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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7)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67)

테헤란의 밤 Teheran night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3월 1일, 이제 길 떠나온 지도 6개월이 지났다. 이때쯤이면 고향과 가족, 친구들을 향한 지독한 향수가 봄 바다의 물안개처럼 모든 걸 다 덮어버릴 정도로 깊어진다. 카스피해의 파도는 이렇게 미칠 듯이 밀려오는 그리움에 비하면 참 점잖고 온순한 편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밀려오는 그리움은 삶의 연금술인지도 모른다. 그리움 덕분에 강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니까. 사무친 그리움을 앓고난 뒤에 더 깊어지는 사람, 한때 눈물지었지만 웃으며 일어나는 사람, 그 사람은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렇게 시리도록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도 매순간 변화하는 눈의 즐거움과 매일 만나는 새로운 인연으로 위안을 얻는다.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은 거대한 장벽이 아니다. 우리 앞에 놓인 높은 산이 아니라, 신발 속의 작은 모래알이 발걸음을 중단시킨다. 나는 달리면서 수도 없이 신발을 털어내기 위해서 멈춘다. 지원 차량의 엔진 오일이 자꾸 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엔진 오일을 부어가면서 운전했는데 상황이 심각하다. 정비소에 들어가서 고치려고 물어보니 이 차는 외제 차라 테헤란에 가서야 고칠 수 있다고 한다. 테헤란에도 폭스바겐 서비스센터는 세 군데밖에 없다고 한다. 금요일 예배를 보는 이슬람의 나라 이란은 목요일 금요일이 공휴일이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오후 늦게나 테헤란에 도착하면 목, 금 쉬고 토요일 하루 작업을 한다고 쳐도 일요일이나 차를 찾을 수 있다. 이제 할 수 없다. 투르크메니스탄 비자도 간 길에 해결해야 한다. 마음의 여유를 찾아 떠나온 길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조급하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격언에 순종한다. 하늘이 내게 준 휴가라고 받아드리고 푹 쉬어야겠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테헤란에 도착하자마자 볼보 서비스센터부터 찾았다. 차 본넷에 붙은 세계지도 스티커와 ‘Peace Marathon’이라는 스티커를 보면서 직원들이 물어본다. 나는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끝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출발하여 6개월 만에 이곳에 도착했고 계속 한국까지 우리의 통일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달려갈 것이라 설명하였다. 직원들은 금방 입을 쩍 벌리며 사진을 찍자고 달려들었다. 직원들의 입을 통해서 내 이야기가 이란 볼보 지사의 CEO에게 전해졌나 보다. 얼마 있어 나와 면담을 하고 싶어 하니 한 시간쯤 기다려줄 수 없느냐고 연락이 왔다.

 

CEO는 통역과 홍보 촬영팀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나의 모험담과 한국의 상황 그리고 ‘주몽’이라는 드라마를 인상 깊게 본 이야기를 하다가 당신 같이 큰일을 하는데 한국에서 좋은 차도 많이 생산되는 데 왜 하필 볼보를 타느냐고 물었다. 필시 큰 후원금과 함께 한국 차량의 지원을 받으면서 달릴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을 거절할 만큼 볼보가 안전하다고 생각되었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을 말하지 못했다. 떠나기 전에 현대나 기아 자동차 회사에 몇 번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주말 특근을 하면서 차를 고쳐주었다.

 

지난번 테헤란에 왔을 때는 내 친구가 이란에 근무할 때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여자에게 내 이야기를 했더니 꼭 만나고 싶어 하니 만나서 저녁이나 같이하라고 했는데 연락을 못하고 와서 그녀로부터 다음에 올 때는 꼭 연락하라는 아쉬운 전화를 받은 참이었다. 그녀와 만난 곳은 테헤란에서 비교적 좋은 분위기의 이태리 식당이었다. ‘마단나’는 여동생과 같이 나왔다.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그녀는 식당 문을 들어서자마자, 눈동자가 마주치는 순간부터 나를 알아보고 내게로 다가왔다. 아마도 내 옷차림과 한국인의 생김새를 보고 대번에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래전에 내 친구 영국이와 근무하면서 한국인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생겨서 테헤란에 오는 한국 손님에게 음식 대접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했다. 페르시아의 두 공주님과의 시간은 꿈결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낯선 여인과의 만남은 호기심과 어색함을 동반하기 마련인데 마치 전생에 내가 신라의 왕자로 페르시아의 여인과 인연이 있었던 듯 어색함은 간데없이 금방 나의 평화마라톤 이야기며 이란에서의 느낀 점과 궁금한 일들과 그녀들이 한국에 대하여 궁금한 일 들 등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그녀는 내일 자기 조카 니샤의 9살 생일인데 혹시 내일 테헤란에 있으면 집에 와서 같이 저녁을 하며 파티를 즐기자고 하였다. 길 떠나온 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현지인들의 파티에 초대받아서 갔다. 파티는 그들의 삶의 일부를 엿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저녁은 9시가 넘어야 먹지만 그 전에 오면 스낵하고 음료수는 있으니 다과를 나누며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6시 반쯤 오면 좋겠다고 해서 시간을 맞추어 갔다.

 

이란에서 술은 꿈도 꿀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술이 있다는 말에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커졌다. 술을 어떻게 구하냐고 했더니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알려주면 보드카, 위스키, 맥주, 와인 다 준비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지금 몸이 많이 지쳐있어 독주는 못 마시고 와인이면 좋겠다고 했다. 6시 반은 저녁으로 이들에게는 무척 이른 시간이었다.

 

테헤란의 강남쯤 되는 토찰산 중턱의 번화한 동네였다. 일찍 도착한 아파트는 평수가 상당히 넓었다. 창문 너머로 테헤란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져 보인다. 남쪽으로 갈수록 생활 수준이 떨어진다. 우리는 어제 나누던 소소한 이야기를 이어서 나누었고 TV 채널에서는 히잡을 쓰지 않은 여자 가수가 파르시(이란어)로 노래를 부고고 있었다. 이란은 공식적으로 여자가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지난번 전통음악 옂주하는 식당에서도 여자는 구경도 못했었다. 두바이에 방송사를 두고 위성을 통해 방송을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9시가 다 되어서야 사람들이 부부 동반해서 왔고 내 눈이 말 눈보다 더 크게 만든 건 모든 여자가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단나 남편에게 이란에서 저렇게 입고 다녀도 되냐고 귓속말로 물어보니 거리에서는 종교 경찰이 단속해서 볼 수 없지만 개인적인 파티나 사교모임에서는 저렇게 입고 차를 타고 이동하여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간다고 한다. 이슬람의 율법은 많은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사람 사는 곳에서 금지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의 본능은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이고 살아가는 모습의 근본은 같다. 사람들이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인력으로 아무리 막아도 겨울 얼음장 밑에서 싹트는 생명과 같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즐기는 파티를 위해서 이란의 젊은이들은 많은 것을 각오해야하고 주도면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시대를 바꾸려는 혁명가들이 받던 고초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이란 경찰은 남녀가 모여 혼성 생일파티를 열었다는 이유로 150여명을 체포했다. 그들은 단지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여 음악을 듣고 춤을 추었을 뿐이다. 그것이 죄목이었다. 경찰은 다른 기관과 협조하여 체포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전에 혼성 파티를 열던 학생 30명이 체포돼 각각 채찍 99대를 맞은 판례가 있었다.

 

이란 사람들의 언어능력은 대단하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남녀가 다 영어로 소통이 가능할 뿐 아니라 몇 마디 한국어를 할 수 있다. 이란이 세계적으로 고립된 상황인데도 말이다. 술잔이 돌아갔고, 음악이 흘러나왔고 남자들은 모여서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고 여자들의 몸이 음악에 맞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쪽 한구석에서 후카 또는 시샤라 불리는 물담배의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우리나라 사람들 술잔을 돌리듯 파이프 담배를 돌아가면서 빨며 물에 타르가 걸러진 하얀 연기를 뿜어낸다.

 

여자들도 예외 없이 돌아가면서 하얀 연기를 빨아서 뿜어낸다. 나도 이들과 하나나 되는 의식으로 담배를 끊은 지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연기를 빨아드리다가 재채기를 하는 사고를 치렀다. 담배 연기가 가슴을 파고들고 와인이 핏줄을 타고 빠른 속도로 몸으로 퍼져나갈 때 ‘강남스타일’이 흘러나왔고 우린 모두 함께 두 손을 손목에서 교차하며 무릎은 약간 구부리고 엉덩이를 흔드는 신나는 춤을 추면서 하나가 되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그 중간 창건이가 한국노래를 두 곡을 불렀고 나는 ‘Love me tender’를 부르다 가사를 잊어버려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리 멀 것 같았던 테헤란이 이웃처럼 가까이 느껴지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처음엔 10시쯤에는 작별인사를 하고 미리 나오려고 갔는데 10시나 되어서 저녁이 나오고 저녁 식사가 끝나자 생일케이크 자르는 순서가 있었다. 시간은 11시가 넘었고 내가 마시던 와인 병은 비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한창 흥겨워할 때 우리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구화되고 부유한 세속 가정에서 종교적 엄숙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테헤란 밤하늘에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이 낯설지 않다. 테헤란에는 ‘서울의 거리가 있고 서울에는 ’테헤란로‘가 있다. 1973년 팔래비왕의 한국 공식방문을 기념해 강남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테헤란로라고 명명했다. 테헤란의 서울로는 3km에 이르는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중요 도로이다. 택시를 불러 타고 ‘서울의 거리’를 따라 양탄자를 타고 구름 아래로 내려가듯 차는 산 아래 숙소로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별빛 달빛에 빛나는 눈이 부시도록 푸른 타일로 덮인 모스크가 나그네에게 몽롱하게 꿈과 현실을 오고 가며 페르시아의 감동을 안겨주었다.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평화마라톤이 몸은 고되기는 해도 이렇게 중간중간 우정과 사랑이 싹트기도 하고 평화의 담론을 펼치기도 하며 거리의 간격을 마음으로 좁히는 보람으로 거친 그리움을 잠재운다. 감청색 하늘에 별이 송 송송 돋아나고 휘영청 밝은 테헤란의 보름달에 내 짙은 향수병이 걸리우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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