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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휲소데나이 데이’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아시나요?

[엄무환 칼럼] ‘휲소데나이 데이’에 담겨 있는 의미를 아시나요?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 14절과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관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하신 말씀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기 위해 밤에 몰래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든 사례가 모세의 놋뱀 사건입니다.

 

모세의 놋뱀 사건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도중에 광야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21장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그러자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하고 모세에게 요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하여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의 헬라어는 ‘휲소데나이 데이’로 동사가 ‘휩소오’입니다.

 

그런데 ‘휲소오’라는 이 동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요한복음 8:28),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요한복음 12:32~33) 등의 말씀이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친히 언급하신 ‘휲소데나이’ 즉 ‘휲소오’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높이 들린 놋뱀을 쳐다보고 살아났듯이 이 땅의 모든 인류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살아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거듭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엔 이 땅의 모든 인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친히 자신의 죽음을 내비치신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네가 산다. 네가 거듭난다. 그래야 네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네가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없이는 이 일이 결코 일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를 분명하게 못박는 단어가 ‘데이’입니다. ‘데이’는 인칭대명사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구속사역을 위하여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3:18)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없이는 부활도 없고 영생도 없다는 것입니다.

 

‘휲소데나이 데이’의 결과가 15절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헬라어 원문은 ‘히나 파스 호 피스튜온 엔 아우토 에케 조엔 아이오니온’으로 직역하면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도록”입니다.

 

카리스종합주석(기독지혜사)에 보면 ‘히나’가 목적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것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마다’에 해당하는 ‘파스’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다 포함하는 개념의 접속사로 ‘전체’를 뜻할 뿐 아니라 ‘각양 각종’의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신분이나 인종의 차별없이 누구든지 다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영생을 믿는 자 하나하나에게 각각 임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것이지요.

 

이 생명은 사람의 이성이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서만 얻어지는 생명입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영생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죄로 인하여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영원한 친교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요한은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이 말씀은 현재의 생명 너머에 있는 장차의 생명을 포함하는 것으로 비록 몸은 이 땅에서 살지만 그러나 영은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게 하셨습니다. 내가 뭐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의 쓴 잔을 친히 마신다는 것입니까.

 

나에게 주어진 영생, 그 영생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피가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랑을 모른다면 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육신에 속한 것, 땅의 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얼마나 답답해 하실까요. 내 영혼이 얼마나 불쌍하겠습니까.

 

나에게 영생을 소유케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십자가의 죽음을 드러낸 ‘휲소데나이 데이’. 그 의미를 알고 나니 저에게 주어진 영생이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선지 저절로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저도 ‘휲소데나이’의 삶을 흉내라도 내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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