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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엄무환 칼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덮고 있다

[엄무환 칼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덮고 있다
 

 

 

 

▲엄무환 국장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엄무환 국장] 운명이라는 말이 있다. 운명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이다. 즉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강력한 어떤 힘에 의해 내 인생이 결정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특히 내 의도와 다르게 나쁜 쪽으로 인생이 전개될 때 흔히 내뱉는 말이 “이게 다 내 운명이야.” 또는 “내 팔자야.”라고 한탄의 말을 한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면 운명이라는 말이 좋은 의미보단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 중에는 운명, 즉 정해진 어떤 힘에 의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 인생이 끌려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내가 원하는 쪽으로 얼마든지 내 인생을 주도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운명을 인정하든 안하든 운명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 같다. 예를 들어보겠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군에 입대하는 것, 자기가 원해서 입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바다.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니까 말이다. 만약 군에 안오겠다고 하면 어찌될까. 교도소로 직행해야 한다. 직장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게 된다. 불이익이 엄청나다는 거다. 그러니 대한민국에 태어난 남자들은 이러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 군복무를 감당해야만 한다. 만약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미국이나 일본에 태어났다면 국방의 의무를 질 이유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들이 군에 가야 한다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다.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죽는다. 혹 어떤 사람이 “난 안죽어” 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안 죽는가? 아니다.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싫어도 받아들여야만 하는 운명이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한번쯤은 병을 앓는다. 우리 모두 건강하게 살기 원하지만 그러나 원치 않게 병에 걸려 병원신세를 져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특히 암과 같은 무서운 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왜 평생 건강하게 살기를 그렇게 원하건만 병에 걸리는가. 병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결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기에 병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싫어도 어찌할 수 없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마치 운명과도 같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운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우리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아니 우리 인생 자체가 운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마치 구구단 공식처럼 말이다. 2×2=4, 2×3=6 이듯이 우리가 태어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고, 병에 걸리고, 사랑하는 사이인데 싸우기도 하고, 죽도록 고생도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죽는다. 이게 우리의 인생이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과도 같다. 그저 우린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존재인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운명이라는 거대한 힘을 피할 사람이 없다. 운명은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필수과목이지 선택과목이 아니다”는 말을 한다.

 

구약성경 창세기 1장에 보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겪게 될 운명과 관련된 얘기가 소개되고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말이다.

 

아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어째서 운명과도 같다는 말이냐고 항변할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것이어서 그렇다고 답하겠다. 단 한 사람도 이 세 가지를 피할 재간이 없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말이다.

 

혼돈이란 무질서다. 공허란 텅 비어버린 허무함이다. 흑암이란 앞에 보이지 않는 깜깜함이다. 이 세 가지가 존재하게 된 원인은 단 하나다. 빛이 없어서다. 즉 어둠의 세계에 존재하는 공통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무질서, 허무함, 캄캄함.

 

기존의 도덕률과 윤리 법질서를 무시하며 내 마음과 감정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삶, 혼돈이다. 세계적인 문호인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당포 노인을 살해하고도 자신을 나폴레옹처럼 초인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오히려 48가지의 죄를 해결했다며 기존의 도덕률과 법질서를 무시한 라스꼴리니꼬프의 생각은 무신론 철학자 니이체가 퍼뜨린 니힐리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군상이다.

 

지금 혼돈이 이 땅을 덮고 있다.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살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다고 한다. 각자가 하나님이 되려고 한다. 혼돈의 인생이다.

 

남자이지만 ‘난 여자다’라고 생각하면 여자가 되어 여자화장실도 가고 여자목욕탕도 들어갈 수 있는 시대가 되고 있다. 왜 당신은 남자인데 여자라고 하느냐 질책하면 성차별이 되어 법적 문제가 될 수 있다. 이것을 성별정체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법으로 보장하겠다고 한다. 차별금지법이 그 예다.

 

중고등학생들이 자기 마음대로 성관계를 하고 임신을 해도 교사나 부모가 간섭하지 마라. 간섭하면 법으로 제재를 하겠다. 이게 학생인권조례다. 이로 인해 지금 기존의 도덕률이나 질서를 뒤죽박죽 만들어버리는 아노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혼돈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각기 제 소견대로 살아가는 시대를 만들겠다는 발상이다.

 

이처럼 자기 생각, 자기 감정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버린 삶, 그래서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과 질서마저도 무시하는 시대, 혼돈의 시대요 혼돈의 삶이다.

 

『노인과 바다』라는 유명한 작품으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던 헤밍웨이, 그러나 그는 자기가 사용하던 엽총에 의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생이 허무해서라는 게 그 이유라나.

 

“신은 죽었다” 그리고 “인생은 허무하다”고 외쳤던 대표적인 무신론 철학자가 니이체다. 그 역시 인생 마지막에 정신병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생을 마감했다.

 

지난 1997년 12월 3일, 우리나라에 경제적 위기가 찾아왔다. 국가부도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그래서 IMF로부터 구제 금융 자금을 지원받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저 유명한 IMF 사태이다. 갑작스런 금융위기 한파가 몰아닥치자 많은 회사들이 부도가 발생하여 회사 문을 닫게 되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다. 이때 사업이 망했거나 직장을 잃어버린 사람들 중에 앞이 캄캄하여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짙은 어둠이 드리워졌던 시기였다.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어둠이 몰려올 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함이 뒤덮을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이 좌절하고 인생을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와같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 이 세 가지는 언제든지 우리 인생에 예고없이 방문한다. 운명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 세 가지 존재가 더욱 무섭게 그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과학이 발달하고 의술이 발달하고 IT 문명의 첨단을 걷는 시대이건만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의 기세는 더욱 맹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세 가지 운명과도 같은 존재 앞에서 사람들은 좌절하고 무력감을 드러내고 있다.

 

유명한 인기 연예인들이 왜 극단적 선택을 하는가. 돈이 없어서인가. 아니다. 이 세 가지 존재 앞에서 무력감이 드러나서가 아니겠는가 싶다. 이 세 가지 존재의 위세에 눌려서... 그렇다면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 운명과도 같은 존재를 극복할 해결책은 없을까? 있다. 이 세 가지 존재를 극복할 비결이 있다. 성경이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Let there be light” 이게 해결책이다. 빛 말이다. 빛이 비취면 된다. 그러면 어둠이 물러간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닌가. 아주 간단하다. 복잡하지 않다.

 

빛이 비쳐지자 세상이 달라졌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으로 인해 밤이 지나갔고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고 성경은 말한다. “The evening passed and the morning came.” 저녁(밤)이 지나갔고 그리고 아침(낮)이 왔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이 땅을 뒤덮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빛이다. 빛만 있으면 운명이라는 거대한 구름이 떠나간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떠나간다. 어둠의 인생을 지나 빛의 인생 낮의 인생이 펼쳐진다. 그 빛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1장에서 이 빛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성경은 예수가 바로 빛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빛이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이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가리켜 낮의 인생, 빛의 인생이라고 한다. 이 말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의 인생은 밤의 인생, 즉 혼돈과 공허와 흑암 아래 놓인 어둠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어둠의 인생과 빛의 인생, 이 두 가지 인생의 결정적 차이는 얼마나 착하냐, 얼마나 돈이 많으냐,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스펙이 좋으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딱 한 가지 빛이신 예수를 영접했느냐 영접하지 않았느냐로 구분된다. 영접한 사람의 인생을 빛의 인생 또는 낮의 인생이라고 하고, 영접하지 않은 사람의 인생을 밤의 인생, 어둠의 인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는 예수를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고 말했다.

 

“너희(예수 믿는 사람들)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처럼 세상의 빛인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왜 우리 사회에 어둠이 점점 짙어가는 것인가. 동네마다 교회 십자가가 수없이 많은데 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영역을 넓혀가는 것인가.

 

아무리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기세를 떨친다할지라도 정말로 빛이신 예수를 믿는 예수의 사람이 있다면 그 사회는 어둠이 아니라 밝음의 사회가 될 것이다. 어둠이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짙어지는 것은 빛이 비쳐지지 않아서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세상의 빛인 진짜 예수믿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가 아닐까. 무늬만 예수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해서가 아닐까. 아니면 예수믿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고 교회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가 아닐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판을 치는 교회 밖 세상을 나 몰라라 외면하고 있는 목회자들과 선데이 크리스챤들 말이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혹 이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짙어가는 시대속에서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 빛을 비추려고 온 몸을 던져 헌신하는 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래도 이 땅에 이기주의와 탐욕에 타협하지 않고 어둠의 권세 무릎꿇지 않은 7천명의 거룩한 사람들이 있음에 그나마 위안을 갖는다. 우리 <시사타임즈>도 그 길을 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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