황제가 돌출행동을 했다. 일정을 바꿔 부상자를 위로하러 병원을 찾아가다 운전사가 길을 잃었다. 불행하게 그때는 GPS도 없었다. 19살의 세르비아의 청년 프린치프는 암살을 포기하고 배가 고파 편의점에서 빵을 먹고 있었다. 그 앞에 황제의 무개차가 길을 읽고 멈춘 것이다. 그는 허둥지둥 7발의 총알을 쏘았고, 그중 두 발이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목과 부인 조피의 복부에 명중하였다.

 

6월 28일은 1389년 세르비아의 영웅이 정복자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를 죽인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 ‘성바이터스의 날’이기도 했다. 그런 날 합스부르크의 황태자가 남슬라브의 땅을 밟는다는 것은 세르비아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었다. 바로 코앞인 사라예보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펼치는 것도 못마땅한데 거기에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참관하는 것도 불쾌한 일이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14년 전 황태자 페르디난트와 조피 호텍 백작부인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황태자비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황족이 아무도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勃發)은 지금의 한반도 상황하고 비슷하다. 처음에는 으름장만 놓고 세르비아의 콧대를 꺾어주면 그만이라고 판단했다. '낙엽이 떨어질 때까지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세계대전으로 번져갈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영국의 처칠 해군 장관은 부인에게 “평화를 위해 사력을 다할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옳지 않은 공격을 개시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남긴다. 이어서 편지에는 “전쟁은 추악한 매력이 있는 것 같소. 나는 그런 무서운 경박함을 용서해 달라고 신께 기도한다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오스트리아는 1914년 7월 28일 오후 1시에 전보로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전보는 왈츠의 리듬처럼, 행진곡의 리듬처럼 경쾌하기까지 한 음으로 이어졌다. 독일의 빌헬름 2세는 비엔나에 베오그라드를 잠시만 상징적으로 점령하여 본때를 보여주고는 곧 철수하라고 전보를 쳤다. 비엔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스트리아의 군 동원은 오직 세르비아로 향한 것이라고 전보를 쳤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비엔나에 러시아의 군 동원은 부분적이고 순수하게 방어목적이라고 전보를 쳤다.

 

전보의 음은 왈츠의 스탭처럼 평화로웠지만 그 전보의 파괴력은 이전의 역사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다. 독일은 프랑스로 프랑스의 군 동원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알렸다. 프랑스는 단지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군 동원이라고 했을 뿐이다. 영국은 독일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중재를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왈츠 음같은 전보가 오가는 그 시간에 왈츠를 추던 유럽의 젊은이들은 졸지에 군에 징집되었고 손에는 아름다운 여인의 부드러운 손대신 총을 들고 왈츠곡 대신 행진곡에 맞춰 열병분열을 하고있었다.

 

세계 제1차 대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등의 나라들이 있는 발칸반도는 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주변의 많은 나라가 발칸반도를 차지하려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세력다툼이 심했다. 오스트리아는 망명 생활을 하는 반(反) 차르 혁명세력을 지원한 지 오래되었다. 그들 중에 유명한 레닌과 스탈린이 포함되었다.

 

시작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계 민족이라는 공통점을 내세워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과 함께 동맹을 맺었다. 독일은 러시아와 싸우기 전에 후방인 프랑스를 잠재워야 했다. 독일은 벨기에에 땅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영세중립국인 벨기에가 거절하자 독일은 무력으로 진격을 했고 영국은 그냥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전쟁을 치르는 동안 러시아가 재정이 파탄(破綻)이 나면서 군주제가 무너지고 그 결과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새로 정권을 잡은 레닌은 정전을 호소한다. 만약 전쟁이 계속되면 러시아 국민이 또 다른 정권을 선택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독일도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우리가 ‘빼빼로데이’로 부르는 11월 11일은 900만 명이 넘는 군인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1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종전기념일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