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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2)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2)

 

혜초의 길, 마르코 폴로의 길, 나의 길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저늠의 태양은 왜 벌써 뜨노! 피곤해 죽겠는데 말이다. 하루쯤 쉬어도 될 것을! 분주한 늙다리 바보 같은 이라고! 불평하면서 오늘도 나사가 다 풀어진 기계 조각같이 힘 빠진 육신을 불굴의 의지로 추스려 또 길을 나선다. 길은 지평선까지 직선으로 뻗어가면서 점점 가늘어지다 점만 남겨놓고 사라졌다. 그 까만 점에서 달걀노른자 같은 태양이 솟아 나왔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리 강건한 의지라도 반의반 토막으로 잘라지기 십상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마리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마라톤의 영성(靈性)의 은총에 감사하며 달리고 있다. 그 옛날 혜초 선배와 마르코 폴로 선배 그리고 칭기즈칸이 지나간 길이다. 그 옛 선배들도 마리로 향하면서 가물가물 꺼져가는 생명을 혼신의 힘으로 붙잡았을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오아시스가 나온다는 희망이 그 원천이다.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힘을 낼 수 있다. 마리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카라쿰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이다.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로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갔고 여기서 종교 정치 문화 경제, 사랑이 뒤섞였다.

 

마리야말로 물질적, 정신적, 지리적 실크로드의 중심이며 과거 유라시아의 광역생활권의 중심지였다. 실크로드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었다.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불상에서 그리스풍의 간다라 미술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유라시아 광역생활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몽골제국 때는 유럽에서 북경까지 촘촘하게 만들어진 역참제를 이용하여 3개월이면 주파했다고 하니 과거의 세계는 지금보다 더 글로벌하고 다이내믹한 세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닫힘과 막힘이 없는 대지 위를 끝없이 달리면 생각과 상상력조차도 막힘이 없다. 이런 곳에서는 두 팔이 저절로 벌어지며 심연을 향해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게 된다. 이곳의 맑고 깨끗한 공기로도 내 번민과 좌절은 다 씻기어 나가고 성스럽고 순결한 큰 호흡을 하게 된다. 이때쯤이면 황량한 벌판에 세차게 부는 바람과 내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벌판의 유일한 벗 바람과 함께하며 번뇌 망상을 다 내려놓고 서로를 마주하면 바람도 오랜 연인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바람은 나보다 더 자유로워 지평선 저 너머를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초원의 풀과 그 풀을 뜯는 생명에 지대한 힘을 불어넣는다. 바람은 언제나 바람둥이처럼 온 세상 만물과 사랑을 나누고는 내게 시치미를 뗀다. 나는 그런 바람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다. 텅 빈 공허의 시간에 비로소 귀가 열린다. 내 안의 소리가 들려오고, 미물의 작은 속삭임이 들려오고, 세월의 구름이 유유히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미물에 불과한 내가 우주로 확대시킬 신비로운 기운으로 충전될 것 같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이곳에서 혜초 선배와 마르코 폴로 선배, 칭기즈칸과 시공을 초월한 조우를 꿈꿔왔다. 이들이야말로 유라시아가 배출한 슈퍼스타이기 때문이다. 이들과 원탁에 마주 앉아 유라시아 광역생활권과 유라시아의 평화에 대하여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내 안에는 오랫동안 숨죽여 살고 있는 혜초와 마르코 폴로, 칭기즈칸이 살고 있었다. 그 거물들을 다 가슴에 품고 숨죽이고 사느라고 내가 그간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모른다.

 

나는 혜초 선배와 영매를 이루려 달리면서 독경을 수없이 암송한다. “마하반야밀다심경 관자제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언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망 불생불명불구부정부증불감...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나의 독경 소리는 사막의 침묵 속으로 고요히 스며들었고, 사막의 공허 속으로 나의 공허를 밀어 넣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피안에 도달하였네. 아!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렇게 끝없이 독경을 하면 당시 약관 20에 해로를 통해 천축국으로 들어갔다가 4년간의 여정을 마치고 이 길로 돌아갔을 24세 청년 배낭여행자 혜초와 격한 만남의 시간을 가질 것 같다. 때로 바람을 타고 목탁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기도 한다. 그 소리에 내가 지금 그러하듯이 이 막막하고 먹먹한 환경에 혜초도 두려워하면서도 가슴 떨렸을 그의 심장의 박동 소리가 배어난다. 이곳에서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언제라도 일어날 것 같아서 더욱 두렵다.

 

두려움에 떨면서 달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갑자기 목탁 소리와 함께 청아한 목소리의 독경 소리가 들려온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물주름 잡인 모래 언덕과 관목뿐이다. 순간 피부에 소름이 돋는다. 머리털을 잡고 있던 피부조직의 힘이 다 빠져 머리털이 맥없이 빠져나갈 것 같았다. 정신적인 대머리가 된 것처럼 머리가 허전하다. 옛 선인들은 이렇게 환청이 들리면 죽음이 부르는 것이라 했다. 환청을 따라 자기도 모르게 걷다 보면 일행과 헤어져 해골로 발견되기 일수였다고 한다. 다시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두려움에 떨면서 손을 모으는 순간 소리의 진원지는 손에 들린 핸드폰인 것을 알았다. 독경을 암송하다 막히면 인터넷 검색으로 보곤 했었다. 하지만 소리로는 검색한 적이 없었는데 더위에 핸드폰이 맛이 살짝 갔던 모양이다. 내가 맛이 간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것은 분명 환청은 아니었지만 어떤 우주적 회로의 연결에 의해서 들려오는 소리이다. 어떤 절대적 힘이 이곳을 지나가는 내게 들려주고 싶은 가치일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걸출한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혜초는 광저우를 떠나 하이난섬을 거쳐 베트남과 말레이반도를 지나, 벵골만을 거쳐 바이샬리에 상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길은 해양 실크로드로 알려진 길이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대식국 페르시아를 거쳐 이곳 마리를 지나 파미르를 넘어 둔황을 거쳐 장안에 도착했다.

 

도로가 이렇게 잘 깔린 지금도 먹고 자는 곳을 찾는 일이 이렇게 힘든데 그 옛날 이 길 자체가 생사를 넘나드는 순례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험로였으리라! 아마도 그는 대상들의 무리와 동행을 했을 것이다. 대상의 무리는 단순한 장사치뿐만 아니라 여러 부류의 사람이 동행했을 것이다. 불교의 본산에서 보고 듣고 공부해서 온 세상에 광명을 펼치겠다는 의지가 젊은 혜초의 발걸음에 힘과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그 옛날 인도로 법의 보배를 찾아 나서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그러니 평화의 보배를 찾아 나선 나는 아무 투정 없이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길 따름이다.

 

어쩌면 이 길을 지나가는 것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구법의 길을 나선 대부분의 승려는 생불이 되는 대신 사막에서 해골이 되었다. 후배 스님들은 앞서 길을 떠난 스님들의 해골을 보면서 이정표 삼아 두렵고 외로운 발길을 옮겨야 했다. 중국 해동고승전의 기록에 의하면 또 다른 신라승 아리나발마는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에 이르렀다. 그가 간 곳은 ‘나란타사’라는 최고의 승가대학이었다. 불교의 요체를 배울 수 있는 불교의 중심지이다. 그곳은 현장법사도 공부를 한 곳이기도 하다. 아리나발마는 거기서 다양한 경전과 논서를 공부하여 고국으로 꼭 살아 돌아가 큰 뜻을 펼치고 싶었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아쉽게 생을 마쳤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베네치아의 무역상인 마태오 폴로와 니콜로 폴로 형제는 콘스탄티노플의 정세가 불안해질 것을 예견하고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중국으로 떠나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마침내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이르렀다. 쿠빌라이칸을 알현한 이들은 어느 날 종교를 논하다 교황의 서신과 토론을 벌일 그리스도교 사제 백 명을 데려올 것을 약속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백 명의 토론자를 데려오지는 못했지만 열일곱 살의 니콜로의 아들 마르코와 함께 몽골로 돌아왔다. 몽골인들은 이들을 환대했고 서방과의 교류에 관심이 많은 쿠빌라이는 소년 마르코를 총애하게 되었다. 그들은 쿠빌라이를 따라 제국의 수도, 북경으로 갔다. 중국에 17년을 체류한 이들은 칸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거절당하다 타타르 국의 아르센 2세가 황제의 공주 코카친을 아내로 맞고 싶다는 서신을 보낸다. 마르코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이 공주를 수행하여 타타르 국까지 안내하겠다고 청했다.

 

실크로드 여행가로는 단연 최고의 여행가로 명성을 얻은 이는 마르코 폴로이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동부 지중해의 무역권을 두고 제노바군과 전쟁을 벌일 때 베네치아 해군에 입대하여 전투를 벌이다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무료한 감옥 생활 중에 마르코 폴로가 들려주는 뻥을 가미한 동방의 신비스러운 이야기는 단연 최고의 인기였다.

 

마르코 폴로가 세계적인 여행가로 알려진 것은 운도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만난 영국 작가 ‘루스티첼로’는 그가 들려주는 동방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하여 ‘동방견문록’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책은 출판되자마자 동방의 신비스러운 이야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쿠빌라이가 제위에 있던 시대상을 적당히 잘 묘사하고 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메르브는 마리와 이웃한 도시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이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기 전 여행자라면 ‘마리는 메르브와 이웃한 도시이다.’라고 썼어야 옳았다. 대부분 비와 바람과 세월 속에 사라져버렸지만 이곳은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따라 형성된 오아시스 도시 중 가장 잘 보존되어있고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불교 유물이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기원전 3천 년부터 발달한 메르브는 실크로드를 잉태했다. 그리스와 로마, 인도와 중국을 잇는 중심축이 바로 이곳이었다.

 

제국의 야망을 품은 자 이곳을 지났고 차지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아케메네스 왕조가 그랬고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차지했다. 이후 인도의 쿠샨왕조의 거점이 되었으며 이곳은 11~12세기 셀주크튀르크의 수도였을 때 가장 전성기였지만 1221년 이곳에 침입한 칭기즈칸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에는 화려한 역사를 뒤로하고 공허한 폐허로 버려지다시피 남아있다. 칭기즈칸은 가장 잔인하게 이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천 길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운명의 원조라고 부르는 오이디푸스마저도 ‘나는 누구인가?’ 무릎 꿇고 처절하게 물었다. 내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자가 혜초였다. 그가 내게 “인과 연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지므로 일체는 공(空)하다.”고 가르쳐주기도 하고 “법은 곧 우주에 가득 찬 진리 그 자체이다. 만유의 생명력이고 자비력인 까닭에 광명과 다르지 않다.”고 가르쳐주기도 한다. 유라시아에 가면 세상 모든 미녀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뻥을 친자는 마르코 폴로였다. 평생 후회하지 않을 진기한 것으로 가득 찼다고 나를 유혹한 자도 그였다. 칭기즈칸은 내게 유라시아를 가슴으로 품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자신이 핏빛으로 물들였던 곳에 평화의 불빛으로 가득 채워주길 참회하며 갈구하였다.

 

나는 이들과 이 모래바람 휘날리는 황량한 카라쿰사막 한복판에서 만나 유라시아 광역생활권에 대하여 가슴을 맞대고 대화를 하려 땀을 뻘뻘 흘리며 신들린 듯이 달리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아침에 유라시아 특급열차를 타고 달려와 점심은 이곳 마리나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쯤에서 먹고 저녁은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전경을 내려다보며 와인을 곁들인 식사를 하는 아주 소소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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