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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임도건 박사의 경계선 뷰(View)] “졸혼,” 존혼(存婚)의 대안이 될 수 있나?

  [임도건 박사의 경계선 뷰(View)] “졸혼,” 존혼(存婚)의 대안이 될 수 있나?

 

▲임도건 박사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임도건 박사] 잘 찍은 광고인데 팔리지 않은 제품들이 많다. 제품에 대한 각인효과는 남겼지만 실제 구매로 이어지진 않은 것. 완성차 제조사인 현대·기아차의 현실이다. 광고에서처럼 우리 사회에도 뜨거운 이슈지만 공론화되지 않은 게 있다. 졸혼*卒婚이다. 필자의 이야기를 에두른 것이 아니냐고 예단할 수 있겠으나 그 정도는 아니다. 익명의 하릴없는 오해까지 해명할 필요는 없기에 그냥 넘어가겠다.

 

 

3포/5포 세대의 결혼만큼이나 황혼이혼이 커다란 이슈가 된 요즘, 필자 주변에도 유사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지인들이 있다. 졸혼은 더 이상 회식자리만의 메뉴가 아니다. 똑 부러지는 답도 없는데 그냥 들어주자니 찝찝하다.

 

 

결혼은 상대에 대한 ‘이해심’ 부족 때문에 하고

이혼은 서로에 대한 ‘인내심’ 부족 때문에 하며

재혼은 과거에 대한 ‘기억력’ 부족 때문에 한다.

 

그런데 이혼도 재혼도 아닌 졸혼은 양면성을 모두 지녔기에 다루기 어렵다. 짬뽕과 짜장면의 공존인 짬짜면의 등장이랄까? ‘결혼의 졸업’을 처음 주창한 주인공은 일본작가 스기야마 유미코다. 그는 졸혼을 “가정생활을 송두리째 바꾸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자, 한 곳을 바라보며 움직였던 일심동체가 개인으로 돌아가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길이라 했다. 심지어 결혼을 과거와 다른 모습으로 지속가능하게 하는 대안이라 했다. 일본과 우리사회를 수평 비교할 수도 없을뿐더러 작가 자신의 특수한 체험을 과도하게 일반화하는 것도 무리다.

 

졸혼은 급성 내출혈을 유발하거나 위중한 입원을 막는 예방의학이기도 하다. 근래 유명인들이 커밍아웃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박미선-이봉원, 백일섭-채미영, 이외수-전영자, (고)신성일-엄앵란 부부 사례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유명인사가 아닌 평범한 가정에도 다가 온 현실이다. 자녀양육이나 종교적 신앙 때문에 법적 이혼과 정서적 결별 사이에서 고뇌하는 중년들. 대놓고 인정할 수도 없고, ‘쉬쉬’하다가 대형 사고를 칠 수도 없다. 비굴한 은폐보다 솔직한 고백이 용기라지만 선택과 결단은 쉽지 않다.

 

용기와 객기는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용기가 부정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라면,

객기는 구겨진 자존감의 과대 포장이다.

 

 

미련과 끈기도 다르긴 마찬가지다.

미련이 분별없는 우왕좌왕인 반면

끈기는 일관되게 목표 지향적이다.

 

장애인 배우자를 요양원에 맡기거나 주말 부부 등, 피치 못 할 경우까지 직무유기로 몰아붙일 일도 아니지만, 교묘하고 비루한 별거까지 졸혼으로 호도하는 것도 인간도리가 아니다. 은퇴 후 가장 사랑받는 남편은 청소나 설거지를 도와주는 게 아니라 집에서 “나가”주는 것이란다. 단순한 도덕적 잣대로만 졸혼을 ‘변장된 이혼’이라 폄하할 수 없다. 이른바 중년은 100세 시대의 새로운 빙하기다. 툰드라의 추위를 이겨낼 대책이 없다면 얼어 죽기 십상이다. 성경이 말한 일부일처제도 일부다처제(polygamy)를 허용한 아프리카에서는 예외다. 일부일처제는 평균수명 50세 시대의 유산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에서부터 그와는 별도로, 인간기본권에 대한 존중이 있다면 졸혼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이견이 분분하다. 문제는 극단의 주장들이 하나 같이 인권과 선택의 문제로 호도된다는 점이다.

 

졸혼이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대안이자 ‘따로 또 같이’를 뒷받침하는 가치라며 긍정하기도 하지만, 무슨 개소리냐며 일축하는 부정적 보수층도 존재한다. 졸혼, 치졸한 이기주의의 끝판 왕인가 불가피한 차선책인가? 정서적 결별과 법적 이혼 사이에서 온존한 가정의 대안이 될지, 일탈을 위한 탈출구가 될지는 두 가지로 결정된다. 은퇴 후 자기만의 취미와 콘텐츠가 있는가? 별도의 주거공간에 살면서도 정신적으로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는가?

 

따로 살 경제적 여유와 정신적 자신감이 없다면 일탈은 필히 이탈로 이어진다.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일탈이지만, 정상 궤도를 벗어나면 이탈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대놓고 말하기 불편한 졸혼. 기술신뢰와 애국심 사이에서 일본차 구입을 망설이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개인적 선택이라면 막을 수 없으나, 공개적으로 권장해 대세로 자리 잡기엔 시기상조다.

 

글 : 임도건(Ph.D) 박사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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