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15)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들려오는 사죄와 용서 그리고 화합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아침에 베를린 교당에서 묵상심고를 올리고 대문을 나설 때는 아직 가로등 하나가 힘겹게 세상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광장에 아침 9시에 독일 교포들과 뉴욕교포 권혜순씨, LA 교포 정연진, 그리고 내일 열리는 베를린 마라톤에 참가차 LA에서 온 김재창씨가 평화 발걸음을 함께 하여 주었다. 일본인 평화운동가 겸 사진작가 야지마 츠카사씨가 나와서 사진 촬영을 도와주었다.
그는 자기를 “일본 놈”이라고 유창한 한국말로 소개하였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자원봉사자로 일하게 되었다. 위안부 생존자들이 머물고 있던 곳이다. 평화통일 마라톤에 일본인이 참석해서 응원해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런 일본인이 100명만 있어도 큰 힘을 받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멀리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는 마음에 모여서 나의 발걸음의 무게를 덜어주었다. 김재창씨는 LA 마라토너들의 마음을 담은 성금과 김치와 햇반, 김, 라면을 챙겨오기도 했다. 포장 김치는 벌써 가스가 차서 터질 듯이 배가 빵빵했지만 요긴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김치는 조금 쉬어도 여기에 소시지나 돼지고기를 넣고 팔팔 끓이면 내 입맛에 맞는 최고의 요리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날 브란덴부르크 광장에서는 베를린 마라톤이 개최되어서 많은 곳이 교통통제를 시작했고 세계 각국에서 온 마라토너들로 북적였다. 마라토너들이 북적이는 광장은 더욱 활기가 넘쳐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내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서 유라시아대륙을 달린다는 현수막을 보고 같이 사진 촬영도 하고 응원의 힘을 보태주기도 하였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작금의 한반도 문제로 옮겨갔고 모두들 염려와 응원의 언어를 보탠다.
강대국들은 그들의 손으로 갈라놓은 나라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도 우리의 가슴 속에는 한민족은 하나라는 공동체적인 인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우리의 통일이 세계의 평화와 얼마나 직결되어 있는지를 알리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지금까지 지속되고있는 강대국들의 패권주의가 세계평화를 얼마나 위협하는지 알리는 일 말이다.
우리 일행은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출발하여 이제 남쪽으로 함께 평화의 행진을 했다. 바로 홀로코스트 기념관 앞에 서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각자 마음의 묵념(默念)을 올렸다. 2005년도에 건립된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있다. 축구장 3개를 합친 거대한 사각의 공터에 서로 다른 크기와 높이의 직사각형의 기둥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미로를 걸으며 하나하나의 기둥을 보듬어 만져보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경험하지 못한 지난 세기의 끔찍함을 되새겨 보았다.
세상에는 별다른 이유 없이 행해지던 많은 잔인한 살인들이 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조센진이라는 이유, 마녀사냥의 대부분은 그렇게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이곳에서 모든 억울하게 죽은 영령을 위로하는 지노기굿이라도 열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다가 얼마전 TV에서 독일 여인이 한국의 무당에게 신내림을 받았다는 소식을 본 기억이 난다. 그녀가 독일에서 굿판을 벌인다고 한다. 그 사각의 미로를 잠시 걸어 다니다 보니 반야심경의 공즉시색 색즉시공이 생각난다. 삶은 허공에 떠오르고, 갈 길을 잃은 듯 막막하고 알 수 없는 것이 조여 오는 갑갑한 느낌이 들게 설계하였다. 당시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가스실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유대인들의 참담한 심정을 표현한 설치예술인 셈이다.
정확한 수는 누구도 알지 못하겠지만 당시 유대인 6백만 명, 폴란드인 2백만 명, 집시 80만 명, 동성애자, 장애인 등 약 천만 명이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학살한 홀로코스트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되고 복잡한 사건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특별한 날의 연속이어서 가스실에 끌려가는 날만이 더 특별한 날이었을 이들의 극락왕생을 빈다. 하늘만이 열린공간이었을 그곳에서 유일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조차도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에 대한 박해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기원전부터 유럽 각지에 이주해 정착하며 지중해 해상무역을 주도한 민족은 그리스 민족과 유대인 두 민족이다. 유일신을 믿고 신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유대인들은 폐쇄적이고 이기적이어서 이주한 곳에 원주민과 늘 갈등이 심했다. 거기에 유럽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종교적인 굴레까지 더해져 흑사병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집단의 희생양이 되곤 하였다.
심지어 종교개혁에 성공한 루터조차 유대인들에게 어떤 자비나 동정 법적 보호도 필요 없다고 외쳤을 정도이다. 바그너도 반유대주의자로 유명하다. 1차대전에 패배하고 세계적인 불황이 닥쳐 피폐한 독일경제와 공화국 정치를 막 시작하여 불안정한 상황에서 반유대주의자 히틀러가 1933년 나치당의 수상이 되면서 유대인의 탄압은 서서히 노골적으로 변한다. 그래도 처음부터 학살이 시작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여기에는 전쟁이 가져다주는 집단광기도 한몫한 것이다.
이런 잔혹한 사례는 수백만 년 인류 역사에 얼마든지 있다. 독일과 일본에 의해 압축적이고 극단적으로 재현되었을 뿐이다. 중세 유럽의 마녀사냥이 그렇고 여순항쟁, 6.3 제주항쟁, 노근리학살, 또한 미군과 우리가 저지른 베트남 학살 등 수없이 많은 패악이 이 행해져왔다. 이런 일들은 광기의 어두운 동굴 속에서 빛을 뿜는 맹수의 눈빛처럼 전쟁의 어둠 속에서 더 극명하게 보일 뿐이다. 모든 감춰진 사실 속에는 죽은 생선의 사체처럼 스스로 드러나려는 부력이 있다. 그런 것들은 물 속에 다시 감출 수가 없다.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분단도 전쟁도 없었을 텐데, 전범국도 아니면서 분단의 양상은 독일의 경우보다도 더 잔혹했다. 전후 분단되어 마땅할 일본은 한국전 덕분에 패전의 페허에서 벌떡 일어섰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한국 군사정권은 야비한 일본정부를 상대로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맺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고 공산주의에 대항하기를 원했지만 한국은 일본의 사과와 배상부터 할 것을 요구해왔었다. 군사정권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사과 없이 청구권 3억 달러와 경제 차관 3억 달러를 지원받는 대신 식민지배의 피해의 모든 보상을 포기했다.
독일이 일으킨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은 인류 역사의 최악의 암흑과 최고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철저하게 과거를 반성하고 세계인들 앞에 당당하게 나왔다. 돈 몇 푼 던져주고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 같은 꼼수를 부리질 않았다.
독일인들은 이 엄청난 역사적 과오가 히틀러뿐만 아니라 나치에 동참했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국민 모두의 오만하고 잘못된 처신이라며 철저히 반성하고 있다. 그렇다. 무관심으로 역사적 과오를 보고도 애써 고개를 돌리려 했다면 그것도 역사 앞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것은 독재자의 잘못된 판단이기도 하지만 지나친 국수주의(國粹主義)가 빚어낸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나라 사랑’ ‘조국을 위하여’라는 말도 쓰지 않는다고 한다.
1970년 브란트 총리는 취임하자 제일 먼저 한 일은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기념관을 찾은 일이다. 브란트 총리는 세계인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사망자들의 비석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브란트가 무릎을 꿇을 때 모든 독일 국민도 마음을 모아 세계인들 앞에 함께 무릎을 꿇었다. 독일 국민은 어두운 역사를 반성하며 받아들였고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 사람들이 모두가 한마음으로 어깨를 다독이며 그들을 일으켜 세워 박수를 쳐주었다.
독일과 일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망령은 그들의 패망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신생 독립국들은 큰 혼란을 겪어야 했고 새로운 국가의 시민들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 때 자행됐던 것과 같은 어쩌면 더한 인권유린을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곳에서 유독 생각나는 동백림 사건이 그렇듯 국가에 의한 폭력은 계속돼왔다. 그들의 자행한 야만적인 고문은 여기저기서 이어졌고 최고의 인권 국가라고 떠벌리던 심지여 미국에 의해서 관타나모에서 자행되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베를린 한복판에서 평화행진을 계속하여 5km 지점에서 헤어졌다. 미국에서 온 동포들도 독일의 교포들도 홀로 험한 길 보내는 맘이 편치 않아 보였다. 작별의 시간은 길었다. 나는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포옹을 해주며 오히려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어야 했다. 베를린에서의 달콤한 시간을 뒤로하고 나홀로 머나먼 조국 통일 순례길은 다시 시작되었다.
새로 장만한 나의 한혈마는 거침없이 달렸지만 많은 것들이 앞으로 지나간다. 수많은 메르세데스, BMW, 아우디가 무서운 속도로 앞으로 쌩쌩 달려 지나쳐가고, 하늘 높이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 철새도 나를 지나쳐 날아간다. 가을과 외로움만이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아마도 나의 속도와 가을의 속도는 같을 것이다. 그런데 나를 지나쳐가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태극기를 단 자전거 두 대가 나를 지나쳐가고 있다. 나는 순간 “한국”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처음엔 못 알아들은 것 같아서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저만큼 가다 자전거 두 대는 섰다. 김병한, 지평선 두 청년은 자전거를 타고 영국에서 출발하여 벨기에 네덜란드를 거쳐 지금 독일에서 체코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다. 이탈리아까지 가서 이 여행을 마친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의 여행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 자기들은 체코의 프라하에서 사흘 정도 머물 예정이므로 일정이 맞으면 거기서 밥 한 끼 같이 먹기로 했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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