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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1)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1)

가장 아름다운 고독을 찾아 나선 남자의 운명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유령 같은 도시 아쉬하바드를 정확히 아침 7시에 출발하였다. 호텔 밖으로 나오자 내가 볼 수 없는 눈동자가 나의 등을 쏘아보는 따가움이 느껴졌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발걸음을 무겁게 옮긴다. 길은 잘 포장되었지만 인적은 드물고, 남량특집 영화처럼 기분 나쁘리만치 조용하다. 이곳에서는 나의 발자국 소리마저도 불경죄를 저지르는 듯했다. 무시무시한 카라쿰사막에 뛰어들면서 언제까지나 고요한 강물처럼 흐르던 내 달리기가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알 수 없는 지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한 발 한 발 묵묵히 달리는 일뿐이었다. 그 옛날 이 길을 걸었을 수많은 선조의 기도가 바람에 윙윙거리며 날리는 듯하다. 이 땅에서는 불경스러울 수도 있는 내 평화의 발자국이 봄날 모심기하듯 줄을 맞춰 촘촘하게 이 땅에 심어진다. 내 발자국이 이 땅을 지나간 것만으로도 나중에 평화의 황금들녘이 되기를 바란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아쉬하바드는 1948년 대지진으로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 곳이기도 하다. 나는 이란에서 모든 SNS 활동이 금지되어 빨리 이란을 벗어나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에 오자마자 이란은 양반이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더구나 차량에 부착된 위성 위치추적 장치는 나를 더욱 옥죄었다. 돌이켜보니 이란은 SNS가 금지되어있을 뿐 가장 친근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예로부터 투르크메니스탄은 사막에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오아시스를 연결하며 동서 교류 통로인 실크로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북으로는 낙양이나 장안에서 출발하여 안서에서 남도로 갈라진 후 쿠차를 지나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이곳에 이르렀다. 타쉬겐트, 사마르칸트, 부하라, 마리, 니샤푸르를 지나 이란을 거쳐 이스탄불까지 이어져 로마에 이른다. 이곳은 실크로드 교통의 요지이자 미래 유라시아 공영권의 주요 길목이다. 유라시아횡단 열차가 질주할 이곳이 지금 심한 동맥경화에 걸려있다.

 

투르크멘인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거주 역사가 오랜 종족이지만 강력한 통일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소규모 부락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다. 20세기 초 이 땅을 점령한 러시아 정권은 이 땅에 살던 호전적인 유목민들을 도시에 정착시키려 무척 고생했다. 정착을 시켜야 통치하기 쉽기 때문이다. 1990년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 나라 국토는 우리나라 두 배나 되지만 90%가 사막이고 나머지 목화밭이 조금 있을 뿐이다. 하지만 황량한 사막 밑으로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만큼 석유가 매장되어있다고 한다. 소련연방 시절에는 송유관이 러시아로만 연결이 되어 러시아 석유회사가 쳐주는 가격을 그냥 고맙게 받아썼지만, 중국이 자원외교를 펼치면서 가격을 올려놓았고 여기에 유럽으로 연결되는 송유관이 건설되면서 가격은 폭등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금방 돈방석에 올랐으며 미래의 경제 대국을 꿈꾸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그 돈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고 산업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이 나라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경찰과 군인 인력을 늘렸고, 깔끔하신 분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거리 청소부가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 검정색 차도 우중충하다고 싫어하셔서 거리에 검정색 차도 잘 보이지 않는다. 아쉬하바드 가정집에 매달린 위성 안테나도 도시 미관에 좋지 않다고 다 치우란 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국가적 비전이나 인류애도 없는 사람의 독특한 미적 감각을 맞추느라 아쉬하바드 시민들이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초원의 겨울보다 혹독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호텔로 찾아온 경찰이 아쉬하바드에서 나가서, 자라고 한 아나우에는 아무리 찾아도 호텔이 없었다. 100km나 이동하여 물어물어 찾은 민박집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줄 알면서도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대금을 지불하고 짐을 푼 순간 주인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 우리가 지불한 돈을 들고 나타나서 짐을 싸서 나가라고 한다.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경찰 전화가 왔다는 거다. 경찰이 위치추적장치로 우리를 감시하다가 여기서 멈추니 전화를 해서 쫓아내는 것이다. 외국인은 오로지 삼성급 이상의 호텔에서만 잘 수 있다고 하는데 아쉬하바드에서 쫓겨난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300km나 떨어진 카라쿰 사막 한가운데 있는 ‘마리’뿐이었다.

 

이 카라쿰 사막은 오랜 세월 수많은 대상의 인명과 낙타를 삼켜버리고 뼈만 토해낸 악명 높은 사막이다. 이곳에서 직선으로 뻗은 도로마저도 사막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앞이 노랗게 변했다. 300km를 차로 이동해서 자고 다시 와서 40여km를 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리도 친절한 데 여행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법과 제도가 나를 삼켜버리고 내 뼈만 토해내고야 말 것 같았다.

 

투르크메니스탄 구간은 포기하고 어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가서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나약한 생각이 자꾸 들었다. 내가 스스로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쫓아내 줬으면 핑곗거리가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 자신이 어떤 경계에 와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가장 아름다운 고독을 찾아 나선 남자의 운명이었다. 뜨거운 태양의 광휘(光輝)만이 내 고독과 좌절을 어루만져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 풀 한 포기, 시선을 끌 바위도 없는 황량한 곳에 가끔 모래 폭풍이 친구를 하자고 다가오지만 내가 아무리 외로워도 그런 무례한 것들과는 상종을 안 할 것이다. 하루 42km 이동하는 내가 300km나 떨어진 곳에 숙소를 정하고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감시를 하는 그들이 노숙을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의 절망적이었다. 지금 내 몸은 파김치보다 더 늘어졌으며 상황은 목동들에게 들이닥친 초원의 겨울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그러다 하루만 더해보자고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250km를 되돌아가서 달리면 얼마 못 달리겠지만 하루 달리고, 다시 노숙을 해보고 하루 더 달려보면 해결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 3월 13일, 250km를 차로 달려가서 자고 다음 날 다시 되돌아가서 25km를 달렸다. 하루 500km에서 450km를 차로 이동하고 더 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그 자리에서 비 내리는 길거리에 차를 세워놓고 차에서 쪼그리고 하룻밤 잤다. 이렇게라도 엄습하는 피로를 품을 수 있는게 좋았다.

 

차에 위치추적장치가 있었으므로 경찰들은 우리가 어디서 자는지 알 것이다. 할 수 없었다. 내가 지금 감당할 수 없는 피로에 절어있다는 것만이 현실이었다. 나 스스로는 포기할 수 없는 사내의 자존심을 그나마 지킬 수 있는 길은 추방당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결에 경찰이 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여기서 우리를 쫓아냈다면 나는 싸움이라도 할 판이었다. 다행히 그는 곤한 잠에 방해가 되지 않게 아무 말도 없이 확인만 하고 갔다. 그 다음날 40km를 달리고 나니 이제 숙소까지 거리가 많이 줄어들었고 다시 완주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쉬하바드 근교에는 도로가 잘 포장되었더니 조금 벗어나니 형편없었다. 달 분화구처럼 표면이 패인 도로 위에도 대형 트레일러는 쉴 새 없이 다닌다. 길옆에 젊은 아낙들이 보자기를 펴놓고 사막에서 채취한 버섯을 팔고 있지만 그런 여인들을 자주 보다 보니 눈치라는 것이 있어서 그녀들이 팔고 싶은 것이 버섯이 아니라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럭을 길가에다 세워놓고 흥정을 하던 사내를 따라 여인이 어린아이를 업은 채 사내를 따라 트럭으로 올라탄다. 팔고 싶은 것이 아니라 팔 것이 그것밖에 없으리라! 대부분 이런 여자들은 시리아 난민들이다. 트럭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여인들의 피가 빠르게 맥박치는 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듯하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꼬마 여자아이가 저만치 뛰어가더니 낯선 사람이 지나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하얀 엉덩이를 내놓고 용변을 본다. 내가 민망하여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여자아이가 눈 똥을 누렁이가 금방 먹어치웠다. 초원의 마을에서 수세식 변소를 찾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보다 더 생뚱 맞는 일이다. 재래식 변소도 거적때기로 앞을 가리긴 했지만 가리는 것이 그리 중요한 일 같지 않았다. 눈길만 돌리지 않는다면 다 보일 정도이다.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 일을 보겠는가? 사막에서 문명은 얼마나 하잘것없는 오만인지! 자연에서 온 것은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순환의 원리만 존중받을 뿐이다. 조금 전 똥을 꿀꺽한 녀석이 내 뒤를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따라온다. 녀석은 혹시 내 그것의 맛도 보고 싶어서일까?

 

초원의 유목민은 억세고 강인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힘들다. 오늘도 한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버드나무 회초리로 낙타를 몰고 천진난만하게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아이에게 가축은 친구이자 놀이기구이자 직업교육이 장이다. 이들은 여름에는 가족 단위로 평원에 흩어져 가축을 먹이고 산다. 겨울이 오면 산의 남쪽 언덕과 계곡 사이에서 집단으로 모여 월동을 한다. 가족 단위 부족을 이루며 어떻게 협동하며 살아가는지 어려서부터 배운다. 그래서 유목민은 집단의 귀속성과 개인의 생존능력의 두 다른 의식이 그들의 문화와 삶 속에 같이 존재한다.

 

목화의 계절은 분명 아니었는데 목화를 실은 대형 트랙터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유목민들은 태생적으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오아시스 마을과 공생을 하며 살아간다. 마을은 물건과 사람과 정보, 문화의 교차점이다. 종종 유목민은 유동성과 집단성이 강해 활쏘기, 말타기 기술이 결합되어 군대로 변신하면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총과 화약이 등장하는 근대 이전에는 유목민 집단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기동군단이었다.

 

3월 15일 다시 힘을 내어 35km로 일정을 마무리하려는 참에 이민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나라는 3일 이상 체류하는 사람은 등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등록을 하지 않아서 비자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당장 이민국으로 오라.”는 것이다. 등록은 국경을 넘어오면서 끝난 줄 알았다. “이 사람들 정말 힘들게 하는구나! 차라리 추방해주면 고맙겠다. 만약 이나라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은 글들을 쓴 것이 문제가 되어 노트북을 압수당하고, 추방은 안 시키고 남영동 분실 같은데 가둬버리면 어떻게 하나.” 겁이 덜컥 나서 우리나라 대사관에 연락했다. 적어도 누군가는 나의 위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검문소를 지나고 나니 그곳에서 이민국 직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차를 따라오라고 한다. 이민국은 시 외곽에 으슥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두려움의 외투를 벗고 나선 길이지만 따라가면서 간담이 서늘해졌다. 군인들이 업무를 보고 있어서 들어서면서 잔뜩 긴장했지만 이들은 비교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에의 바른척하다가 순간 안면을 바꾸는 것이 조그만 권력을 가진 자들의 속성이니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다행히 그곳에 지하실이 있는지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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