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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56)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56)

양치기의 리더십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새소리도 싱그롭고 바람도 충만하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오늘 하루도 모든 것을 자비롭게 바라보자. 나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자신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타인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해야 삶이 풍요로워진다. 새소리가 아름다운 것은 타자를 향한 진한 그리움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것도 사랑을 찾는 것이리라! 이른 아침 공기가 맑은 것도 잠들은 삼라만상을 깨워서 함께 희롱하고 파서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파란 하늘과 초록의 초원은 지평선 끝에서 몽롱한 선으로 만났다. 트빌리시를 벗어나자 바로 대초원지대로 들어선다. 초원의 아침은 맑고 신선했다. 삼림지대와 사막의 중간지점에 나타나는 이런 초원 지역에는 수목은 없고 비가 내리는 봄철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만 여름철 건기에는 말라 죽어 불모지로 변한다. 푸른 초원은 내게 너무 강력하고 드넓게 펼쳐진 압도적이며 중의적이며 은유적이고 몽환적이며 수수께끼처럼 펼쳐져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초록의 지평선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자 답답한 가슴 활짝 열리며 시원해진다. 이런 곳에서는 말이 아니어도 달리고픈 본능을 제어하기 힘드리라! 양 떼들이 곳곳에서 한가히 풀을 뜯고 있다.

 

양 떼들 사이에는 목동이 하나나 둘이 항상 있다. 대게의 경우 한 사람의 목동이 하루 종일 양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드넓은 벌판에서 목동은 작대기 하나 들고 하루 종일 소일을 한다. 무료한 목동은 그 작대기로 돌멩이를 떼려 저만큼 있는 토끼 구멍에 집어넣기를 시도한다. 그것이 골프가 되었다. 이들은 끝없는 푸른 벌판에서 파란 하늘을 보며 내가 달리며 그러듯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몽상에 젖을 것이다. 하늘에서 선녀가 구름을 타고 내려온다든지, 알퐁스 도데의 ‘별’의 이야기처럼 주인집 딸이 점심을 싸가지고 왔다 돌아가다가 불어난 물에 개울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와 함께 밤새도록 별을 헤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든지. 그러다 이렇게 비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초자연적인 현상을 겪는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날 것이다.

 

내가 이런 악천후 속에 달리는 일이 일상이 되었지만 아직도 두려움을 벗어던지지 못하듯이 양치기들도 바람이 세차게 불거나 눈비가 온종일 내리며 갑자기 어두워질 때 두려움에 떨며 몸을 움츠릴 것이다. 이때 늘 몽상 속에 그리던 사랑스런 그녀는 아름답고 관능적인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잠시 모습만 보여주고 유혹하며 사라져가는 그녀를 소리를 부르며 쫓아가서 세우려 하면 그녀는 나무가 되어버린다. 또는 그녀가 가져다준 맛있는 점심을 정신없이 먹다가 보면 흙을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양 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는 벌판 한가운데로 뛰어들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달리고 있는데 송아지만 한 목양견 한 마리가 마치 늑대에게 달려들 듯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 저 멀리서 질주해서 내게 달려들고 있다. 긴박한 상황에서 주위를 둘러보니 개와 맞설 나무작대기나 돌멩이 하나 보이질 않았다. 아찔한 순간 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 개도 잠시 멈칫했고 양치기가 이쪽을 보며 상황파악을 한 듯 휘파람을 부니 금방 꼬리를 사타구니 사이로 감아 넣는다. 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시 달리다 마침 바로 길옆에서 양 떼와 함께 있는 양치기를 만났다. 양털처럼 곱슬곱슬한 수염을 가진 사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악수를 나누었다. 굵은 손 마디마다 초원의 거친 바람이 석회질처럼 굳어 박혀있었다. 손이 양의 발처럼 거칠고, 양처럼 순하고 초원의 하늘을 담은 푸른 눈을 가진 그에게서 양 특유의 냄새가 풍겨온다. 처음 익숙지 않은 냄새에 조금 역겨웠지만 곧 그 냄새가 치즈 냄새처럼 구수하게 느껴졌다.

 

지금껏 이렇게 초자연적이고 깊은 내면에 뿌리 박은 경이감이 깃든 눈빛, 불가사의한 눈을 본 적이 없다. 그 눈에 내가 빨려 들어가 그 깊고 아늑한 곳에 깃들고 싶어졌다. 목동들은 양을 변화시키지 않고 스스로 양처럼 동화되어 이 초원에서 살아간다. 얼마나 오랫동안 따뜻한 집에서 못 자고 허허벌판의 추위를 양의 체온을 부둥켜안고 잠을 잤을까? 그가 걸치고 있는 두꺼운 판초 우의는 이 거친 초원에서 그가 살아가는 몇 가지 되지 않는 생활필수품 중의 하나같았다. 변하지 않는 것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어떤 일들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이곳 초원이 그렇고 이 초원에서 살아가는 양치기와 양의 삶이 그렇다.

 

세 가지 유형의 양치기가 있다고 한다. 양 무리의 앞장에 서서 간다. 양치기가 방향을 잡고 선두에 서서 길을 인도하면 양 무리는 묵묵히 따라온다. 두 번째는 양치기는 양 무리의 뒤를 따라간다. 양 무리의 식욕에 맡겨두고 스스로 풀을 향해 이동하게 놓아두고 뒤처지거나 길 잃은 양들만 바로 잡아준다. 세 번째는 양 무리의 한복판에서 함께 간다. 양치기는 양과 소통하면서 양들의 상태를 파악하면서 단순한 동행이 된다. 그러면서 양들의 안전을 지켜준다. 행복한 양치기는 양 떼들의 한가운데 있으며 양 떼들의 눈빛을 읽고 그들의 냄새를 맡으며 양들 울음소리의 의미를 파악하려 귀를 기울인다.

 

양 떼를 자세히 보니 그 무리 속에 몇 마리의 염소가 섞여 있다. 염소란 놈은 질투가 심해서 자기 외에 다른 놈들이 사이좋게 붙어 지내는 꼴을 못 본다고 한다. 둘이 사이좋게 붙어서 몸을 비비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떼어놓는 일로 자신의 존재의 이유로 삼는다고 한다. 양이 서로 몸을 비비면 양털이 손상되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서 염소를 함께 키우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꼭 이 심술 많은 염소와 같다. 남과 북이 사이좋게 어울리는 꼴을 못 본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한참 달리다 보니 주머니에 핸드폰이 없다. 늘 핸드폰을 들고 뛰었다. 오늘 날씨가 추워서 점퍼를 입고 뛰느라 주머니에 넣었는데 어디서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아까 잠시 쉴 때 핸드폰을 보고 카카오톡으로 국내의 응원자들과 소통을 했으므로 그사이에 떨어졌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많은 것을 흘리고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찾으러 다시 돌아가지는 않았다. 내 육신의 피로를 더 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의 내게 있어 양치기의 지팡이보다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방향을 알려주었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창구였고 나의 모든 정보와 그동안 찍었던 사진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결국 10km가 넘는 길을 땅을 쳐다보며 오던 길을 되돌아갔지만 핸드폰은 찾을 길 수는 없었다. 현대판 양치기 지팡이 핸드폰을 잃어버리고 길을 잃은 기분이었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슬픔에 잠겼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초원은 어둠의 동굴처럼 깊었다.

 

푸른 초원을 지나자 어느새 황무지로 변했다. 아제르바이잔 국경은 한산하였지만 군인들이 입국절차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뇌리를 떠오르는 것이 ‘독제 국가’였다. 어렵사리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앞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거대하고 기분 나쁜 철문과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얼굴의 거대한 초상화였다. 철문은 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볼 일이 없겠지만 저 초상화는 국경을 빠져나갈 때까지 시시때때로 내 시야에 나타날 것을 생각하니 결코 기분 좋은 기억만 남기지 않겠구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떤 조사에 의하면 사회의 정의로움과 행복지수는 비례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존감을 느끼며 스스로 정당하고 당당하게 느낄 때 훨씬 행복하다. 행복할 때 더 창의적이다. 날씨는 며칠째 우중충하게 가는 비가 내리고 있고 사람들의 표정도 우울해 보인다. 입은 옷의 색상도 대부분 검정색 계통의 옷으로 어두웠고 사는 집들도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나라 어느 곳이라도 지하 3m만 파면 석유가 나온다는 산유국의 풍요로움은 찾을 수 없고 허름한 집들과 연식이 오래된 자동차들이 찌든 삶은 말해주고 있었다. 시커먼 매연을 내뿜고 달리는 자동차로 내 기관지는 몸살을 앓을 지경인데 검문소를 나오다 본 그 비호감의 사내의 대형 초상화가 또 나타나 야릇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듯하다. 사실 저런 비호감의 사내와 여자를 국내에서도 뉴스 때마다 봐온 나였지만 이렇게 적응이 안 된다.

 

인구 9백만 명, 크지는 않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참으로 독특하고 다양한 나라이다. 아시아인도, 이란인도, 터키인도 아닌 사람들의 생김새가 우선 오묘하다. 우울하며 경직된 모습 속에 감춰진 자유를 갈망하는 내면이 나그네에게 묘한 분위기를 금세 느끼게 한다. 반사막에 가까운 스텝지역에서 생산되는 기름은 아제르바이잔 국가경제의 큰 원동력이 될 것인데 사람들의 삶은 기름지지 않으니 거대한 초상화 속의 그 사내의 얼굴과 똥배만 기름지게 하는 모양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19세기 후반의 제정 러시아를 살찌우기에 안성맞춤의 지역이었고, 이후 구소련연방에 편입되어 1991년 독립할 때까지 그 착취는 계속되어왔다. 그렇게 원하던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아제르바이잔 국민들은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 전 역사를 통해 독립을 유지한 것은 통틀어 100년이 채 안 된다고 하니 이 나라 민족 수난의 역사가 나그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아제르바이잔도 우리와 같이 역사의 참혹한 상처를 안고 있는 나라이다. 우리와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으니 그것이 1,300만에 이르는 이산가족이다. 1828년 페르시아, 러시아 전쟁 결과 국토는 페르시아령과 러시아령으로 분리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남쪽 지역은 지금의 이란지역에,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러시아가 나눠 먹음으로써 나라는 두 동강이 나고 이산가족이 생겼다. 언제나 강대국들의 체스경기 같은 세력싸움으로 약소국들이 희생되는 처절한 생태계 형태가 지구의 역사에서 반복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제르바이잔도 분단국이나 다름 아니었다. 지금도 카스피해를 둘러싸고 있는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 나라들을 상대로 미국과 서방, 그리고 러시아가 살점 하나라도 더 뜯겠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양치기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칭기즈칸과 다윗 왕이다. 늘 양을 돌보며 몽상에 잠겨있던 이들이 큰일을 해낼 수 있던 원동력은 열정이다. 몽상 속에 그려지던 일들이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지성을 만나면 안개 속에 갇혀있던 희미한 산이 그 장엄한 자태를 드러내듯 진정한 영웅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기개와 지략은 양을 돌보는 따스한 마음과 그 마음에 드넓은 들판을 품고 눈에는 푸른 하늘을 담은 데서 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제로 서양이나 중동 쪽의 동화에는 목동이 왕이 되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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