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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한국 최초 서양화가 조한렬 화백이 성경필사 하게 된 기막힌 사연 그리고 간절한 소망인 ‘치유 로드’

한국 최초 서양화가 조한렬 화백이 성경필사 하게 된 기막힌 사연 그리고 간절한 소망인 ‘치유 로드’

 

[시사타임즈 엄무환 국장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서예가인 훈목 조한렬 화백을 지난달 20 3호선 독립문역 인근에 위치한 조 화백 화실에서 만났다.

 

 

▲조한렬 화백. ⒞시사타임즈


조 화백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조 화백 화실에 들어가자 필자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광경은 
20평 규모의 화실을 빼곡하게 채운 수많은 그림 표구와 화폭 그리고 서첩들이었다그리고 곧이어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붓으로 쓰다만 성경필사. 

그런데 동시에 필자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불교의 지장경과 금강경 필사 서첩이었다.

조 화백님, 불경도 필사하셨나요?”

대학교 2학년 때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에서 수염도 깎지 않고 4년을 토굴에서 지냈습니다. 토굴에서 역학 등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만 기어다니다시피 지냈기 때문에 나중엔 제대로 걷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지스님이 저더러 절에서 나가라는 겁니다. 어떤 이유인지 설명도 없이 말입니다.”

크리스천인 훈목선생이 절에 들어가서 지냈다니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자살을 아홉 번 시도했습니다. 사연이 얼마나 기구했으면 자살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그것도 아홉 번씩이나. 그 얘기 다 하려면 밤새 울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입을 연 훈목 선생. ‘훈목 선생으로 유명한 조 화백이기에 필자도 훈목 선생으로 호칭하려고 한다. 비록 감리교 평동교회(김종윤 목사)를 출석하는 교인이지만 말이다.

 

▲신구약성경필사 서첩. ⒞시사타임즈


가슴 아픈 가정사, 그런 환경 속에서 발굴된 뛰어난 재능

 

어머니가 앞 못보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함라(전북 익산) 99칸 집에 전라북도 대부분의 땅을 소유한 진사 집안 5형제 중 외동딸이었습니다.”

훈목 선생은 필자에게 감추고 싶은 가슴 아픈 가정사를 그러나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진사 집안에서 사위를 봤는데 이 양반(훈목 선생 친부를 말함)이 마약을 했어요. 그래서 아편을 대줬어요. 그러니 아무리 만석꾼 집안이라도 살림이 거덜 날 수밖에요. 그래도 연희전문학교에 보내 법관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이게 오히려 화근이 되었습니다. 여자가 6명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앞 못보는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겠습니까.”

불행한 가정사의 시초는 훈목 선생의 아버지였다는 것.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버지완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한 벽을 쌓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누나는 일찍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면서 훈목 선생이 하는 말, “저는 우뭇가사리만 보면 눈물이 납니다.”

훈목 선생이 언급한 우뭇가사리는 여름철 즐겨먹는 콩국 등에 넣어서 먹는 해초로 몸은 가늘고 납작하며 깃털처럼 가지를 많이 내어 다발을 이룬다. 자라는 환경에 따라 몸의 형태가 다르고, 물이 잘 흐르고 파도가 치는 바위 위에 군락을 이루어 자란다.

도둑질만 빼고 다 했습니다.” 훈목 선생의 이 한마디 말에 녹아있는 지나온 인생사.

만석꾼 집안의 외동딸이지만 앞 못보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약점이 되어 잘난 사위의 아편을 대느라 집안 살림이 거덜 난데다가 여성 편력까지 심하여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아들인 훈목 선생도 11살부터 고생길에 들어서게 됐단다. 그래서 기울어진 가세(家勢) 때문에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는 훈목 선생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붓을 잡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다친구 집에 놀러 갔던 그에게 친구 아버지가 글씨를 써보라 하여 쓰게 되었고 재능을 눈여겨본 친구 아버지가 돈을 줄 테니 서예를 배워보라고 적극 권유함으로 서예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타고난 필체로 주목받게 된 11세 소년은 시화전에도 출전해 큰 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그 시화전에서 소년은 서양화유화를 접하며 그림에 뜻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물감도 제대로 구할 수 없었던 변변찮은 주머니 사정은 이따금 그의 붓끝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그런 위기의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으나 선천적으로 내재되었던 글과 그림 재주는 그의 붓에 날개를 달아주며 지금까지 화가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훈목 선생을 서양화가특히 유화가(油畵家)로 알고 있지만 실은 서양화와 동양화 그리고 서예까지를 넘나드는 만능 ‘장인(匠人)’이다.

그가 그린 유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에 뜨이는 화려한 색감을 기반으로 그려낸 생명력을 느끼게 하며, 동양화는 유려한 선과 역동성이 돋보인다가파른 먹선으로 표현된 산맥 굽이굽이 살아 움직이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서예 필체 ( 필체는 행서체) 이미 국내뿐만 아니라 옆 나라 일본까지 명성이 알려졌다일본 오사카의 한국인 거리로도 유명한 츠루하시 시장 중앙 입구문 현간판이나 고단이성의 현판이 이를 증명한다. 훈목 선생의 필체가 한 획 한 획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서도(書道)를 중요시여기는 일본에서조차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문화계 유명 인사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하지만 그러나 훈목 선생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그래선가 훈목 선생을 만나는 사람들은 이런 진한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그의 작품에 더 매력을 느끼는게 아닐까 싶다.

 

아내의 암 선고로 인해 시작한 성경필사와 치유로드(Healing Road) 프로젝트

 

지장경, 금강경을 세 번 썼습니다. 그런데 마누라가 몸이 이상하다 하여 병원에 갔더니 자궁암 4기라는 겁니다. 4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훈목 선생의 인생에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을 이루는 계기로 작용했다.

온몸을 불살라서라도 마누라를 살려야겠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성경을 쓰겠다고 고백했습니다.”

“7이라는 수가 기독교에서 의미가 있잖아요. 그래서 신구약성경을 일곱 번 필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학을 공부하여 전국을 다니며 좋은 약초를 구해서 직접 약을 다리는 등 아내 건강을 챙겼다. 그 결과 기적이 일어났다.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세브란스병원에 가서 암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가 일곱 번째 성경필사를 완료하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성경필사를 멈췄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가 또 발생했다.

제가 성경필사를 일곱 번 쓰고 멈췄는데 마누라가 유방암에 걸린 거예요, 그래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 뚜껑보고 놀란다고 다시 성경필사를 시작했어요.”

 

▲조한렬 화백이 붓으로 쓴 성경필사. ⒞시사타임즈​​


이런 연유로 훈목 선생의 성경필사는 아홉 번째를 넘어 열 번째 길에 들어섰다
. 동시에 부인의 건강을 위해 또 한약재료 등을 구입하여 처방했다. 그 결과 유방암도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훈목 선생의 마음에 한 가지 소망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름하여 치유 로드(Healing Road)”.

제가 그린 그림이 천 몇 백 점인데 시가로 계산하면 3백억 정도 될꺼예요. 이 그림들을 70억에 팔려고 내놓았습니다. 팔아서 수목원, 즉 치유 로드(Healing Road)를 만들려고 합니다.”

수목원 입구에서부터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자갈길로 만들고 성경구절을 붓으로 쓴 석판(石板)을 세우려고 하는데 저는 이것을 치유 로드라고 부릅니다.”

“‘치유 로드. 한 마디로 말해서 영육간에 힐링을 위한 장소가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밤에도 센스를 작동하여 성경구절을 볼 수 있게 하려고 해요. 수목원에 며칠이고 머물렀다가 갈 수 있도록 리조트와 주차장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위치는 서울과 부산, 광주 등의 중간 지점인 충주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비용이 많이 들어갈 것 같군요.”

대략 3백억 정도의 예산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는 제 개인이 감당하기엔 벅차기 때문에 교회나 기독교 재단 등에서 맡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저도 아이템을 드릴 뿐 아니라 힘껏 돕겠습니다.”

수천 미터에 달하는 성경 비석을 따라 산책은 물론 영육간에 ‘힐링할 수 있는 종교적 문화 쉼터로 구상된 치유 로드 프로젝트.

공수래공수거빈손으로 세상에 왔으면 빈손으로 가야 응당 인지상정끝까지 욕심으로 손에 움켜쥐고 있기 보다는 앞으로의 미래를 위한 유산을 남겨두고 싶다는 사명감으로 채운 훈목 조한렬 화백의 계획은 이제 실행만을 남겨두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니 조 화백이 친히 붓으로 성령충만을 써서 건넨다. ‘성령충만한 인터뷰였음을 인식케 했다. 그리고 필자의 마음에서 드려진 기도, ‘치유 로드가 세워지게 하소서. 

 

▲필자에게 선물하려고 성령충만을 붓으로 쓰고 있는 조한렬 화백. ⒞시사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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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무환 국장 hwan2778@timesi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