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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8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78

비단길은 세계적 스타의 산실이었다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누구나 밖으로 내뱉지 않으면 가래처럼 숨통을 막을 고뇌가 있다. 나는 그 가래 같은 것들을 뱉어내기 위해서도 사막이 필요했다. 인간의 한계를 알기에 가톨릭에서는 신의 대리자로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한다. 나는 사람을 신의 대리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내 스스로 신과 마주하길 간절히 소망했다. 때로 신부조차도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기에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될 가래 같은 것들이 있다. 소설 가시나무새에서 랄프 신부는 이렇게 고해성사를 한다. “나의 메기! 나의 가장 큰 죄는 내가 사랑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거야. 난 사랑보다도 야심이 중요했지, 알고 있으면서 밀고 나갔지. 운명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시사타임즈

 

격류에 휘말려 허우적거리며 떠내려가는 상황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곳에 서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내가 보인다. 어깨를 활짝 펴고 맑은 두 눈동자로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깊은 하늘을 품는다. 길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피는 꽃을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른다. 내 얼굴에서 사라졌던 편안한 미소가 나타났다. 내가 실종되었는지도 몰랐으니 실종신고도 못 하고 너무 오랫동안 나를 잊고 살았다. 하늘을 보니 그때 풀지 못한 하늘에 그려진 생의 비밀을 풀 암호가 풀릴 듯도 하다.

 

아주 옛날 어느 골목길을 서성이며 품었던 그리움이 다시 이곳에서 피어난다. 사랑은 훗날 아픈 기억으로 남겨질지도 모르지만, 사랑했기에 더 그리워질지도 모르지만 내 마음에 사랑이 피어난다. 알 수 없는 설레임이 가슴에서 요동을 친다. 우즈베키스탄은 아직도 우리에서 낯선 나라이다. 그러나 친근감이 가고 신비하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나라이다.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는 짧은 두세 달의 여름 동안 생명들의 삶이 이어지고 나머지는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는 땅으로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을 넘어야 했던 실크로드, 실크로드의 중심 사마르칸트의 역사에 우리 조상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그 발자국은 지금 다 바람에 날아갔지만 바람에 배어있는 역사가, 그들의 진취적인 정신이 나를 여기까지 유혹하여 끌고 왔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시사타임즈

 

이 길을 건너간 비단은 백 곱절의 가격으로도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고, 이 길은 상인이 건너면 거상이 되었고, 승려가 지나면 고승이 되었다. 이 길을 헤쳐나간 자 영웅호걸이 되고 천하 제왕이 되었다. 이 길을 건너간 커피와 홍차가 세계적인 음료가 되었고, 국수와 만두가 세계적인 식품이 되었다. 목화가 이 길을 건너며 의류의 소재로 각광을 받으며 추위를 이기게 해주며 멋을 더해주었다. 이 길을 건너간 초코파이와 라면 또한 그러하다. 한국의 드라마와 K Pop이 이 길을 건너가 돌풍을 일으켰다.

 

이 길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스타의 산실이었다. 이 길을 지나오면서 쓴 여행기는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고전으로 남아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면서 다른 문학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의 현장법사가 당나라를 몰래 빠져나와 16년간 서역의 1백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인도에서 불경 600여 부를 가지고 돌아온 이야기를 그의 제자 변기가 기록한 것이 대당서역기이다. 이것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며 신화화 되고 오승은이 소설로 썼으니 그것이 바로 서유기이다. 그것이 다시 진화하여 드래곤볼이 되고 허영만의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가 되기도 했다. 이 길을 지나온 이야기는 동화가 되고 전설이 되었으며, 소설이나 영화가 되었다. 이 길은 지나온 종교는 세계 종교가 되었고, 이 길을 건너온 발명품은 세계 문명을 바꾸어놓았다. 철이 그랬고 종이가 그랬고 화약이 그랬다.

 

이 비단길에 결코 비단이 깔리지는 않았지만 거친 황무지를 목숨 내걸고 건너서 살아온 자는 부와 명예와 권력 중 최소한 하나는 손에 쥐었다. 살아서 가지지 못하면 죽어서라고 면류관을 썼다. 이곳에서는 죽었다가 부활한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었다. 폐차처분된 한국이 버스들이 부활하여 우즈베키스탄의 길을 달린다. 차에는 한국의 폐업한 지 오래 되는 기업이나 상품 광고가 부활해서 그대로 실린 채 달린다. 이곳에서 부활한 것은 버스나 자동차뿐이 아니다. 사람도 이곳에서 부활한다.

 

이곳을 지나갔던 혜초도 천년 후 기적같이 부활하게 된다. 둔황의 천불동에서 그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면서이다. 그리고 그의 꿈과 도전이 내 마음속에서 부활하여 내가 지금 이곳을 달려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한국을 배우려 열공 중이다. 마을마다 한국어 학원들 간판을 찾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부나 기업에서는 한국의 시스템이나 성공사례를 배우기 위해서 열공 중이다. 한국에서 은퇴한 정부 관료나 기업 간부들이 은퇴 후 이곳에 와서 부활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시사타임즈

 

 나는 죗값을 꼭 감옥에서 치르는 것에 반대한다. 건설에 일가견이 있는 전직 대통령을 이곳 사막에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재능기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위상도 높이며 죄값을 치루는 방법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불교적인 내용 이외에도 그가 보고 느낀 각 지역의 풍습과 생활, 사회제도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중인도에서는 어머니나 누이를 아내로 삼는다거나, 여러 형제가 아내를 공유하는 이색적인 풍습 등이 기록되어 있다. 혜초는 카슈미르에는 노예제도나 인신매매가 없다는 이야기도 한다. ‘왕오천축국전은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가 중국의 둔황의 천불동에서 발견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원본은 3권이었는데 현재 남은 것은 약본이며 그마저도 앞뒤가 떨어져서 전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초로 인도를 순예한 중국의 승려는 법현이다. 그는 육지로 인도에 갔다가 바다로 와서 불국기를 남겼다. 현장은 육지로 갔다가 육지로 와선 대당서역기를 남겼고, 의정은 바다로 갔다가 바다로 와서 남해기귀전을 맘겼다. 혜초는 바다로 인도에 갔다가 육지로 돌아와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아무다리야강을 건넌 혜초는 안국 부하라를 경유하여 강국 사마르칸트로 입성한다. 사기에 대월지국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파미르를 넘어서 중국으로 들어갔고, 그 전에 당나라와 혈전을 벌이던 연개소문의 사신들이 이 파미르를 넘어 우즈베키스탄으로 왔다.

 

그리고 이곳에 큰 족적을 남긴 이로 고구려의 유민으로 당나라 총사령관이 된 고선지가 있다. 1,300여 년 전 한반도는 지금처럼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당태종이 동아시아를 모두 평정했지만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나라가 고구려였다. 당시 당나라는 지금의 미국과 비견되는 나라이다. 지금 미국에 유일하게 맞짱뜨는 나라가 북한인 것도 우연이라기에는 절묘하다. 신라는 나제동맹을 깨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고구려를 압박하고 있었다. 당나라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을 견제하는 동맹 세력이 절실하였다. 그는 동맹국을 찾으러 몽골의 초원을 거쳐 서역까지 사신을 보냈다. 실제로 661년 제2차 고당 정쟁 중 돌궐의 부족 철륵이 당나라를 침공하여 당나라군 일부가 철수하는 바람에 고구려가 전쟁에 승리하기도 하였다.

 

아프라시압 궁전터에서 발견된 서벽의 벽화에 조우관을 쓰고 환두대도를 찬 사신의 모습이 고구려의 사신임을 잘 설명해준다. 중앙에는 바르후만 왕과 돌궐 왕의 모습이 크게 그려져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벽에는 당나라 공주로 추정되는 인물이 배를 타고 있다. 당시 바르후만 왕은 등거리외교를 펼치며 돌궐과 친하면서도 당나라에서 벼슬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평양성과 사마르칸트까지는 약 8,00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 당시 열악한 환경에서 우리의 조상들은 조국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필사의 외교전을 치르러 이 먼 곳까지 온 것이다.

 

고구려의 유민인 고선지가 어떻게 당시 세계 최강의 당나라 군대를 이끄는 총사령관이 됐고 실크로드를 호령하는 영웅호걸이 될 수 있었을까? 무사가 되어 무공을 세우고 그 나라에 충성하는 일만이 나라를 잃은 유민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고선지의 삶은 중국 서부의 간쑤성 우웨이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중국과 이민족의 전쟁이 끊임없이 펼쳐지던 곳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시사타임즈

 

그의 아버지 고사계는 처음에 하서군에 하급 군인으로 근무했다. 그 뒤 고선지는 안서도호부로 이동하는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서역 깊숙이 이주했다. 1,300년 전 고선지는 1만의 대군을 이끌고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해발 평균 4,000m나 되는 파미르 고원을 행군했다. 그가 이끄는 1만의 당나라 대군은 747년 여름 1만의 적군이 기다리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난공불락 와칸계곡 절벽을 타고 넘었다.

 

이곳보다 더 높은 산은 에베레스트산일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악지역이다. 고선지가 싸워서 이기지 못할 상대는 없었다. 무려 72개국의 나라가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던 그가 지금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탈라스강에서 닷새 동안의 치열한 전투에서 당과 연맹을 맺은 부족의 배신으로 고선지의 당나라군은 패하고 말았다. 중국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은 이때부터 상실하게 된다.

 

이 전투 이후 승리를 거둔 이슬람 제국은 사마르칸트에서 중국의 포로 중에 제지 기술자를 모아 제지공장을 지었다고 한다. 이 공장에서는 중국이 비밀로 지켜왔던 종이 제작법을 이용했다고 전해진다. 종이 사용이 이슬람 세계에 전파된 것은 이 무렵이었고, 이후 13세기에 유럽으로 전달된다. 이슬람은 이때부터 양피지에 무함마드의 계시를 담는 대신 종이에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의 제지기술을 받아들이면서 관료는 공공문서를 체계화하고 상인은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이슬람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내가 지금 이 길을 건너고 있고 내 가슴 속에는 하늘이 인간에 내려준 궁극의 철학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이 있다. 그것은 나를 넘어 내 가족과 이웃과 모든 세상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광명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 정신이 이 길을 건너고 나면 곧 다가올 4차 산업혁명 이후 평화 시대 곧 개벽세상이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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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