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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홀연히 떠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호흡하며 뜨겁게 포옹하고 싶었다. 나는 지금 이국적인,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근원인 심연(深淵)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길의 종착점에 다다르면 난 지금의 내가 아니라 애벌레의 탈을 벗은 노랑나비가 되어있을 것이다. 벌레가 넘지 못하는 장애물을 훨훨 날아 넘나드는 평화의 노랑나비. 철조망의 높이도 철조망의 가시도 노랑나비를 막지는 못할 것이다.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비단길은 기원전 4세기경부터 16세기까지 동서양을 잇던 길이다. 이 길을 통해서 운반된 비단은 로마에선 중국에서 팔리는 가격의 100배도 더 되는 가격에 팔렸다. 이 길은 중국의 시안(西安)에서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고대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까지 이르는 약 7.000km에 달하는 길이다. 나는 그 길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던 이스탄불까지 그리고 중국의 시안에서 한국의 서울까지를 잇는 9,000km를 더해 16,000km의 거리를 일체의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 나의 두 다리의 근육의 힘과 심장이 뿜어주는 그 힘찬 기운에 의지해 달려갈 것이다.

 

이런 믿기지 않는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리는 사람이 있다. 나의 입장은 단호했다. 일생을 걸고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딱 이번 일이 그렇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냥 목적지를 향해 막연히 달려가는 일이라면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달리면서 단순히 이국적인 정취에 빠져서 달리는 것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이리라! 달리면서 평화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 달리면서 인류공영의 새 시대를 사색해보겠다.

 

저가 항공을 타느라 국적기를 타지 못하고 중국의 샤먼항공(厦门航空)을 타고 16시간 넘게 비행을 한 끝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새벽 6시에 도착하였다. 한국의 무더운 날씨를 뒤로 하고 왔는데 이곳의 아침 공기는 약간 쌀쌀하면서 쾌적하고 좋았다. 하루정도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는 그곳에 여장을 풀고 관광을 하고픈 생각도 있었으나 짐이 문제였다. 모텔의 숙박은 보통 2, 3시부터 하는데 그때까지 짐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바로 헤이그, 이곳 사람들은 덴 하그(Den hagg)라 부르는 곳으로 와서 이준열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10시 반 개장인데 아직도 9시 반이다. 이제 유모차를 조립한 상태여서 유모차를 밀며 비넨호프 궁전을 둘러보려 발길을 돌리는 순간 이기항 원장님이 시간보다 일찍 문을 열러 나오셨다. 원장님은 친절한 안내를 해주시며 내가 왜 이곳을 출발지점으로 결정했는지 세심하게 물어보았다. 아마도 내가 평양을 거쳐서 판문점으로 들어온다니 평생을 이곳을 지키며 살아온 일이 뜻하지 않은 구설수(口舌數)에 오르고 귀찮은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첫 시작부터 예상치 않았던 난관이었다. 나는 110년 전 이곳에서 이준 열사가 이루지 못한 자주독립의 꿈을 이어받고자 이곳에서 출발한다고 하면 당연히 환영받을 줄 알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 이것이 분단된 나라의 현실이고 이 모순을 풀 화두를 던지는 지점에서 내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이 모순을 조금이라도 내 발걸음으로 설명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날은 원장님이 사주는 점심을 먹고 비넨호프 궁전을 둘러보고 유스호스텔로 와서 여독(旅毒)을 풀었다. 여섯 명이 쓰는 방인데 4명이 들었다. 이태리, 영국, 아이슬란드, 한국. 다국적 방은 잠시 한국의 상황에 대한 토론장으로 변했다. 늦게들 들어와서 많은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또 하나의 분쟁지역인 영국학생과 아이슬란드 학생의 대화가 며칠 동안 어떻게 펼쳐질까도 아주 흥미진진하다.

 

헤이그는 세계 정치의 중심지이다. 이곳에 네덜란드의 정부청사와 국회의사당은 물론 외국 대사관들이 몰려있다. 이곳에 국제 사법재판소와 국제 평화회의장 그리고 국제형사재판소가 있다. 네덜란드의 정식 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실질적인 수도는 헤이그이며 많은 국제회의가 열리며 정치의 중심지이다. 이곳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로켓탄 발사기지로 연합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지금은 나무가 많은 유럽 최고의 도시로 거듭났다.

 

1905년 일본과 미국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로 할 테니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 천인공노할 밀약의 여파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945년 우리는 일제로부터 벗어났지만 바로 미군이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들어와서 분할통치를 하게 되었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 때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3인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불법성을 천명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시차 적응 때문인지 새벽 2시 반에 눈이 떠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 방해가 될까봐 노트북을 들고 살금살금 로비로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 5시 반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달리러 나갔다. 길은 아직 어둑어둑하였고 나는 방향을 스헤베닝언 해변으로 잡았다. 살갗을 스치는 8월 말의 헤이그의 아침 바람이 싱그럽다. 바다가 눈에 보이자 북해의 일렁거리는 파도 소리가 웅성거린다.

 

북해를 바라보며 나는 한참을 큰 호흡을 하며 명상에 잠겼다. 공식적으로 나의 출발은 9월 1일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하지만 이곳이 진정 유럽의 땅끝이라면 여기가 실질적인 나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동이 터오는 땅과 바다가 마주 보이는 저 멀리서 편서풍에 실려 오는 뭉게구름이 낮게 걸려있다. 바다 아래서 작은 불덩이가 서서히 솟아오르더니 그 뭉게구름 위로 오렌지 물감이 퍼져 나가면서 내 가슴도 오렌지빛 꿈이 번져간다. 평화의 한류 전도사를 자처하며 나선 길이다. 새벽이지만 금방 가슴엔 별이 뜨고 달이 차오른다.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끝에 서서 나는 두 손을 마주 잡아 가슴에 댄다. 손끝으로 가슴의 울림이 그대로 전해온다.

 

사람들은 바람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드넓은 바다 위에 배를 띄워 바람을 타게 했다. 먼 바다로 나가 청어를 잡기 시작했다. 해류가 바뀌면서 발트해에서 잡히던 청어가 북해로 몰려들은 건 네덜란드인들에게 행운이었다. 그러나 거저 오는 행운은 없었다. 그들은 영국인들과 청어잡이에서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다. 청어는 맛이 좋고 영양이 풍부했지만 빨리 상했다. 또 한 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한 어부가 개발한 앞이 꼬부라진 칼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청어잡이에서 영국을 물리쳤다. 이 칼은 한 번에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낼 수 있었다. 선상에서 바로 소금에 절여 염장한 덕분에 장기 보관이 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의 더치페이(Dutch pay)에는 슬픈 역사가 담겨있다. 네덜란드 국토 대부분은 저지대이어서 목축업은 물론 농사를 지을 땅도 없으니 먹을 것이 귀했다. 아무리 친한 사람과 식사를 해도 자신이 먹은 것만 돈을 지불하는 것도 벅찼던 삶이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바람을 타고 바다로 나가 청어를 잡았다. 네덜란드 인구의 1/3이 청어 잡이 어부가 되었다. 절임청어는 유럽 각지로 팔려나가면서 네덜란드인에게 부를 선사했다. 이 때 유태인들은 중요한 소금 상권을 장악하면서 경제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북해를 떠난 거대한 범선(帆船)은 이 세상 어디에도 다닐 수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범선을 타고 다니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바람은 풍차를 돌리고 장미와 튤립을 피워내며 네덜란드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나는 내 심장의 박동소리를 그 바다의 바람에 섞는다.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나는 두려움이 바람에 날아간다. 바람 사이로 들리는 내 가슴의 소리가 뱃고동 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행을 떠난다는 기쁨이 샴페인 병을 열었을 때처럼 솟구쳐 오른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c)시사타임즈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길거리에도 넘친다. 그 그림과 비슷한 얼굴들과 마주한 순간마다 젊음 특유의 불안함 속에 솟아나는 자신감과 피 끊는 생명력, 꿈과 희망을 담은 그리움. 왼쪽으로 얼굴만 살짝 돌려서 보는 이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얀 공막 안의 촉촉한 홍채, 푸르른 빛이 쏟아져 나오는 동공이 몽환적인 느낌으로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매혹적인 소녀들과 여기저기서 눈이 마주치고 미소를 주고받는 것은 여행자의 큰 행운이다.

 

호스텔의 조식은 가격대비 만족한 편이었다. 뷔페식이어서 푸짐하게 접시에 담아, 하나 남은 원탁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림에서와 같은 여인이 아침을 담은 접시를 들고 하얀 공막 안의 홍채, 푸르른 빛이 쏟아져 나오는 눈동자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자리가 없자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살짝 눈인사를 하며 테이블에 나와 마주하며 앉는다. 전쟁터에서도 로맨스는 있고 이런 모험 가운데서도 내 심장의 박동이 뛰는 한 로맨스는 있다. 처음의 어색함은 몇 마디 대화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우쿨렐레 연주자이기도 한 유치원 선생님 소냐는 주말이면 동호회 회원들과 유럽의각지의 공원을 찾아다니며 연주를 한다고 한다. 나는 유라시아횡단 평화마라톤에 나섰다고 하니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본다. 나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독일과 같이 나의 조국도 통일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달린다고 이야기를 하고 우리 가족사를 이야기하였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듣더니 자기도 사실 이산가족이라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폴란드인이고 2차 대전 때 아버지 형제들과 친척들은 다 죽거나 헤어져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여기저기 떠돌다 홀로 독일에 와서 정착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곳에 휴전선의 철조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냐도 나와 같이 이산가족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네덜란드인인데 농촌의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딸들은 교육을 시키지 않아서 독일로 무단가출을 해서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했다고 한다. 결혼한 후 부모에게 연락했지만 한동안 용서를 받지 못했다. 나중에 소냐를 안고 찾았을 때 비로소 받아주었다고 한다.

 

결혼과 가정을 전제로 한 여성의 삶은 유럽에서도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보편적 권리를 누리는 보편적 인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유럽에서도 일정한 신분 이상의 백인 남성만이 주권을 누리고 있었다. 여성은 생물학적 차이로 보편적 시민권을 갖지 못하고 공적 영역에서 차별을 받으며 사적 영역으로 유배를 당해야 했다.

 

소냐는 친척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외롭게 자랐다. 1년에 한 번 네덜란드의 외가에 방문하는 것이 다였는데 그때도 사촌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홀로 놀곤 했다. 지금은 휴가를 맞아 네덜란드 각지에 살고 있는 4명의 사촌과 2명의 외삼촌들을 방문하러 왔다. 1년에 한 번 만난 친척들이지만 핏줄은 애틋하다. 때로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한 시대의 보편적인 삶을 이야기한다.

 

오늘 하루는 이곳의 박물관을 둘러볼 것이라 해서 나도 오늘 일정이 없어서 같이 길을 나섰다. 식사 후 독일에서 온 소냐와 나는 진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러 미술박물관에 같이 갔다. 거리에 나서자 도시를 겹겹이 관통하는 운하와 그 주위에서 한가히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 바쁘지 않게 여기저기에서 돌아가는 두 개의 자전거 바퀴의 살, 커다란 나무와 작은 꽃들의 어울림이 바로 그림 같았다. 저 앞에 두 연인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란히 걷는다. 우리도 아주 오랜 연인처럼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그림이 되어 그림 속에 페이드인 되었다.

 

르네상스풍의 아담하면서 우아하며 고풍스러운 마우리츠하위즈 미술관은 비넨호프라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던 관청이 옆에 있고 뒤로는 연못이 운치를 더한다. 이 미술관에는 렘브란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렸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교실’도 있고 루벤스의 작품 등 미술에 문외한인 나도 알만한 세계적인 작품들이 전시되었지만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은 얀 베르메르의 ‘진주목걸이를 한 소녀’를 보기 위해서 일 것이다.

 

미술관에서 나오자 하늘에서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네덜란드에서 이런 날씨를 만나는 건 행운이라고 한다. 광장 주위에 늘어선 야외식당의 멋진 빨강 캐노피 아래서 ‘진주목걸이를 한 소녀’의 잔상이 남아있는 그윽한 눈으로 소냐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영화 ‘진주목걸이를 한 소녀’에서 오묘한 눈빛 연기를 펼친 스칼렛 요한슨의 눈빛만큼 오묘하지는 않지만 소냐를 소냐의 이국적 오묘한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먹는 청어 튀김 샌드위치는 음식 맛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묘한 맛이었다.

 

이제 오후에는 덴 하그 역에서 기차를 타고 그녀는 사촌오빠를 만나러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고 나는 내일이면 세상에서 가장 멀고 험난한 길을 떠난다. 나의 긴 여정을 마치면 그녀가 한국을 찾던지 내가 독일을 방문하던지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며 기차역 앞에서 포옹을 하지만 이 험난한 여정 중에 계속 연락을 할지 나도 모른다. 앞으로 유라시아를 거치면서 이런 만남과 이별은 수도 없이 이어질 것 같다.

 

다시는 재회하지 못할 연인의 떠나는 뒷모습처럼 찬바람이 지나간다. 이런 정도의 이별은 수도 없이 해보았지만 이별은 낯설고 익숙해지지 않는다. 쓸쓸하게 길을 건너 노천카페가 보여 자리를 잡고 하이네켄 한 병을 주문한다. 병마개를 따고 잔에 다르니 거품이 인다. 내 마음의 거품처럼. 거품을 바라보며 앞으로 마주칠 여정의 거품들을 생각하는 동안 맥주잔의 거품은 잦아들었다. 내 마음의 거품도 그렇게 잦아들었다.

 

이번 내 여정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지만 순간순간 일어나는 애틋한 마음을 감추는 바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단지 사랑에 빠지게 될 걱정으로 여자들에게 찌질한 모습을 보이는 바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사 이래 매혹적인 미인과 사랑이 인생을 망치는 예는 많았지만 사람들은 불나비가 불을 쫓듯 사랑을 쫓았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면에서 소심한 남자였지만 기왕에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떠나는 여행길에 한 가지 아름다운 위험을 추가해도 별 차이는 없어 보인다. 눈을 감으면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오아시스의 어느 곳에 오작교(烏鵲橋)가 보이는 듯하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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