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330)] 이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아



이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아

저자
정약용 지음
출판사
앨피 | 2013-09-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이 책은 한 마디로... 불세출의 학자이자 경세가인 다산 정약용...
가격비교


[책을 읽읍시다 (330)] 이 개만도 못한 버러지들아

정약용 저 | 노만수 편역 | 앨피 | 403쪽 | 16,8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다산에 대한 수식어는 빗방울 수만큼이나 많다. 실학자, 서정시인, 경세가, 의약학자, 언어학자, 행정가, 논변가, 과학자, 지리학자 등등. 이처럼 다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상을 남긴 다산의 진면목을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렌즈가 바로 '참여파 작가' 다산이다. 높은 벼슬아치 신분에서 죄인으로 추락한 18년간의 유배 기간 동안, 다산은 수많은 시와 소설, 논설, 편지, 실학서를 써서 조선의 사회적ㆍ정치적ㆍ제도적 문제들을 고발하고 풍자하고 비판하며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찾으려고 애썼다.

 

이 책에는 사회 현실을 냉정하게 꿰뚫어보며 치열하게 고민하는 강자에게는 거침없이 약자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진짜 '실천적 지식인' 정약용이 등장한다. 무엇보다 다산의 글에는 조선 후기 봉전적 병폐로 피폐해진 백성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지배층 양반 관료로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이 담겨 있다.

 

다산을 실학자로 만든 사회 상황, 다산이 실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정치 환경은 다산을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한’ 깨어 있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부조리한 사회 환경과 그에 대한 예민한 자각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 시대의 거봉’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은 탁월한 리얼리스트 학자로서 당시 가장 고통받는 일반 백성들의 눈높이에서 당대의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그 개선책을 제시하려 애썼다. 비록 다산은 왕도정치의 구현이라는 조선 왕조의 유교적 기틀을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았지만 그 사회질서 안에서 부패한 환부를 도려내고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 진정한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 노력했다.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개선하는 것, 그것이 참여작가 다산이 추구한 유일한 목표이자 궁극의 지향점이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슬픈 자각이 밀려든다. 200년 전의 조선 사회와 200년 후 대한민국의 현실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자각. 200년이라는 세월이 격동 치며 흘러갔지만, 이 땅의 민초들을 옥죄는 부조리한 정치적·경제적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깨달음이다.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에 머물 때에나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떠돌 때에나 변함없이 양반지배층의 특권을 제한하고 신분제를 완화해 양반·천민 구분 없이 인재를 발탁해야 한다고 간언한다. 관료들의 부패를 막고,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문제는 지배층의 반성과 실천이다. 그래서 다산은 쉼 없이 관찰하고, 고민하고, 반성하고, 실천할 방안을 모색한다. 감동적인 것은 이 과정에서 다산이 언제나 힘없는 백성의 편에 섰다는 점이다. 다산은 특권을 대대손손 대물림하며 백성의 고통은 안중에 없는 양반층의 작태를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보고 꾸짖지만, 저잣거리나 논밭에서 마주치는 일반 백성들에겐 한없는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아파한다. 바로 이것이 다산을 읽는 감동이다.

 

다산은 결국 모든 것은 경제문제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백성들이 부모자식을 버리고 관리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이유도 돈 때문이요, 양반들이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양반 행세를 할 수 있는 것도 모두 돈 덕분이다. 다산은 지극히 현실적인, 봉건제 말기로 접어든 시대적 흐름을 예민하게 체득한 현실정치가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나라의 안위도 경제에 달렸고, 백성의 안민도 경제에 달렸다고 굽힘없이 주장한다. 다산이 모색하는 길은 ‘다 같이 잘사는 길’이다. 이는 양반층의 특권을 줄이고, 백성의 세금을 줄이고, 토지제도를 바꾸고, 관리로 대표되는 행정체제를 합리적으로 개선하면 가능한 일이다. 이를 위해선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계급이 먼저 각성해야 한다.

 

다산은 주장한다. “선비도 먹고 사는 수단을 경영하라!” 당시의 봉건적인 사회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실로 혁신적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다산의 세계관은 곧 다산의 글이었다. 굳이 ‘참여파 작가’라는 타이틀을 붙일 이유가 없을 정도로 다산의 삶은 곧 다산의 문장이었다. 다산은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같이 문학을 숭상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곧 문학을 숭상하듯 백성을 아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백성과 문학을 한자리에 놓고 아끼고 숭상하는 것이 다산의 시론이자 문장론의 출발점이다. ‘문장의 길은 곧 사람의 길’이기 때문이다.

 

 

작가 정약용 소개

 

다산(茶山) 조선 말기의 실학자. 정조 때의 문신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 공학자이기도 했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탁옹·태수·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다산(茶山), 당호는 여유(與猶)이며, 천주교 교명은 요안,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76년(정조 즉위) 호조좌랑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익의 유고를 얻어보고 그 학문에 감동 받았다. 1783년 회시에 합격, 경의진사가 되어 어전에서 『중용』을 강의하였다. 1784년 이벽에게서 서학(西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책자를 본 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78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가주서를 거쳐 검열이 되었으나, 가톨릭교인이라 하여 탄핵을 받고 해미에 유배되었다. 10일 만에 풀려나와 지평으로 등용되고 1792년 수찬으로 있으면서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한 성제(城制)와 기중가설(起重架說)을 지어 올려 축조 중인 수원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1794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 병조참의로 있을 때 주문모 사건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연루되어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다가 규장각의 부사직을 맡고 1797년 승지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자 자명소를 올려 사의를 표명하였다. 그 후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치적을 올렸고, 1799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나 다시 모함을 받아 사직하였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 신유교난 때 장기에 유배, 뒤에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다산 기슭에 있는 윤박의 산정을 중심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8년간 학문에 몰두, 정치기구의 전면적 개혁과 지방행정의 쇄신, 농민의 토지균점과 노동력에 의거한 수확의 공평한 분배, 노비제의 폐기 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유형원과 이익을 잇는 실학의 중농주의적 학풍을 계승한 것이며, 또한 박지원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기술도입론을 받아들여 실학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 ·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다. 합리주의적 과학 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 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저서로 『목민심서』 『경세유표』 『정다산전서』 『아방강역고』 『마과회통』 『자찬묘지명』 『맹자요의』 『논어고금주』 『춘추고징』 『역학제언』 『상서지원록』 『주역심전』 『사례가식』 『상례사전』 『악서고존』 『상서고훈』 『매씨서평』 『모시강의』 『삼미자집』 등이 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종합지 -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