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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무환 칼럼] 모델 그리고 은혜

[엄무환 칼럼] 모델 그리고 은혜
 

 

 

 

▲엄무환 국장 ⒞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라는 사람과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이 문장의 헬라어 원어는 “엔 데 안드로포스 에크 톤 파리사이온 니코데모스 오노마 아우토 아르콘톤 유다이온”으로 “앤=그가 있었다. 데=그런데, 안드포스=한 사람이, 에크 토 파리사이온=바리새인들 중에, 니코데모스-니고데모가, 오노마=이름은, 아우투=그에게, 아르콘=행정 장관이, 톤 유다이온=유대인들의”이며 이를 직역하면 “바리새인들 중에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니고데모(였고), 유대인들의 행정 장관(이었다)” 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사상을 공적(公的)으로 대표하는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으로 유대 종교의 한 종파입니다. 그들은 율법 준수에 있어서 가장 엄격하였고 구전율을 중시하였을 뿐 아니라 천사와 귀신의 존재, 죽은 자의 부활과 영혼 불멸을 믿었으며, 구제와 기도와 금식 등 경건 생활에 힘쓰는 자들이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은 ‘승리’라는 의미의 ‘니코스’와 ‘백성’이라는 뜻의 ‘데모스’가 결합한 것으로 ‘백성의 승리자’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지도자(예전 성경엔 관원)이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지도자’에 해당하는 ‘아르콘’은 ‘통치자’, ‘왕’을 가리키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권력을 지닌 자, 즉 대제사장, 회당장, 산헤드린 공회원 등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의 지도자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그는 유대교를 대표한 인물로서 율법의 잣대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에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니고데모를 소개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는 앞장의 23절~25절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함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헬라어 원문에 나오는 3장 1절의 접속사 ‘데’(그런데) 때문입니다.

 

이 접속사는 새로운 장면을 설명하거나 문장을 전환시키는데 쓰이는 접속사입니다. 그래서 앞 문장의 25절과 연결시켜보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알고 계셨는데, 그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새인이 있다”가 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사람 속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니고데모라는 한 사람을 모델로 세우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니고데모는 이미 설명했듯이 유대교를 대표한 인물로서 율법의 잣대로 볼 때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에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백성, 즉 영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신적인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과 나눈 대화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과 행동을 통해 그의 가치관과 영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특히 무엇을 선택하는가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들은 게 많아서 말은 영적인 것 같아 보여도 선택하는 것을 보면 ‘아니올씨다’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당신이 행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니도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은 그의 중심이 어떠함을 이미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눈에 뛸까봐 두려워하거나 자신의 명예나 지위에 손상을 입게 될 것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만나야겠다고 결정한 그 선택은 높이 평가되어야할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왜냐하면 이 선택이 그의 인생 향방을 가르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인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그들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한글 성경은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에만 메 티스 겐네데 아노덴’으로 ‘만일 누구든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입니다. 여기서 ‘위로부터’(아노덴)란 ‘다시 (새롭게)’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새롭게) 되는 것은 위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것’(중생)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은 낡은 육신의 생명이 죽고 새로운 영의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가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 믿음이 생깁니다. 모르면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기서 앎이란 지식이나 이론적 앎이 아닙니다. 경험을 통한 앎입니다.

 

‘안다’는 히브리어 ‘야다’는 창세기 4장1절의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는 말씀에서 ‘동침하매’가 바로 ‘야다’입니다. 체험적 지식 말입니다. ‘동침하매’는 단지 성적인 결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적인 결합을 포함하여 전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일종의 완곡어법적 표현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받은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가는 것에서 생겨납니다. 이 삶을 은혜에 의한 삶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은혜는 내 죄를 보는 것입니다. 내 죄는 육신의 눈으론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비추셔야 보입니다. 성령님께서 임재하심이 은혜입니다. 그 증거가 죄를 보는 것입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내 죄가 드러나면 즉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가져가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로 해결 받으면 됩니다. 이미 나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죄를 사하셨다는 증거가 평강이요 자유함입니다. 내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집니다. 내 영혼이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비가 개인 날 아침의 맑은 공기와 같습니다. 상쾌함과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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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은혜가 부어지면 내 죄를 볼 뿐 아니라 내가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영적 힘이 공급되어집니다. 그래서 은혜란 ‘성령님의 임재, 즉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입니다.

 

은혜,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가장 먼저 내 죄가 보이며, 내가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뤄집니다. 잠시 감정적으로 들뜨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여기에 속는 것 같습니다. 뭔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욕이 넘쳐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거 아닙니다. 정말 은혜를 받으면 내가 할 수 없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옵니다. 즉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이 가슴 저 밑에서부터 솟아나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존재인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안보이면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은 붕붕 뜨지 않습니다. 차분합니다. 누가 봐도 안정감이 있습니다. 질서에 순복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받습니다. 물론 너무 기쁘기 때문에 주체할 수 없어서 처음엔 붕붕 뜨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점차 차분해집니다.

 

은혜가 부어지면 내 영혼에 평강과 기쁨이 밀려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 그리고 사람에게 얽매이고 구속되는 것에서 자유해집니다. 마음에 근심이 사라지면서 평강이 내 마음을 장악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는데 은혜가 부어지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듭니다.

 

니고데모를 통해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비추셨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리셨습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체 인류에게 해당됩니다. 니고데모는 이를 드러내는 한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향해 말씀하셨지만 그러나 저를 포함하여 전 인류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니고데모는 지금 이 시대의 저를 비롯한 한국교회 교인들의 영적 실상을 보여주는 모델입니다. 오늘 아침 저는 니고데모를 통해 저를 봅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처럼 저도 예수님과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들이 제 귀에 들립니다. 말씀이 믿어집니다. 니고데모보다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저인데 말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하나님께서 저를 이렇게 거듭나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은혜를 부어주셨다는 것이지요. 할렐루야! 하나님의 임재가 제 삶에 있다는 사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이 놀라운 은혜가 오늘 아침 제 마음을 울립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해 한 모델을 세우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상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시기 위해 이삭을 모델로 제시하셨습니다. 이처럼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각각 하나님이 우리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해 제시하신 모델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이 쓰신 모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실을 놓쳤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시자만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철저하게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모델이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 자신도 예수님을 드러내는 모델입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음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거듭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기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모델 말입니다. 이것은 제가 모델이 되고자 해서 되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저를 부르셔서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한 모델로 쓰신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결과입니다.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디 저만 이런 은혜를 받았겠습니까. 모든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성경이 이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이 가는 곳마다 어둠은 물러가야 합니다. 부패한 것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되기 때문입니다. 이 열매가 없다면 거듭난 사람이 아니든지 아니면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일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길 열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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