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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칼럼] 인간중심철학의 3대 창조적 원리

[칼럼] 인간중심철학의 3대 창조적 원리

- 정치에 투자를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원래는 인간중심철학은 세계관을 포함하여 4가지 원리로 설명하여야 한다. 그러나 세계관은 별도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자연관, 인생관, 사회관의 3대 기준의 구조조정을 중심으로 논급하고자 한다. 

 

 인간중심 정치철학의 세계관(정신<의식>에 대해) '존재론'으로 유물론과 유신론을 인간론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자연관으로 인간은 개인적 존재이자 집단적 존재로 개인주의(민주주의)와 집단주의(민주주의)를 통일한 것이다.

 

 인간관으로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밝혀 사회과학을 자연과학과 통일하는 것이다. 맑스는 자유를 '자각된 필연'이라고 보고 '전기의 법칙' 예로 들었다. 자유는, 인간의 인식, 자유의 발전에서, 창조적으로 인간의 발전에 중요하다.

 

 사회관(정치관)으로 형식논리학과 변증법논리학을 통일한 것이다. 정지상태의 논리, 운동상태의 논리를 발전상태의 논리로 통일한 것이다. 여기서 동양철학과 서양철학도 발전의 변증법으로 통일할 수 있다.

 

공자는 인간중심철학의 창시자이다.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세계관(신관)(stability performance)  자연관(물질·자연개조, material performance  인간관(정신·문화개조, citizenship performance)  사회관(사회·정치개조, democracy performance) 인간의 생명력의 강화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 명백한 진리에 대해

 

이제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정치분야에 관해서 인간중심철학으로 먼저 정리해보고 경제분야에 대해서도 설명해보기로 하자.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똑똑히 알지 못하고 힘들다고 한다. 아주 명백한 것으로 이것이라도 똑똑히 알아야 되겠는데 자꾸 딴 소리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명백한 진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가 필요하다. 의심할 수 없는 전제로부터 이론이 출발해야 한다.  사람이 먹고 살아야 한다, 사람은 자식을 낳아서 키워야 한다, 사람의 관계를 개조해야 한다. 이보다 더한 명백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 외에 딴 무엇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 속하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막연히 옛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얘기하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두고 어렵다고 한다. 어렵다는 사람은 공부시킬 필요가 없고 마음대로 내버려 두자. 그것 자꾸 얘기하게 되면 낡은 사상을 무슨 큰 보배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 이를 빼앗는 것으로 되어 오히려 더욱 싫어한다. 계속 낡은 사상 가지고 있으라고 하고 우리는 평화통일을 위해 미래로 나아가자.

 

어려울 것이 없다. 양심을 가지고서 진실성을 갖고 진리를 알자고 하는 사람이게 되면 차근차근 공부해나가면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학 등 낡은 지식은 개조를 해야 된다. 공자이후의 학자들은 다 공자보다 못하다. 왜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는지? 주자가 최고의 학자인데 왜 그렇게 힘들게 만들었는가? , , 太極이 어떻고 하면서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공자는 그런 것이 없다. 실천을 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종교도 다시 한번 종교개혁을 하여야 한다.

 

실천과 떨어진 책임을 못지는 말만 하는 사람들이 그 무슨 가치가 있는 사람이겠는가? 실천적으로 하지도 못하고 뭘 시키면 책임도 못지는 사람이 뭐 유식한 사람인가? 명백하게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기초로 해서 출발해야 한다. 기초가 다르니까 이해를 못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이것을 분간하지 못하는가?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힘든 철학이 되었다. 왜 이런 것을 믿는지 모르겠다.

 

결론만으로 글을 쓰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러나 출발점을 똑똑히 인식하고 줄거리를 찾게 되면 힘들 것이 없다. 더 쉽게 쓰자고 하면 쉬울 것 같지만 더 힘들다. 쉽게 쓰기 힘들다. 물론 반복해서 설명해 나오게 되면 30배는 더 이상 되는 책이 될 것이다. 더 쉽게 그러나 더 간단하게 만들자면 더 힘든 것이다. 논어는 몇 줄 안 되고, 쉽지만 진리가 담겨 있다.

 

同學堂이나 學同會館 같이 배우기 위해 모이는 장소에서 같이 공부하는 사람은 긍지감을 높이고, 따라오지 않은 사람을 굳이 강요할 것이 없다. 낡은 물이 많이 들어가지 않고 진실하게 공부를 하자는 사람, 진리를 알자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유명한 사람을 고를 것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 진리를 알자는 사람을 맞이하도록 해야 한다.

 

인터넷보다 사람이 직접 만나서 얘기를 해야 한다. 예수교가 발전을 한 것은 신문을 발간해서가 아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산골로 다니면서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포교가 되었다. 쉽게 신문과 잡지를 내고 하지만 누가 읽는가? 사람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녹음을 한 것 가지고도 안 된다. 직접 얘기하고 듣는 것하고는 전혀 차이가 난다.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노력한 것만큼 공부가 된다. 제일 가깝게 뜻을 같이 할만한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여기 이런 동학당이 중요하다.

 

 

 

. 정치와 3대 창조적 생활(활동)

 

인간이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3가지 창조적 활동을 하여야 한다.

 

하나는 자연을 개조함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생활수단과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먹고 살아야 하겠는데 따라서 자연을 개조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은 명백한 진리이다.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 다음에는 사람을 낳아서 키워야 한다. 그냥 내버려두면 인종이 멸망한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낳아서 키우고, 그런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만이 아니라 집단이다. 집단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개조하는 사업을 자꾸 개선해 나가기 않고서는 살 수 없다.

 

 3가지 창조적 생활방식이 필요하다.

 

이것보다 더 명백한 것(진리)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식으로 출발하지 않고 자꾸 관념론적으로 하나님이 어떻고 하면서 나오니까 사람이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나오고, 심지어는 묘자리 운운하면서 나오게 된다. 이런 식으로는 인간중심정치철학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이제 출발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출발을 위해서 자연개조를 하여야 되겠고 인간개조를 하여야 되겠는데 인간개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인간을 낳아서 키우는 정신개조와 인간은 개인만이 아니라 관계를 갖는 집단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를 개조해야 된다. 이는 경제전, 사상전, 외교전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동경대전의 3전론(三戰論)(도전(道戰), 재전(財戰), 언전(言戰))이 그런 것이다.

 

그러면 사회적 관계를 개조하는 사업이 무엇인가? 사회적 관계를 관리하고 개조하는 사업이 정치이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라는 것이 정치만의 관계인가? 경제관계도 사회적 관계이지고, 문화적 관계도 사회적 관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는 정치가 다 관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지금까지는 혼동해왔다. 사회적 관계는 인간의 이해관계에 관한 것으로 정치가 관리해야 한다. 그런데 자연을 개조해서 물건을 만들고 그것을 팔고 사고 봉사활동을 하고 이것은 경제적 분야이다. 그것을 정치가 관여하여 통제하여서는 안 된다. 그것을 직접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남의 물건을 훔쳤다, 협잡을 해서 그 사람의 재산을 빼앗았다면 이것은 누가 책임을 지고 해결하여야 하는가? 자본가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해결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관계의 이해관계에 관한 것, 목적을 어떻게 설정하는가 하는 것은 이것은 다 사회관계에 관한 것이다. 자연을 개조하고 개조된 물질을 교환하는 것은 경제분야인 것이다.

 

대학 교수를 정치가가 가서 하라면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대학교수가 할 사업이다. 그러나 대학교수가 강의를 잘못했다면 여론이 환기되어 이런 사람을 대학교수로 남겨두는가? 이럴 때는 정치가 개입해야 한다. 노동자가 자본가가 서로 싸운다면 이것을 노사관계에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일차적인 책임이 정권에 있다. 여기서 사람의 관계를 취급하는 것이 정치이다. 자연을 개조하여 나눠먹는 것은 경제가 해야 한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문화분야가 하여야 한다. 교육, 과학, 도덕, 문학, 이것들이 사상문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1. 자본가의 출현: 자유에 대해

3대 생활의 역사를 회고하건데 봉건말기에 상품화폐관계가 발전했다. 그러나 그 때 사람들의 생활에서 제일 요구되어지는 중요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분제도에 의해서 자유로운 활동이 억압되어 있었다. 주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능력이 있는데도 신분제도로 통제되어 있었다. 아무리 재간이 있어도 농사꾼은 농사만 지어야 하고 노예는 노예신분에서 벗어날 수없었다. 그래서 해방을 요구했는데 이것이 자유이다. 자유를 얻어서 무엇하겠는가? 자기가 노력해서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주 문제가 경제문제의 첫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거기서 앞장선 사람이 자본가이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대중이 요구하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니까 정권이 간섭하지 말라, 소유권은 절대적이다, 내 땅, 내 물건이다, 그러니까 간섭하지 말라, 자본가가 다 한다, 시장에 나가서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 너희들은 도둑이나 살인강도를 잡고 질서를 유지하는 말하자면 경찰역할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이 정치로선이 옳았다. 정치(정권)가 다른 할 것이 없었다. 정치가 개입할 필요가 없었다. 자산가가 일해 먹고 사는데 정치가 관계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질서만 세우면 된다는 것이다. 사회관계, 사회관리에 있어서 정부가 할 일은 정치적 질서를 세우는 것, 결투를 못하게 하고 법적 질서를 세우는 문제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서는 자본가들이 경제는 자본가에게 맡겨라, 정치가들은 상관하지 말라, 정치가들이 소설을 쓴다면 우리가 쓰겠다며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문화인들 데로 신문기자들은 신문언론에 관한 것은 신문사에 맡기라고 하였다.

 

 

2. 케인즈주의(수정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맑스주의

그런데 이제는 의주 문제는 전반적으로 볼 때 다 해결된 셈이다. 이제는 그 때와는 시대가 달라졌다. 시장경제라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게 되었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도 자본가들이 자꾸 경쟁을 해서 식민지 쟁탈전을 하게 되니까 정권이 개입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본가들이 시장의 독점을 위하여 투쟁을 할 때 정권이 뒷받침해주었는데 이것이 제국주의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큰 손실을 보았다. 이것이 1차대전, 2차대전이다. 그래서 1차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의 케인즈(Keynes)라는 사람이 나와서 이렇게 자유로운 경쟁만 하게 되면 자본주의가 망한다고 하여 정권이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세금도 누진세로 하여 수입이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이 세금을 거두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실업자 없이 다 취업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한 것이 케인즈주의이다. 상품을 만드는데서도 유효수요라는 것이 있어서 지불능력이 있는 수요에 맞게 생산해야 한다. 그래서 케인즈주의를 수정자본주의라고 했다.

 

그런데 케인즈는 시장을 넓히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이것만 주장하다 보니까 정부의 채무가 자꾸 늘어났다.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하다 보니까 그 뒤 정권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하여서는 안 되겠다며 케인즈주의를 악마라고 하니 케인즈의 조국인 영국에서 케인즈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발생으로 된다.

 

또 이러한 결함들을 극단으로 비판한 것이 맑스주의이다. 개인주의를 집단주의로 바꾸자고 나온 것이 맑스주의이다. 개인주의를 집단주의로 바꾸면 다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집단주의로 나가니까 딴 결함이 나타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 개인의 창발성을 억압하는 과오를 범했다. 거기서 맑스주의자들이 인류발전에 큰 손실을 끼쳤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개인주의의 부족한 점으로 이들 나쁜 측면을 공격한 데는 일리가 있다.

 

 

. 인간중심철학을 통일학(국학)으로

 

이런 문제를 다 극복하고나서 새로운 사상을 생각해야 하겠는데 이런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뭐 사상이라고 하면 공산주의사상 밖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을 더 이상 설복할 필요가 없다. 그런 이들은 정권만 달라지면 주관 없이 다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진리를 사랑하여 진리를 알자고 하여 공부하려는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진리를 알자는 사람을 한 두명이라도 단결해서 학습을 같이 하여야 한다. 명백한 진리로부터 출발해야 되겠는데 한낫 알지도 못하면서 명백한 진리없이 다른 소리만 하고 있는 사람들과는 대상을 해서는 안 된다.

 

스탈린이 소련공산당 약사(略史)를 쓰면서 철학부분을 제4장에 넣었다. 그런데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 대해서 쓴 것인데 물론 스탈린이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당대 학자들을 동원해서 쓴 것이다. 물론 스탈린은 공부를 한 사람이다. 자기가 다 보고서 옳고 그런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 책을 돌렸다. 그러자 학자들이 어떤 도깨비 만난 놈이 이것도 철학이라고 썼는가 하며 떠들어댔다. 그 때 스탈린이 썼다고 하자 아 천재적 노작이라고 했다. 정권만 바귀면 다 따라가는 그런 것이 군중이다.

 

헤겔이 얘기한 것이 변증법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사람도 없고 자연도 없는 조건에서 절대적인 힘(정신)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을 만들어내고 자연도 만들어낸다고 했는 데 이렇게 한 것이 맞는가? 그래도 칸트 자신은 물질세계 자체는 모른다고 했다. 칸트는 그래도 성운설(星雲說)까지 낸 물리학에서도 상당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정직하게 말했다. 그러나 헤겔은 사람이 낳기 전에, 자연도 있기 전에 절대정신이 있어서 이렇게 세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슨 권한을 가지고 그렇게 말하는가? 그런 것을 가지고 무슨 큰 진리라도 되는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인간중심철학을 일부 사람들이 마치 북한학의 과목으로 되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북한 정세를 연구하는데 이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북한학의 문제인가? 여기 사람들이 사상을 개조하는데 이 철학이 첫째로 필요한 것이다. 세계의 개인주의자들의 사고를 바꾸는데 필요한 철학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은 국학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신념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맑스주의라고 하는 것이 국학이 아니고 무엇인가? 국학이라는 말은 지도사상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앞으로 고쳐가야 되지 않겠는가? 누가 고치겠는가? 사회관계를 개조하는 것으로 사회관계를 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인간중심철학의 3대 개조사업의 하나인 정치가 고쳐야 한다. 단순하게 보이지 않는가? 경제분야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누가 해결하겠는가? 재판소에 가서 해결해야 한다. 재판소는 국가이며 정권인데, 이 사회관계의 불합리한 점도 정권이 책임지고 고쳐야 한다. 노사간의 관계도 다 정권이 고쳐야 한다. 이를 무책임하게 자본가들과 서로 협상하라는 것은 자본가들은 원래가 상품을 팔아먹는 사람들이기 때문에(지금 자본가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출신이 그렇다는 것이다) 흥정하는 것밖에 모른다. 작금의 정상회담을 볼 때 자꾸 흥정만 하고 있지 않은가?

 

원칙이 없다. 흥정을 할 것이 아니라 3대 개조사업의 원칙에 따라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을 명백히 구분해주어야 한다.

 

 

1. 맑스주의와 노동운동: 자본론 3

우리가 맑스주의를 경원하지만 맑스주의의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가? 그 전에는 폭력시위라는 것이 없었다. 맑스주의가 나오기 전에는 폭력시위가 없었다. 제일 먼저 노동자들이 시위를 한 것은 챠티스트운동이다. 챠티스트운동이라는 것이 헌장을 바꾸는 운동이다. 챠터라는 것이 헌장이다. 그래서 폭력시위가 아니다.

 

그런데 맑스주의가 자꾸 자본가를 타도해야 된다, 폭력으로 타도해야 한다, 폭력을 자꾸 주장하니까 그 때부터는 노동조합에 들어간 사람도 물리적인 힘을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되었다. 자기 희생도 수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이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독재를 반대한다는 미명하에서 그렇게 한다. 사실 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이 무질서이다. 폭력은 동물세계의 법칙이다.

 

맑스는 인간의 노동만이 가치를 창조한다고 생각했다. 가치란 귀중성이다.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업소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는데 그것은 다 노동이 창조했다. 노동자에게 지불한 노동가치보다도 더 많이 창조한 가치가 잉여가치이다. 기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할 수 없다. 자신이 일했는데 감가상각 즉 마모된 것만 보상하는 것 말고는 없다. 자본주의이론이 전부 이런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런 설명이 맞다고 할 수 있는가?

 

현대적인 공장에서 노동자가 일한 노동력이라고 하는 것은 4%밖에 안 된다고 한다. 해방 전에 삼척의 세멘트 공장에서 1년에 8만톤 생산한다고 하지만 실지는 4만톤도 생산하지 못했다. 한주일 가다가 기계가 멈춘다. 내화벽돌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60년이 지난 지금은 돌산 자체가 없어졌다. 큰 굴뚝도 없어지고, 산이 있는 자리에 굴뚝을 세웠는데 이것도 거기서 먼지가 나온다고 현재는 굴뚝이 없이 기계화되어 지금은 50년대에 4만톤도 생산하지 못하던 것이 1,100만톤을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종업원수는 그 때보다 적다.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 화학공장들도 기계들이 작업을 대신함으로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그저 보턴만 누르면 된다. 그래서 단추를 누르는 노동자들이 가치를 생산했다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 식으로 해서 노동자가 일을 다 하였다하여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면 이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니까 발전된 기술이 생산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 무슨 진리인가하는 것이다. 기계자체가 인간과 떨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의 창조력을 체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감탄할 만한 것은 이렇게 잘못된 이론을 철저하게 끌어나간 것이다. 두툼한 책들이 다 그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자본론은 3권으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에는 이익을 어떻게 자본가들에게 나눠 갖일 것인가를 두고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데 지대론 같은 것은 참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하다. 그런 논리를 철저하게 끌고 나갔다. 그 이론에 압도된 양, 이것은 대단한 이론이다 하면서 말이다.

 

2. 종교와 경제: 헤겔, 공자, 아쇼카, 예수

헤겔이론도 틀린것인데 그 이론을 철저하게 끌고 나간 것이다. 두꺼운 책들이 그런 논리이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때때로 괜찮은 진리가 담긴 말들이 나온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이것이 무슨 진리인가? 국민들한테 확실한 목표를 주는 것이 없지 않은가? 천도교에서처럼 5가지 구호인 사인여천(事人如天),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 포덕천하(布德天下),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해가는 것이 어느 종교보다도 명백하다.

공자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서 실천을 하고, 수운선생은 자기 목숨까지 바치지 않았는가? 그런 것을 강조하고 그런 방향으로 발전을 시켜야 하는데 딴 종교를 또 따라간다. 무엇 때문에 신격화하는가? 종교가 일정한 단계에서 긍적적인 역할을 한 것은 우리가 부인해서는 안 된다. 동물과 비슷한 상태에서 종교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가?

 

인도에서 불교에서 통일을 한 사람이 아쇼카 대왕이다. 당시 불교의 경전을 다 모아서 통일시킨 사람이다. 뉴델리에 가면 아쇼카호텔이 제일 큰 호텔이다. 이 사람이 인도를 통일하다보니까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목숨 죽이는 것과 같이 했다. 자기 이복동생이 100명이 있었는데 99명까지 죽였다. 그렇게 하고 자신의 궁녀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화초들을 조금 꺾었다고 해서 죽였다. 하루는 한 사람의 동생이 지방으로 도망가서 살아 남았는데 어느날 한 중이 궁궐 앞으로 지나가자 아쇼카왕이 호기심이 나서 불러 따져보니까 자신의 동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동생이 불교의 이치를 아쇼카왕에게 얘기해서 그래서 경전을 모으고 불교를 통일시키는데 기여하게 된다. 그래서 경쟁본위의 야수적 생활에서 살벌한 정신을 신성하게 만드는 데서 불교가 활동한 역할이 크다. 석가모니는 힘든 설교를 하지 않았다. 아주 쉽게 했다. 예수도 그 누구보다도 쉽게 설교를 했다.

 

 

그래서 이제는 경제에서 경제관계도 인간중심철학의 방향으로 나가야겠다, 지금 자본이 팔리지 않으니까 다른 뒤떨어진 나라로 나가기 때문에 여기서 실업자들이 나오게 된다. 전 인류로 볼 때는 그것이 옳다. 뒤떨어진 나라에 자본을 가지고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옳다. 그러나 한 나라로 볼 때는 그렇지 않다. 한 나라로 볼 때는 자국에서부터 실업자를 없애야 한다.

 

또 여기서 실업자라는 것이 꼭 육체를 가지는 사람만의 실업자가 아니다. 지금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계들이 만들어낸다. 기계는 우리의 창조력이 객관화된 것이다. 기계를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계가 실업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놓고 보면 실업당한 것이 많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또 자본가는 기업활동을 하여 실업자를 내거나 기술수단들을 사장시키지 말아야한다. 땅가진 사람이 땅을 소유했다며 경작도 하지 않고 이용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에 이것을 계속하여 땅가진 사람들은 그대로 손놓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원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절대 신성불가침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다. 재산권으로서 이용권을 주는 것은 괜찮다.

 

3. 인간중심의 경제철학: 성선설(집단주의)과 성악설(개인주의)의 통합으로

그러면 이제 경제문제를 좀 인간중심철학의 논리로 얘기해 보기로 하자.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큰 테두리에서 말하게 되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장점을 이용해야 한다. 개인의 장점을 보호하고 발전시키지 않고서는 집단이 발전할 수 없고, 집단이 위력을 가지지 않고서는 개인이 발전할 수 없다. 그런데 자꾸 하나만 생각하고 다른 편을 소홀히 하는데 문제가 있다.

 

우리 동양 철학에서 성선설과 성악설이 대단히 중요하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생명이 귀중하다. 개인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다. 개인주의적인 본성과 집단주의적인 본성이다. 그래서 전자를 본 사람은 인간은 이기주의다. 자기 몸만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딴 측면을 보게 되면 인간이 동정을 한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게 되면 동정을 한다. 길가에 넘어진 사람을 보면 동정을 한다. 이것을 볼 때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

 

하나는 집단적 존재로서의 특징을 강조한 것이고 또 하나는 개인적 존재의 특징을 강조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로 오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게 된다. 이것이 역사발전에 거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치다 보니까 집단의 통일과 협조를 약화시켰다. 이것을 고치는 방법이 무엇인가? 개인주의에 치중했다 해서 집단주의로 바꾸자고 한 것이 맑스주의이다. 바꾸는 것을 두고 독재의 방법으로 바꾸자고 하다보니 맑스주의가 후퇴하게 된다.

 

이제와서는 개인주의의 장점과 집단주의의 장점을 결합시켜야 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옹호하면서 집단의 통일과 협조를 강화해야 한다. 그러니까 경제분야에서도 개인주의의 좋은 점을 살리고, 집단주의의 중요한 점을 살리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법칙적으로 말하면 가치법칙을 정확하게 관철시키도록 하고, 다른 하나는 계획적 균형적 발전을 보장하도록 해야 한다. 균형이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개인주의사상에는 균형이라고 하는 사상이 원래 없다. 균형이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 4 지도사상부를: 인간중심철학의 집체교육(가치법칙)을 위해

 

1. 인간중심민주주의 경제: (시장)개인주의와 (계획)집단주의의 창조력을 높혀야

그럼 집단의 통일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정치사상부 터 창설·강화해가야 한다. 우리 인간의 특성에서 정신적 생명력, 물질적 생명력, 협조적 생명력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정신이다. 정신을 통일시켜야 한다. 사상을 통일시켜야 한다.

 

사상이란 무엇인가? 이해관계에 관한 지식이다. 공동의 이익이 무엇인가? 개인의 경우에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집단의 경우에는 공동의 이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기의 개인주의 민주주의가 나올 때는 필요 없었다.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안다며 자유만 주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협조를 하여야 한다. 협조가 중요하다. 그러자니까 공동의 목표를 내세워야 하는데 공동의 목표라는 것이 공동의 이해관계다. 공동의 이해관계는 사상으로 통일시켜야 한다. 그것이 지도사상이며 지도이념이다.

 

집단이 통일되자면 통일적인 지도이념이 있어야 한다. 공동의 목적을 제시하는 지도이념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소홀히 한다. 공동의 목적, 공동의 이해관계를 사상을 통해서 우선 통일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만 주장하고 개인적 사상의 자유, 특색만 주장한다. 이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며 안 된다.

 

사상이라고 하면 공산주의사상만 생각한다. 그렇다고 공산주의사상은 제대로 아는가? 공산주의 사상이 얼마나 사람을 끌어당겼는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공산주의는 이 얼마나 좋은 사상인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일하고 다같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건설한다면 이 얼마나 좋은 사회인가? 우리가 감동이 되는 것은 공산주의사상이 세계적인 국제주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사심이 없음으로 인간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그런데 이런 좋은 점은 지금도 없어지지 않았다.

 

인간에 있어서 집단주의의 사상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집단주의는 개인주의를 없이 하자고 한 것이다. 앞으로는 상품화폐관계도 필요없게 된다. 다 공급제도라 시장도 필요없게 된다. 집단주의를 가지고 개인주의를 없이 하자고 한 것이 맑스주의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주의보다 못하고 개인주의와 경쟁에서 졌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나아갈 길은 명백한 것이다. 지금은 무엇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겠는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개선할 것인가? 개인주의 장점과 집단주의 장점을 결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누가 반대하더라도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밖에는 없다. 경제에서 개인주의가 큰 성과를 거둔 것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일한 것만큼 자유를 주고 일한 것만큼 평가를 해주는 것이다. 물건을 통해서 물건을 잘 만들었는가, 잘못 만들었는가, 꾸물거리면서 남이 10개 만들 때 하나밖에 못 만들었다면 하나만 만든 창조력밖에 없기 때문에 그 만큼 밖에는 평가를 못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시장의 논리이다.

 

맑스는 한 시간 동안 만든 것을 두고 한 사람은 1개를 다른 사람은 10개를 만들었다 하게 되면 같이 1시간이라면 노동의 가치는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평균해서 봐야 되겠기 때문에 사회 평균노동시간을 봐서 평가를 해줘야 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것도 또 논점을 자꾸 바꾸게 된다. 그러니까 맞지 않으니까 계속 바꾸며 나아간 것이다. 처음에 배울 때는 그것까지 다 따질 겨를이 없고 하니까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냥 넘어갔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 두고도 기계의 상품생산을 간과하고 노동자의 노동시간(노동량)만으로 가치(이윤)를 평가하고자 한 것이다.

 

노동시간을 가지고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간을 가지고 재는 것이다. 창조력이 얼마나 있는가에 따라서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중심민주주의인데 맑스주의자들은 시간개념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경제가 왜 좋은가? 창조력이 들어가 있는 것만큼 한 개밖에 못 만든 사람에 비해 창조력이 높은 사람은 10개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평가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한 공수했는가 안 했는가? 오늘 출근했는가 안 했는가? 자꾸 이렇게 시간개념만 가지고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나라에서도 노동의 양과 질에 따라서 분배하라고 하는데 노동의 양과 질을 어떻게 재는가? 그런 컴퓨터는 아직 발명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협동농장을 가서 노동을 관리하는 사람이 가방을 메고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당신 몇 공수해서 이것만 따졌다. 협동농장에선 풀을 뽑지 않고 슬슬 풀을 덮어버리고 자신의 텃밭에서는 풀을 다 빼고서 넓혀주니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그렇게 세뇌교육을 하는데도 안 된다. 자기 텃밭의 농사는 잘 되는데 협동농장에서는 안 된다. 그래도 공업은 기계가 하니까 큰 차이가 없는데 손노동을 하는데서는 진실하게 일하였는가 안 하였는가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러나 시장은 속일 수 없다. 시장에서는 창조력이 들어간 만큼 평가를 해준다. 시장경제의 위력, 그것은 개인이 하는 창조적 노동에 대한 평가를 대중적으로 실현해나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2. 경쟁과 행복을 위해: 집단적 존재의 통일과 협조를 계획적 균형적으로

인간의 창조력이 들어간 것만큼 평가해준다는 법칙이 가치법칙이다. 이것을 맑스는 노동이 들어간 만큼 평가해주는 것이 가치의 법칙이라고 한다. 창조력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에 따라서 가치를 평가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가치법칙이다.

 

맑스의 가치의 법칙은 노동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 노동시간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가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된다. 그러면 어째서 가격과 가치가 차이가 있는가 하면 수요와 공급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수요가 많게 되면 가격이 가치보다 비싸지고 수요가 적게 되면 가격이 가치보다 내려간다. 그러나 맑스의 가치법칙은 노동이 얼마만큼 체화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수요와 공급이 따라서 조금씩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이것은 현상이고 본질은 노동이 얼마나 체화되었는가에 따라서 설명이 된다.

 

이런 가치법칙이 사람들의 창조력을 얼마나 옳게 평가해 주겠는가? 그러나 시장에서는 에누리가 없다. 창조력이 강해서 잘 만들은 상품은 그만큼 평가해준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경제에 가장 중요한 것, 장점이 되는 것은 가치법칙을 옳게 관철시키는 것이다. 즉 창조력이 이바지한 만큼 평가를 해주는 것 이것을 가치법칙이라고 한다. 앞으로 영원히 이 법칙은 필요하다. 개인과 개인들의 차이가 있는 것만큼 일을 더 잘 해서 일을 더 창조적으로하여 살아가는 사람은 더 많은 대우를 해야 한다.

 

지금 현재는 창조력이 있는 것만큼 평가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역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게 되어 있다. 자기 창조력을 통해서 창조력을 높이기 위해서 경쟁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무엇이 필요한가? 사람들이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에 역시 통일해서 협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협조하게끔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것이 경제를 균형적으로, 계획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 다음에는 물질(물건)이 얼마든지 생산되어 물건을 마음대로 쓸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갖일 필요가 없고, 권력도 민주화되어 권력에 마구잡이로 복종할 사람이 없으므로 필요없게되고, 그때가서는 딴 방법으로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이때의 행복의 기준은 무엇이겠는가?

 

 

3. 행복의 기준: 생명력의 강화와 안정성의 균형으로

어느 때 사람이 행복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가? 인간의 생명력이 강화되었을 때는 기쁨과 행복을 느끼고 인간의 생명력이 약화될 때에는 불행과 고통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 생명력이 그 만큼 강화된 것이다. 생명력이 결합되면 비상한 힘을 가지게 된다. 그것을 생활과 결부시켜 보면 밤에 공동묘지에 갔다 오라면 귀신이 없는 것을 잘 알면서도 기분이 나쁘고 싫어하고 겁이 나는데 그런데 어린아이라도 손을 잡고 같이 가면 그렇지 않다. 생명력이 결합되어 무섭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암탉이 병아리를 한 달에 걸쳐 20마리씩 까는데 닭이라는 것은 개나 고양이를 아주 무서워하는데 그런데 병아리를 데리고 다닐 때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얼마나 강해지는지 모른다. 생명과 생명력이 결합될 때는 아주 약한 것도 강화된다.

 

그러니까 정신적인 생명력도 강화되고 물질적인 생명력도 강화되고 이제 사회협조적 생명력이 강화될 때 행복과 기쁨을 느낀다. 그때 가서는 자꾸 공부도 하게 된다.

 

육체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감탄고토(甘呑苦吐)가 이렇게 되어 나온 것이다. 육체적 욕망을 위해 단 것은 원래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해서 먹기 좋게 달게 만든 것이다. 몸에 해로운 것은 쓰게 되어 쓴 것은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자꾸 발전하게 되니까 쓴 것도 약이 될 수 있고 단 것도 독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파산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본능적으로 구분하게 된 것을 이제 우리 육체를 개조하게 되면 아편을 만일 먹어야 할 경우 앞으로는 먹지 않아도 아편같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준다. 지금은 마비시키는 방법으로 하는데 이것을 육체를 개조하게 되면 자기에게 해로운 것은 거절하게 만들 수있다. 아편은 에너지가 없지만 사람들에게 만족감을 주고 아주 편안하게 만들고 행복감도 준다. 앞으로는 육체 자체가 쓴 것과 단 것을 나누듯이, 학습하는 것을 두고도 이를 거부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으로 개조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아마 500년쯤 되게 되면 시작할 것이고 천년정도 되게 되면 육체를 개조하게 될 것이다.

 

 

균형이 맞아야 안정이 있다. 사람의 행복에서는 안정성이 중요하다. 안정적으로 월급(수입) 100원 받는 사람하고 한 사람은 80원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수입이 100원 되는 사람은 자꾸 파동이 심해서 자꾸 달라지고 80원 받는 사람이 생활이 안정이 되어 있다고 하면 어느 쪽이 행복한가? 80원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 오늘은 잘 먹지만 내일은 못먹겠구나 이렇게 되면 재미가 없다.

 

안정된 생활이 불안정한 생활보다 더 낫다. 조금 수입이 낮아도 안전하게 된다면 안정된 수입이 낫다. 지금 철밥통이라고 하여 공격을 하지만 안전한 수입이 나은 편이다. 경쟁이 개인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노예사회에서 사람의 발전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봉건사회와는 대비도 안 되게 높았다. 빨리 발전하였다. AD 4세기에 이태리의 케티스버스화산의 폭발로 폼페이라는 도시가 하루 밤사이에 매몰되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몰랐다가 근대에 와서 발굴이 시작되었는 데 완전히 화석이 된 상태에서 보아도 자본주의 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노예사회이지만 봉건사회와 대비도 안 될 정도로 발달 되었다. , 사람이 자다가 죽은 모습에서 완전한 노예사회는 아니더라도(노예는 다 있었는데) 사람들의 발전수준은 빨랐다.

 

춘추시대라고 하는 것이 여러 가지 사상이 많이 나오게 되는데, 상당한 자유가 허용되어, 실력이 있으면 상관을 죽이고 심지어 아버지도 죽게되니 안정성이 없어졌다.

 

우리나라가 안 되는 이유로 나라는 생각하지않고 이기적으로 서로 싸우기나 하니까 사람들이 독재를 요구하게 된다. 이것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온 것이 봉건사회이다. 군군, 신신, 부부, 자자 등이 공자사상의 기본으로 질서를 지키는 사상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기변동을 두고 장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안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정성이 균형이다. 균형이 파괴되게 되면 불안정하게 된다.

 

 

 

. 결어: 소유형태의 개선을 위해 정치에 투자를 해야

 

개인주의(가치법칙)와 집단주의(계획적 균형법칙)의 결합을 통한 소유형태의 개선을 위해 3대개조의 구조조정을 위해 정치에 투자를 하여야 한다.

 

우리는 구조조정이라고 할 때는 자꾸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생각하게 된다. 경쟁 때문에 이런 자본주의 위기가 왔는데 구조조정을 그렇게 하게 되면 미국과 같이 잘 안되어 경제위기가 온다. 근본적인 구조조정을 하려면 3대 개조사업에 관한 구조조정을 해야지 도시만 발전하고 농촌이 발전하지 못한다든지, 공업만 발전하고 농업이 발전하지 못한다든지, 경제만 발전하고 정신문화가 발전하지 못하고, 경제에 비해서 정치가 뒤떨어졌다든지 하면 이런 것들을 조정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 구조조정이다.

 

그러면 실업이 왜 나오게 되었는가? 기술이 자꾸 발전하게 되면 사람이 필요없게 되는데 그런데 상품은 더 많이 생산하고 그러니까 사람을 채용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시장을 넓히지 않게 되면 실업을 어떻게 할 재간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자꾸 해외로 나가게 된다.

 

업을 완전히 막는 방법은 경제분야의 인력을 사람개조사업에다 돌려야 된다. 교육과 과학을 발전시키는데 돌려야 된다. 또 정치를 발전시키는데 돌려야 된다. 정치발전은 공짜로 되는 줄 안다. 작은 정부를 만들어야 된다 하면서 정치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은 세우지 않고있다. 교육에 대해 얼마나 투자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한다.

 

정치사상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가. 이것도 얘기만 했지 이를 위한 학교가 있는가? 무엇이 있는가? 법관이 되기 위한 법학부는 있어도 정치판 돌아다니면서 정당에서 표나오는 것만 밝히는 정치만 했지 실제로 우리의 정치사상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정치제도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를 진정 공부시키는 데가 있는가? 나가서 그저 연설이나 하라고 시킨다.

 

과학연구사업은 실험실에서 실험을 한다. 여기 역사적인 과업에서는 실험을 못한다. 이것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어느 군에다가 이런 이론을 적용시켜 해보고 그래서 일반화하고, 이를 위해서 정치적 투자를 하여야 한다. 이것을 현재는 하나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3대 개조사업이라고 하는 것도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투자를 하게되면 실업자는 안 나오게 되고 경제도 자꾸 발전하고 문화수준도 발전하게 된다. 그래서 경제에서는 가치법칙을 발전시키는 사업하고 계획적 균형적 법칙을 관철하면서 결합시켜야 한다. 거기에 맞게 소유형태도 계획을 세워야 한다. 실업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적인 소유형태와 집단주의적인 소유형태를 결합시켜야 한다.

 

그러나 소유형태를 바꾸는 것은 정치가 규정하지만 관리하는 것은 정치가 나서면 안 된다. 그것은 경제집단이 하여야 한다. 여기까지 알려면 정말 많은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장점과 집단주의적인 장점을 결합시키는데 구체적인 방법으로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문제에서 집단주의적 소유를 없애지 않으면서 개인적 소유의 비중을 어떻게 높이고 하는 것을 가지고 조절을 하여야 한다. 그런 문제들은 좀 더 토론하기로 하자. 그러나 의문을 가지고서는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자. 더 많은 연구와 토론이 필요한 것을 두고 자꾸 질문을 해서 해결해가도록 해야 한다.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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