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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임도건 칼럼] 스마트 시대의 역설

[임도건 칼럼] 스마트 시대의 역설

▲임도건 박사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임도건 박사] 스마트폰 쓴다고 모두 스마트하지 않다. 알뜰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알뜰 폰 써도 옷, 핸드백, 구두 살 때는 물론 해외여행과 회식자리에선 결코 알뜰하지 않다. 초등학생도 안다. 희망소비자가격은 아무 소비자들도 희망하지 않는 가격임을.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밴드, 블로그, 카페, 텔레그램 등,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SNS)의 내용 대부분이 “먹-방” 내지 유명장소를 방문한 사진들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대부분 퍼온 내용이다. 한 사진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사진은 거짓말하지 않지만, 거짓말쟁이도 사진은 찍을 수 있다.”

 

한 시대의 단면이자 역사해석에서 현장검증의 유용한 도구인 사진이, 정작 현실왜곡이나 오도의 주범인 경우도 많다. 포토샵이나 편집기술의 발달로 진짜가 가짜 같고, 가짜가 진짜 같은 장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의 잠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화가와, 현실의 순간을 담아내는 사진작가 사이에, 어떤 예술이 더 우월하냐를 놓고 싸운 적도 있다.

 

말이 되는 역설들이다. 신용카드를 쓰는 사람 중에도 신용불량자가 있고, 약속을 어기면서도, 그런 걸 문제 삼는 당신이 오히려 더 문제라며 핀잔을 준다. 뻔뻔함이 당당함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반면 식사약속을 지키고도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하지 못했다며 수줍어하는 “괜찮은 소수”도 있다. 말 그대로 ‘A few good man.’ 톰 크루즈 얘기가 아니다.

 

불가피하게 약속을 못 지킨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약속을 깼음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그것도 모자라, 그래서 뭘, 어쩔 건대라며 죄책감은커녕 맞장 뜨는 사람도 있다. 상식이하의 행동마저 관행이나 인권으로 치부되는 역설.

 

건물은 높아졌으나 인격수준은 낮아졌다. 고속도로는 뚫렸으나 시야는 좁아졌다. 소비는 늘어났는데 더 가난해졌고, 집 평수는 커졌으나 가족 간 대화는 줄었다. 학력은 높아졌는데 상식은 사라지고, 정보는 많아졌는데 판단력은 잃었다. 주5일제 근무인데 여가시간은 줄었다. 패스트푸드가 늘어남에 따라 소화불량과 비만도 증가했다. 수입의 상당부분을 다이어트와 건강관리에 쏟아야 할 판이다.

 

시대의 역설 중 가장 큰 것은 스마트한 몰상식이다. 약속파기도 변종의 거짓말이다.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거짓말인데 가장 쉽게 속는 관행이 식사약속이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 이 말은 ‘당신에게 관심이 많지만, 내 쪽에서 날짜와 시간을 잡기엔 번거로우니, 당신이 날짜와 메뉴를 정해서 문자로 알려주면 (엄청 바쁘지만) 시간 내 볼 게요’의 우회적 표현이다. 회사에겐 채무불이행, 공무원에겐 직무유기, 은행에서는 부도나 연체(default)에 해당한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기관이건 예약취소(No showup)는 경범죄다. 식당주인 입장에서는 인원수대로 준비했는데, 정작 오지 않으면 아까운 음식을 어찌하랴? 호텔이나 항공권 예약취소도 마찬가지. 위약금 청구를 강제할 순 없지만, 약속취소에 따른 사후통보 미고지 등, 의도적 거짓말에서 면피용 변명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의 불신용 수준이 심각하다. 처음부터 계산된 행위는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비의도적 의무위반이다.

 

그럴싸하게 거짓말 하면서도 전혀 죄의식이 없는 이유는 부조리한 인간본성이, 불리한 결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최소한의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학사일정에 매여 사는 필자에게, 약속 파기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이유로 자기 편할 대로 일정을 변경하거나 취소하는 사람을 보면 상당한 불쾌하다. 시간이 돈이라는데, 남의 시간을 훔치면서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도둑이다.

 

신이 아닌 이상 앞일을 예측할 수 없다 해도, 발생 가능한 플랜B나 대안도 없이 무작정 약속을 남발하는 것은 선심성 인격살인이다. 정치인들이 공약 안 지키는 것은 거품물고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실수나 약속 불이행에 대해서는 어쩜 그리도 너그러운 건지? 이해하지 못 할 바 아니나, 정당화될 수 없다.

 

두 번 이상 식사했는데 가까워질 수 없다면 그 관계를 의심해 보시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편이 더 행복하다. 한때 미워하고 비판했던 사람이 세월 속에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내가 현재의 내 모습이 아니었듯, 내가 미워하고 비판하는 상대 역시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고 내일 또 변할 수 있다. 이해와 용서란, 나와 세상은 물론 그 사람도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 이제 허세를 벗고 ‘나다움’을 찾을 때다.

 

글 : 임도건(Ph.D) 박사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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