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6)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36)
마리차 강변의 추억 ‘La Maritza’과 대동강변의 추억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라~~라~ 랄 라라라 라라라, 라~~라~ 랄 라라라 라라라, 실비 바르탕의 ‘마리차 강변의 추억’의 후렴구를 흥얼거리면서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내가 마리차강이 아직 계곡물에 불과할 때부터 그 아름다운 물길을 따라 며칠을 달리면서 흥얼거렸듯이 말이다. 이 노래를 전체적으로 따라 부를 수는 없었지만 이 후렴구를 흥얼거리노라면 언제나 기분이 상쾌해지곤 했었다. 실비 바르탕의 감미롭고 우수에 찬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마리차강’은 늘 몽상에 사로잡혀 살던 소년에게 피안의 강이었다. 그 소년이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 아직도 소년 같은 체력으로 소년 같은 꿈을 안고 그 강변을 달리고 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센강이 당신의 강이듯이 마리차는 나의 강이다. 내 나이 열 살일 때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지, 그 흔한 인형도 없었고, 어린 시절 추억은 나에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지, 아버지가 낮은 소리로 흥얼거리는 후렴구 밖에는 라~~라~ 랄 라라라 라라라, 라~~라~ 랄 라라라 라라라.... 내 강의 새들은 우리 모두에게 자유를 노래하고 있었지!” 그녀는 불가리아의 소피아 외곽 산골 마을 이스크레츠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던 해에 소련의 침공으로 불가리아는 공산화되었다. 8살 때 공산주의를 피해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내 아버지의 가족이 공산주의를 피해 남한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이주했던 것처럼. 그녀의 어린 나이에 고국을 등져야 했던 회한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음악이다.

 

그녀의 가슴에 마리차 강물이 언제나 애처롭게 흘렀듯이 공산주의를 피해 남한으로 온 내 아버지의 가슴엔 대동강물이 평생을 격랑을 일으키며 흘렸다. 잠시 피해있으면 모든 것이 금방 제자리로 돌아갈 줄 알고 기다리다 못내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회상과 시(詩)를 통해서 대동강도 나의 마음에서 흐르며 나의 강이 되었건만 눈을 뜨면 대동강은 여전히 피안의 강으로 남아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그해 11월 불가리아에서도 공산정권이 무너지고1990년 7월 민주주의 신헌법이 채택되고 그해 10월 마침내 실비 바르탕은 38년 만에 고향 불가리아를 방문해 소피아 국립극장에서 벅찬 가슴을 누르며 억지로 이 노래를 끝까지 부를 수 있었다. “센강이 당신의 강이듯이 마리차는 나의 강입니다.” 8살 때 프랑스로 아버지를 따라 망명해서 17살에 이미 프랑스의 아이돌 가수가 되었던 그녀에게도 세느강은 당신의 강이었고 마리차강은 나의 강이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소피아를 벗어나서 첫날은 42km를 달리고, 끝마칠 시간쯤 가진이네 식구들이 차로 달려와 그 차를 타고 그 집으로 가서 자고 와서 다음날 어제 마친 지점까지 와서 다시 뛰고 둘째 날도 그렇게 했다. 셋째 날은 그러기엔 너무 멀어 근처의 허름한 여인숙을 찾아야 했다. 발칸산맥 산자락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왔고 이 마을은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마리차강이 시작되는 깊은 산속 마을이었다. 숙소를 찾느라고 동네 꼬마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여남은 명이 쭈르르 앞장서 간다. 아이들을 따라 좁은 골목길을 몇 번 꾸불꾸불 갔더니 허름한 여인숙이 나타난다. 아이들은 먼 나라에서 온 손님이 신기한 듯 가지 않고 마당에서 빙글빙글 돌며 놀다 주인에게 쫓겨나간다. 아이들은 마리차강을 가슴에 품고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간혹 만나는 숲속 마을들의 흙벽돌 집들은 가난하여 작고 허름하지만, 풀을 뜯는 양 떼와 목동의 모습에서 걱정과 근심을 읽어내기란 하루 42km씩 달리는 일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마리차 강변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아이들이 나를 멀리서 발견하고는 달려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깡충 걸음으로 함께 달린다. 아이들의 뒤에는 개도 두 마리 신이 나서 쫓아오고 있었다. 몸이 가벼운 아이들은 내 정도 속도의 달리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지구력이 없다. 쌀쌀한 날씨에도 티셔츠가 땀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는다. 내 티셔츠 한가운데는 한반도기가 그려져 있다. 가슴에 있는 한반도기가 내 열정을 태운 땀에 절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녀석들의 얼굴에는 흙이 묻어있고 몇몇은 코를 질질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그중에 허름한 뉴욕양키스 모자를 쓴 아이가 골목대장인 것 같다. 녀석은 제법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One Korea!” “One World!”를 외치라고 제의하자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멈칫했다. 골못대장이 뭐라고 아이들에게 말하고 선창하자 우리는 함께 “One Korea, One World!”를 함께 외치게 신나게 마리차 강변을 따라 한참을 달렸다.

 

다시 흙벽돌 집이 너덧 채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 물건이라야 별 것 없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가게에 들어가자 좁은 가게에 아이들도 따라 들어왔다. 가게 안에는 뜨네기가 반갑지 않은 쥐들의 불편한 움직임이 더 많았다. 과자를 사서 먼저 내가 하나 꺼내 먹고 아이들에게 한 봉지씩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이 신이 나서 어린 염소 높이 깡총깡총 뛰듯이 통통 통 뛰어 왔던 길로 사라져 간다. 녀석들 작별인사나 나누고 가지! 아마 실비 바르탕이 ‘마리차 강변의 추억’을 부르던 나이가 되면 이 마리차강을 추억하며 오늘 나에게 작별 인사도 못하고 뛰어갔던 일을 생각하며 웃음지을 것이다.

 

나는 단풍이 곱게 물든 마리차 강변을 대동강을 가슴에 품은 또 다른 가족과 함께 달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상관없이 “평화 통일”이란 구호를 외치며 달리고 있다. 불가리아 전통 음악의 한 장르는 아카펠라와 비슷한 무반주 여성 합창 음악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인류에게 가장 오래된 악기 중 하나이다. 여성 특유의 발성과 비브라토가 영성을 자극하는 불가리아 음악의 특성을 보여준다. 불가리아 산악지역에서는 음악이 일종의 의사 소통 수단으로 느린 저음의 신비로운 리듬을 탄다. 석양 무렵 새들이 모두 희망의 나래를 펴고 힘차게 솟아오르며 지지배배 노래할 때 나도 이들과 함께 대동 강변을 힘차게 달리고 싶다. 내가 혼자 달리며 외롭고 힘들어 지쳐 쓰러져 갈 때 일으켜 세워주고 힘을 준 이들과 마리차 강변의 달린 일들이 추억이 되었을 때 그 후렴구를 같이 흥얼거리며 희망의 미래를 꿈꾸며 함께 달리고 싶다.

 

플로브디프, 마리차강의 운치를 품어 안은 불가리아 제2의 도시이다. 오랜 역사의 제2의 도시다운 풍모를 갖췄다고 느껴지진 않아 조금 아쉬웠다. 이곳에 원형극장 일부의 모습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나는 지금 고적 탐사대의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 아니었으므로 미련 없이 지나쳤다. 이 도시는 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름도 필리포의 폴리스라는 의미로 필리포폴리스로 불리다 플로브디프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2000년의 고도의 무너진 산성에서 평화를 지키다 쓰러진 옛사람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동양에 가까워 로마의 원형극장이 있는가 하면 오스만의 유적지인 금요 모스크와 성 엘레나 교회와 성 마라나 교회 등 동방정교의 교회들이 함께 있다. 이제 서양 평화 순례길이 마무리되어간다. 이제 며칠 후면 터키로 들어간다. 서양의 정신과 문화의 근간은 기독교이다. 기독교가 세계종교가 된 것은 시대적 배경이 영향을 주었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예수의 제자와 제자의 제자가 활동하던 1, 2세기는 로마제국의 황금시대이다. 그 시절 전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 평화가 찾아왔다.

 

인류 역사상 드물게 찾아온 평화가 기독교 포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왕래는 자유롭고 여행은 비교적 안전했다. 사람의 왕래가 자유스러우면 문화와 종교와 사상의 교류가 자유로워진다. 아쉽게도 이런 평화는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서유럽의 시각으로 교육을 받아와서 그리스 정교는 잘 알지 못한다. 그리스 정교에서는 ‘정통’을 가톨릭에서는 ‘보편’을 강조하였다. 두 종파는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다가 1054년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 뒤 비잔틴 제국과 동유럽 문화의 중요한 바탕이 된 그리스 정교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례 의식을 보다 중시하며, 자치적인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권위가 그리 대단치 않고 나라별로 자립화가 되었다. 그리스 정교는 그 후 발칸반도에서 러시아로 넘어갔다. 지금은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러시아 등에서만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 정교 국가들은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에 걸쳐 모두 오스만튀르크에 정복을 당하게 된다. 이들 국가는 서구 여러 나라의 지원을 받아 몇 번이나 오스만군과 결전을 벌이지만 번번이 대패하고 말았다. 이들 나라가 터키로부터 완전 독립을 이룩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이다. 이들은 암울한 식민시대에 그리스 정교를 민족 고유문화로, 동질성의 상징으로 삼았다.

 

누구나 가슴 속에 흐르는 강을 품고 살아간다. 센강이 에디트 피아프의 강이라면 마리차강은 실비 바르탕의 강이다. 대동강이 아버지의 강이라면 한강은 나의 강이다. 실비 바르탕의 아버지가 흥얼거리던 후렴구가 있었다면 나의 아버지가 흥얼거리던 긴 한숨 같던 후렴구도 있었다. 대동강이 그립던 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을 데리고 가까운 한강을 가곤 했다. 거기서 낚시도 하고 물장구도 치고 아름다운 돌도 주으러 다녔다. 그리하여 한강은 나의 강이 되었다. 한강에 가서 고기 잡고 물장구치고 보트를 타던 어린 시절의 기억뿐만 있는 게 아니다. 최근에는 주말이면 왕숙천이나 뚝섬, 여의도를 달리면서 유라시아횡단 마라톤 준비를 하던 강이다. 내 기억 속의 한강은 평화의 강이기도 했지만 일순간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거친 강이기도 했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마리차 강변을 달리면서 나의 발걸음이 대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나는 직감한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다시는 못 밟은 그 대동강의 솔밭 언덕을 대를 이어서라도 기필코 가야겠다는 것은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회상과 시(詩)를 통해 내 피 속에서 강물이 되어 흐르는 유전자인 것이다. 내가 그 길을 달리는 것은 실비 바르탕이 38년 만에 귀국하여 소피아 국립국장에서 공연하는 감동과 비견이 될 것 같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