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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읍시다 (1167)] 러시아 소설

[책을 읽읍시다 (1167)] 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저 | 임호경 역 | 열린책들 | 432쪽 | 13,8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현대 프랑스 평단의 가장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의 『러시아 소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엠마뉘엘 카레르는 독특한 발상과 집요한 관찰력, 세련되면서도 다채로운 서술 방식으로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았다.

 

에로틱한 꿈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무단이탈한 어느 모험가의 비극이 등장하는 『러시아 소설』의 도입부는 단연 압도적이다. 시종일관 이 작품을 지배하는 음울한 분위기와 더불어 무의식을 파헤치는 카레르의 묘사력이 돋보인다. 본능적인 충동에 따라 금지 구역에 들어선 자의 비참한 최후는 카레르 그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회고와도 같다.

 

‘러시아 소설’이라는 인상적인 제목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우선 긴 여정의 출발점이 된 헝가리인의 사연과 별개로 엠마뉘엘의 의식 한편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두 인물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공교롭게도 1944년, 언드라시 토머가 고향을 떠난 해에 실종된 외조부 조르주 주라비슈빌리와 애인 소피. 실제 엠마뉘엘 카레르의 어머니인 엘렌 카레르 당코즈는 프랑스 학술원의 종신 원장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그 덕에 카레르는 남부러울 것 없는 상류층의 자제로 성장했다. 그러나 나치 부역 혐의로 납치된 외조부의 실종 사건은 오랜 세월 집안에 어둠을 드리운다. 대물림된 생래적인 죄의식과 수치심은 내내 카레르를 따라다닌다.

 

외조부의 망령을 떨치고자 엠마뉘엘은 어머니의 땅이자 실종자들의 유배지와도 같은 ‘러시아’로 향한다. 과거에 죽음을 선고하고 새 삶에 뛰어들려는 엠마뉘엘의 기대와 환상은 진짜 현실을 비켜나 있다. 여행길에 오른 그가 몰두하는 것은 광기와 공포가 지워진, 모든 것이 가능한 ‘소설’의 세계다. 그리하여 끝내 현실로 귀환해 비극으로 남을 소설이 시작된다.

 

한편 르포르타주 제작을 위해 멀리 떠나 있는 동안 엠마뉘엘은 애인 소피를 그리워한다. 서로를 안 지 불과 2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둘은 열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자격지심은 때로 관계의 걸림돌이 된다. 또한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소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길 없는 문제들에 내적으로 몰두하는 엠마뉘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자신에게 새 남자가 생겼다 고백하기에 이른다. 엠마뉘엘은 마침 『르 몽드』에서 들어온 단편소설 원고 청탁을 받아들여 소피에게 전하는 긴 편지로 내용을 채운다.

 

『러시아 소설』 제3부를 통째로 차지한 사랑의 헌사는 실상 포르노그래피 그 자체다. 엠마뉘엘은 자신이 휴가를 보내는 라로셸로 소피가 기차를 타고 올 시간에 맞춰 『르 몽드』 게재일을 정한다. 그러나 소피가 여행을 포기하면서 그를 들뜨게 했던 공개 프러포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절망적인 재회 이후,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증거를 대라는 엠마뉘엘의 요구에 끈질기게 버티던 소피는 결국 임신 사실을 알린다. 그렇게 갈등은 일단락된다.

 

소피는 끝내 엠마뉘엘이 『르 몽드』에 게재한 단편소설을 읽지 않는다. 끔찍한 불안과 자기혐오에 빠진 엠마뉘엘과 달리 그녀는 어느덧 평정을 되찾는다. 각자가 원하는 사랑 방식이 양극단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도 두 사람은 얼마간 관계를 지속하지만 불행의 연속일 뿐이다. 엠마뉘엘의 지독한 자기기만과 집착은 소피의 강한 저항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만다. 『러시아 소설』은 예측 불가능한 현실에 투입된 자아를 대담하게 해체하고 분석한다.

 

파리와 코텔니치를 배경으로 한 『러시아 소설』은 카레르가 품은 두 가지 강박의 기원을 추적한다. 외조부의 실종과 끝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애인에 대한 에로틱한 열정을 다룬다. 『러시아 소설』은 자전적 이야기의 씨실과 날실을 [내면 여행기]로 엮은 품격 있고 격정적인 산문이다. 도보 여행, 고백, 성애를 콜라주한 역작이다. 이 두려움을 모르는 심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회피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와 그것의 존재로 인해 치러야만 하는 대가(代價)를 조명한다. 『러시아 소설』은 폐쇄적이고 누추하며 잔인한 개인의 슬픔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언어로 치환한다. ‘계속해서 살아가고 싸울 것’. 『러시아 소설』은 지옥 같은 고통을 돌파한 승리의 기록이다.

 

 

작가 엠마뉘엘 카레르 소개

 

현재 프랑스에서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 중의 한 명인 엠마뉘엘 카레르는 195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1986년 28살의 나이에 발표한 소설 『콧수염』으로 존 업다이크로부터 ‘멋지고, 번득이며, 냉혹한 작품’, 「르 몽드」로부터 ‘문학의 천재’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몽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는 특이한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겨울 아이』로 1995년 페미나상을 받으면서 전 세계 독자들에게 알려졌으며, 이후 클로드 밀러 감독의 동명 영화로 제작되어 칸 영화제 심사 위원상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는 일가족을 살해한 실존 인물 장 클로드 로망의 심리를 파헤친 문제작 『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동명의 영화감독에 대한 연구서 『베르너 헤어조크』, 『나는 살아 있고 당신들은 죽었다. 필립 K. 딕의 전기』, 소설로는 『재규어의 친구』, 『용기』(1984년 파시옹상, 보카시옹상 수상), 『베링 해협』(1986년 SF 대상, 발레리 라르보상 수상), 『안전지대』(1988년 클레베르 헤덴스상 수상), 『러시아 소설』 등이 있다.

 

『나 아닌 다른 삶』은 작가가 실제로 목격하고 가슴 아픈 사건 ― 여행지 스리랑카에서 지진 해일에 휩쓸린 네 살배기 소녀 쥘리에트와, 33살에 암이 재발한 지방 법원 여판사 쥘리에트의 죽음 ― 을 다룬 기록문학이다. 면밀한 취재와 지인들을 상대로 한 심층적인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카레르는 시종 사실적이고 담담한 문체로, 질병, 장애, 죽음, 헤어날 길 없는 빚과 가난 등 의지와 무관하게 벌어지는 비극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 속에서 더욱 빛나는 삶의 면면을 가슴 뭉클하게 그려 낸다.

 

쉰을 넘어선 카레르의 작가적 연륜과 한층 깊어진 통찰, 따스한 연민이 돋보이는 역작 『나 아닌 다른 삶』은 「르 몽드」, 「르 피가로」, 「리베라시옹」 등 프랑스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평단의 극찬을 받는 한편, 같은 해에 출간된 기욤 뮈소와 마르크 레비의 신작을 누르고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명실 공히 카레르의 새로운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2009년 『렉스프레스』 독자상, 『마리 클레르』 소설 수상작으로 뽑혔으며 『르 푸앵』 선정 올해의 책 20권에도 이름을 올렸다. 또한 카레르는 이 책에서 불공정한 계약을 일삼는 대출업체의 횡포와 이에 대항한 법적인 투쟁을 알린 공로를 인정받아 사회적 과중한 채무 해결을 위한 기구인 프랑스 크레쉬스(Cresus) 위원회에서 수여하는 크레쉬스상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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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속심 기자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