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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61)] 34. 핀란드 (Finland)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61)] 34. 핀란드 (Finland)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헬싱키 시청 광장, 뒤에 시청, 대통령궁과 우스펜스키 대성당이 보인다. 2018.4 (c)시사타임즈
▲< 국기 > < 국장 > (c)시사타임즈

 

 

<국가 개관>

 

핀란드 공화국 약칭 핀란드(핀란드어: Suomi)는 북유럽에 위치한 노르딕 국가 중 하나이다. 핀란드의 북쪽은 노르웨이, 서쪽은 스웨덴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서쪽은 보트니아 만, 남쪽은 발트 해, 남쪽은 핀란드 만과 맞닿아 있다. 보스 만 건너편은 스웨덴, 핀란드 만 건너편은 에스토니아다. 동쪽에서 남쪽 걸쳐 러시아와 육로로 국경을 접하고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국토의 대부분은 평탄한 지형으로 빙하에 깎여 형성된 호수가 무수히 흩어져 있다. 타이가지대가 있고, 식물 중에는 이끼가 많다. 또한 숲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군이 서식한다. 핀란드의 지형은 대체로 평평하며 최고봉은 북쪽 사미 주 해발 1,328미터인 할티툰투리 산이다. 핀란드는 호수 이외에도 육지의 68%가 북방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섬들은 거의 대부분 서남쪽에 있다. 핀란드는 호수와 섬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와 섬이 많다. 호수 187,888개와 섬 179,584개가 있다

 

1. 국명(Country) : 핀란드 공화국 (Finland Republic)

2. 수도(Capital) : 헬싱키(Helsinki)

3. 면적(Territory) : 338,145㎢

4. 인구(Population) : 5,550,000명

5. 국민소득(GNI) : US$51,200불

6. 언어(Language) : 핀란드어, 스웨덴어

7. 국경일(National day) : 1917.12.6

 

▲Suomenlinna 요새, UNESCO 문화유산 (c)시사타임즈

1. 약사

 

기원전 수천 년 무렵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우랄어족 언어를 쓰는 핀족이 서진을 계속하여 기원후 1세기에 지금의 핀란드 남부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중엽, 스웨덴 왕 에리크 9세의 십자군이 핀란드에 쳐들어옴으로써 스웨덴의 핀란드 지배 윤곽이 잡혔다. 이후 스웨덴의 역대 왕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핀란드에서 스웨덴 영토를 넓혀왔으며, 1397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연합왕으로 즉위할 때 핀란드도 이에 편입되었다.

 

1523년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을 안정된 독립 왕국으로 만들면서 핀란드를 이에 포함시켰다. 이후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에서도 루터교로 개종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수학한 미카엘 아그리콜라의 영향이 컸다. 17세기 초에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핀란드를 동방 전초 기지로 활용하였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에서 문예를 크게 진흥시켜 투르쿠 대학이 이 무렵에 세워졌다.

 

스웨덴 왕 칼 12세의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시작된 대북방 전쟁(1700~1721년)으로 핀란드의 국토는 러시아의 대대적 침공으로 일대 타격을 입었다. 구스타브 3세가 러시아와 전쟁(1788~1790년)을 하는 틈을 타 핀란드 장교들이 무장봉기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핀란드 영토를 둘러싼 열강의 외교전이 펼쳐진 끝에 1809년 러시아가 핀란드를 점령하였고,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이에 맞서 핀란드인의 국권 회복 운동이 점차 불붙었고 엘리아스 뢴로트는 1835년부터 1849년 사이에 서사시 칼레발라를 썼다.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17년에 핀란드는 독일 제국의 공국인 헤센-카셀(Hessen-Kassel)가를 핀란드의 왕가로 받아들여 독일제국에서 책봉을 받는 형식상의 제후국이 되었다. 러시아의 끈질긴 핀란드족 말살정책에도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1월 27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적핀란드(공산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독일제국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 백군(정부군)이 5월 15일 이를 진압하였다. 한편 그 해 11월 11일 독일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핀란드는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부터 소련의 위협이 다시 커져 국가의 생존을 걸고 소련과 2차례(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장군의 지휘 아래 전 국력을 총동원하여 소련에 맞서 싸웠고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국력의 열세 때문에 끝내 패배로 끝났다. 이전부터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는데, 이 전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국토는 다시 재건되었고 핀란드 정부는 소련과 서유럽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면서 경제발전에 힘을 쏟았다. 소련의 의향에 따라 마셜 플랜을 받지 못했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유럽공동체(EC)에 가입하지 않았다. 자유 민주 정권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제권에 속하는 경제정책을 쓰고, 외교, 국방 측면에서 공산권과 가까웠지만,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맹하지 않았다.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력이 컸던 냉전 시대에도 민주주의를 지켜왔다. 핀란드는 1955년 유엔에 가입했으며 중립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소련 붕괴 후 서방 진영에 접근하여, 1994년에는 EU 가입에 합의하고, 2000년에는 유로를 도입했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 부패가 적은 나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고, 급속하게 복지 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북유럽 형의 사회에 근접하였으며, 매년 행복지수가 최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2. 헬싱키에서

 

▲헬싱키 부두, 2018.4 (c)시사타임즈

핀란드는 스웨덴, 러시아 그리고 독일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위치해 있어 그들로부터 무수한 침략을 받고, 오랫동안 그들의 속국으로 전락하기도 했으나, 끝내는 언어를 지켜내고 정체성을 지켜 드디어 1917.12.6. 독립하였다. 핀란드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독립하는 데는 엘리아스 뢴로트의 서사시 ‘칼레발라’와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가 중심적 역할을 했으리라. 1849년에 집대성된 ‘칼레발라’는 핀란드 사회에서 중심적인 상징성을 가진 국민서사시이며, 핀란드 국민문화의 시금석이자 이정표 역할을 해왔다. 핀란디아는 1899년 러시아 제국의 언론 검열에 비밀스럽게 저항하는 언론사의 기념행사를 위하여 작곡된 작품으로 핀란드 역사의 몇몇 에피소드를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핀란디아는 그 당시 러시아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콘서트마다 작품명을 우스꽝스럽게 바꿔가며 연주하였다고 한다. 예술작품이나 문학작품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핀란드 여행을 계획하였다. 2차 대전 후에도 쏘련의 영향으로 미국의 원조도 받지 않았으나, 1955년에 유엔에 뒤늦게 가입한 이후 경제성장과 복지정책에 민관이 합심하여 행복지수 1위 국가를 일군나라이다. 어찌 보면 과거나 현재의 역사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면이 있다. 나는 이러한 상념에 젖어 모스크바에서 심야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를 찾았다.

 

▲원로원 광장(헬싱키 대성당과 알렉산드르 2세 동상), 2018.4 (c)시사타임즈

공항에서 아침 일찍 공항리무진을 타고 헬싱키 시내로 들어와 원로원 광장을 찾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는 시민들이 더러더러 있을 뿐 거리는 한산했다. 200명의 국회의원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국회에 출석하거나 도보로 이동한다는데 거리에 자전거로 이동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원로원 광장에 들어서면 헬싱키 대성당과 헬싱키 대학, 헬싱키 시청사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이중에서 단연 헬싱키 대성당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루터파 교회로 언덕 정상에 다소곳하게 좌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로원 광장 전면에는 러시아 알렉산드르 2세 동상이 있다. 알렉산드르 2세는 알라스카를 미국에 판 러시아의 짜르(황제)인데, 이곳에 왜 그의 동상이 있는지 의아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만난 대학생에게 물어보니, 알렉산드르 2세는 1855년부터 1881년까지 핀란드 대공을 겸하고 있었다고 했다.

 

▲헬싱키의 랜드마크 우스펜스키 대성당 (c)시사타임즈

해변가 언덕위에 커다란 성당이 있어 시내도 조망할 겸 그곳에 갔다. 대성당은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카타나야노카 반도의 언덕 위에 있었고, 이름은 우스펜스키 대성당으로 핀란드 정교회 주교좌 성당이었다. 수호성인은 성모 마리아이고, 대성당의 이름은 고대 교회 슬라브어로 성모 안식을 의미하는 ‘우스페니에’(uspenie)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설계는 러시아 건축가 알렉세이 고르노스타예프(1808–1862)가 맡았으나 대성당 공사는 그의 사후 1862년에 시작돼 1868년에 완공됐다. 대성당 뒷 편에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기념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대성당 축성 당시 핀란드 대공을 겸하고 있었다. 헬싱키 교구의 주교좌 성당인 이 성당은 핀란드 정교회의 대표적인 성당이면서 서유럽에서 가장 큰 정교회 성당이기도 하다. 마침 날씨가 쾌청하여 연인끼리, 또는 가족끼리 나온 나들이객과 또 나 같은 관광객이 많았다.

 

나는 부두에서 배를 타고 수오멜린나 요새로 갔다. 수오멘린나(Suomenlinna)는 핀란드 헬싱키 입구에 위치한 쿠스탄미에카 섬(Kustaanmiekka) 등 6개의 섬에 1748년에 지어진 요새이다. 당시 핀란드를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이 러시아 제국의 팽창주의 정책에 맞서기 위해 만든 요새이다. 건립 당시에는 핀란드어로 비아포리(Viapori)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며 1918년 핀란드가 독립한 이후에는 ‘핀란드의 요새’라는 뜻을 가진 수오멘린나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헬싱키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 중 하나이며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섬에는 요새답게 포신들과 진지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적들의 헬싱키 진입을 막기에 이상적으로 건설되었음을 이방인도 알 수 있었다. 요즈음은 관광객들이 역사도 공부하고 산책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핀란드는 산타클로스가 태어나고 살고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타클로스가 사는 마을은 핀란드의 북부 라파주의 주도인 로바니에미이다. 로바니에미는 오로라를 찾는 이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이곳에 빨간 모자를 쓰고 하얗게 수염을 기르고 빨간 모자를 쓴 산타 할아버지가 살고 있다. 아마 산타 할아버지도 오로라의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세계의 아이들이 산타 클로스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핀란드 로바니에미시(市) 근처에 있는 산타마을의 산타 우체국에 접수된다. 전 세계에서 매년 600여만 통의 편지가 이곳에 도착한단다. 그 많은 어린이에게 꼭꼭 답장을 보낸다고 하는 어린이들의 우상인 산타클로스를 꼭 만나고 싶었으나, 일정이 짧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공항으로 향했다.

 

▲수오멜린나 요새에서, 2018.4 (c)시사타임즈
▲스베아부르크 부두에서, 2018.4 (c)시사타임즈

 

(35번째 나라 아프리카의 가나 이야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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