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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40)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 (40)

동서양을 다 품은 도시 이스탄불

 

 

[시사타임즈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늘 피로에 절어있지만 아주 가끔 몸 상태가 최고에 이르는 날이 있다. 몸이 아스팔트 위를 통통 튀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어제는 그렇게 피곤이 몰려오면서 비 맞은 진흙 벽돌처럼 무너져 내리는데 오늘은 이렇게 산뜻하고 활력이 넘친다. 가진이네 가족이 소피아에서 진하게 끓여서 공수해온 사골국을 배불리 먹었을 뿐인데 말이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통칭 지중해라고 부르지만 내가 지나는 길은 흑해와 에게해를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이어주는 마르마라해이다. 그 해안 길을 산책하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간다. 그 해변에 멋지고 호화로운 저택이 즐비하다. 이렇게 육신이 최고의 움직임을 보일 때 비록 나는 선천적인 음악적인 자질이나 음감은 없어도 달릴 때 내 두 다리로 전해오는 마드마라해의 바람과 율동적인 리듬 위에 내 몸을 맡긴다.

 

공원이나 숲길이나 강변을 달릴 때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는 그리 깊은 음악적인 자질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최고의 리듬감을 내게 선사한다. 지중해의 풍요로운 햇살이 나의 발길을 유혹하여 이끌고 마르마라해의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나의 발걸음 소리에 화음을 넣어주고 있다. 나는 달릴 때 언제나 박자에 맞추어 움직이고 어떤 알 수 없는 지휘자의 손끝을 예민하게 응시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터키 행진곡’이란 피아노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곡이지만 모든 군대행진곡의 원조는 오스만튀르크 군대의 행진곡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오스만튀르크군의 군대행진곡의 장엄하고 경쾌하고 위용 있는 행진곡이 울려오면 적들은 싸움하기도 전에 미리 겁먹고 도망가기 바빴다고 한다. 뉴욕에 있을 때 웨스트포인트 군악대의 연주회에 갔었던 기억이 난다. 메흐테르 군악대는 1299년 창설된 세계 최초의 군악대이다. 포탄이 우박처럼 전쟁터에 떨어져도 눈 하나 깜빡 않고 전진하며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는 연주를 계속하는 군악대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톱카프 궁전 앞에서 관광객을 위해 연주를 하는 군악대에서 그런 위용을 찾겠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달리는 나의 머릿속에는 모든 군악대의 연주가 울려 퍼진다. 박물관 앞에서 관광객들과 학생들을 위해 연주되는 음표와는 질이 다르다.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평화의 행진곡의 내 머릿속에서 연주되어 나는 그 힘으로 달리고 있다.

 

이스탄불은 과거에 대한 향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서양과 동양이 공존하는 것처럼 독특하게 조화를 이루는 도시이다. 토인비는 이곳을 “인류 문명의 살아있는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히타이트, 아시리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문명과 비잔틴, 이슬람이 서로 만나 싸우며 영향을 주며 공존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 혼에 햇살이 비출 때 물결의 반짝임과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있는 수많은 모스크의 미나레트와 왕궁과 해안가에 빼곡히 들어선 멋진 가옥들이 동화적으로 아련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스탄불은 확실히 동화적인 요소가 많았다. 시장에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 갓 나온듯한 진귀한 물건들이 값싸게 팔리고 있었고 식당에서 나오는 냄새는 자극적이어서 입맛을 돋우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숙소를 정하고 가진이 어진이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500년 제국의 수도의 복잡한 뒷골목을 찾아 나선다. 고기 굽는 냄새가 좁은 골목으로 유령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이제는 머나먼 이야기가 되어버린 과거의 화려함, 화석으로 굳어버린 전설, 사라져버린 건물, 내 발걸음은 이런 곳에서 환상과 뒤섞이고 만다. 심한 교통체증 때문에 찻길을 가로질러 달리는 어린아이가 그리 아슬아슬하진 않은 곳이다. 저만큼 앞에 전신을 검은 천으로 두르고 눈만 빼끔 내놓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인이 남자의 팔짱을 다정하게 끼고 간다. 오스만제국이 서양과 러시아와 전쟁을 치르면서 쇠잔해지고 이스탄불의 폐허로 변하며 사람들이 가난해지고 침울한 곳으로 변하는 것을 어린 시절에 목격하며 자랐을 노인의 주름은 유난히 깊었다. 골목길에는 창문에서 금방 발사를 마친 오스만제국의 포신처럼 연기가 나는 난로 연통이 삐져 나왔고, 도시의 감추고 싶은 오물과 썩은 냄새가 진동하지만 그런 것을 들추어내는 건 나그네의 예의가 아니다.

 

이스탄불은 아침 햇살처럼 찬란하고 신비하고 역사적이며 용광로처럼 무엇이든 녹여내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것 같다. 동서양의 대륙을 다 포용한 유일한 도시는 말 그대로 동서양의 인종과 문화와 역사와 먹거리로 풍성하다. 그런 도시를 달리는 기분은 양탄자를 탄 왕자가 새로운 요술의 세계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초겨울 아시아 쪽에서 떠오르는 해가 높은 첨탑을 물들일 때면 이슬람 전통과 현대가 하나가 되어 이스탄불을 더 이스탄불답게 만들었다. 이곳은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도시의 기이함과 새로움, 놀라움과 환상, 다양성을 품어 안았다. 내가 두 개의 대륙에 걸쳐있는 하나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본 것은 태양은 아시아 쪽에서 떠왔다는 것이다. “태양 그대 고발하는 불꽃이여! 태양 그대 징벌하는 불꽃이여! 태양 그대 희망하는 불꽃이여!”

 

이스탄불은 인구 천오백만의 초대형 도시에는 삼백만 명의 시리아 난민이 있고 그중의 80만 명이 어린아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지금도 아까 저녁을 먹고 성소피아 성당 앞을 지나올 때 피리를 불며 구걸하던 잘 생긴 시리아 난민 어린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눈에 밟힌다. 전쟁의 참화를 겪은 마음의 상처가 평생 그 아이를 할퀴며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포탄에 공들여 쌓은 건물들은 한순간에 무너져내리고 총알은 누군가의 심장을 향하여 날아가며 절규와 함께 피는 낭자할 것이다. 배고프고 헐벗고 병들어 죽어가며 비명을 지를 것이며 첫사랑의 애절한 추억도 담지 못한 어린 여자애들이 채 피어나지도 못한 몸을 팔고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므로 우리가 함께 보듬어야 한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이곳은 여러 제국의 수도였다. 그만큼 매력적이고 동서양의 경계에서 어디로든 세력을 뻗쳐나갈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제국이 바뀔 때마다 이름도 바뀌었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그 서로 다른 문명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남다른 도시이다. 다른 문명이 조화를 이뤄 아름답고 마법적으로 느껴진다면 우리의 삶도 더불어 살며 그러해야 한다. 아라비안나이트의 마법적이고 동화적인 분위기처럼 더불어 사는 평화의 미래는 분명 마법적이고 동화적일 것 같다. 도시의 어느 곳을 파도 옛 보물이 나오고 유적이 나오는 곳이라 유네스코에서 이스탄불에는 고층건물도 짓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이 역사적인 도시는 터키 서쪽에 있다.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흑해와 지중해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을 품고 위치한 도시이다.

 

로마가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곤경에 처하자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에 그리스의 식민 도시인 비잔티움(Byzantium)을 제2의 수도로 삼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이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장엄한 성 소피아 성당이 있다. 블루모스크가 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벤허 영화에서 본 듯한 고대 전차 경기장이 있고 16세기에 건축된 쉬레이마니에 모스크가 있다. 오스만의 절대 권력자 술탄이 살았던 톱카피 궁전도 보스포루스 해협을 면하고 있다.

 

다음날 하루 이곳에서 휴식 겸 관광을 하기로 하고 우리는 언덕길을 내려와 보스포루스를 운항하는 유람선에 올라탔다. 배 선창에 올라타자 한 바다와 다른 바다를 이어주는 해협만이 가진 급한 물결이 온몸으로 전이된다. 보스포루스 양안에는 병목현상이 일어나는 협곡에 매복하는 최고의 전략가들처럼 낚시꾼들이 흑해와 마드마라해를 여행하는 고기를 잡으러 새까맣게 진을 치고 있었다. 아마도 낚시꾼들이 물속의 고기보다 많을 것 같았다. 고양이들은 잡은 고기를 채가려 여기저기서 쪼그리고 앉아서 분주히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강은 서울에서, 파리에서, 부다페스트에서, 베네치아에서 쉽게 볼 수 있지만 도심을 가로지르는 해협은 여기가 아니면 만나보지 못하리라! 선창에 서면 멋진 해안 저택의 이슬람식 정원이 보이고 가끔은 그 정원의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모든 꽃보다 아름다운 주인 여자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배에 초점 없는 시선을 던지는 모습이 마치 세밀화처럼 섬세하게 보인다.

 

오르한 파묵이 이스탄불에 태어났을 때 이곳은 2천 년 역사에서 가장 나약하고, 가난하고 고립된 시기였다. 그는 오스만제국의 몰락이 불러온 폐허에서 묻어나는 슬픔이 그의 문학의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한국전이 끝난 지 얼마 후에 내가 태어났을 때의 서울과 같은 우울함이 이 도시를 뒤덮었다. 그때 서울은 모든 것이 파괴되고 좌절과 암울함이 뒤덮였고 빈곤은 모든 것을 막아섰다. 보스포루스가 이스탄불 시민들에게 혼과 힘을 불어넣었다면 한강은 서울 시민들에게 변화무쌍한 강의 자유와 자긍심과 원기를 불어넣었다. 오르한 파묵은 “보스포루스는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회복시키고, 도시와 삶을 건재하게 만드는 무한한 어떤 선과 긍정의 원천이다.”라고 노래했다. 나도 나의 한강이 그러하다고 생각하며 이곳에서 새삼 나는 내가 태어난 시대적 상황과 의미를 되새긴다.

 

한때 콘스탄티노플은 1054년 동서교회 분열 때 동방교회의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점령하여 오스만제국의 수도로 삼고 ‘이스탄불’(Istanbul)이라 불렀으며, 1923년 서구 세력에 와해된 제국의 마지막 술탄이 수도를 앙카라로 옮길 때까지 오스만제국 최고 도시로서의 영화를 누렸다. 그 후로도 사람들의 마음속 터키의 수도는 영원히 이스탄불로 남아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비잔틴 건축물 성소피아 성당을 건설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것이 동원되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성당이 불에 타는 것을 막기 위해 목재 대신 석재를 사용하였다. 그는 이 걸작 성당을 짓기 위해서 제국의 각지에서 대리석을 옮겨오도록 명령했다. 이때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델피 신전의 대리석 기둥이 뽑혔다. 백색의 대리석은 마르마라 지역에서, 녹색의 대리석은 유베 지역, 분홍색의 대리석은 신나다 지역, 노란 대리석은 아프리카에서 가져왔다.

 

▲사진제공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c)시사타임즈

 

성당의 또 하나의 자랑은 56m의 높은 돔이다. 천장은 붉은색을 띤 황금색으로 빛나고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받치고 있다. 내부의 벽면은 화려한 모자이크화로 장식했고, 벽이나 천장은 석고를 바른 다음 유리로 만든 금칠 조각들을 이용하여 모자이크화를 만들었다. 성당에 들어서서 나는 경건하게 기도를 했는데 기독교의 하나님에게 기도했는지 이슬람의 알라에게 기도했는지 나올 때 잊었다. 아무튼 난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전쟁이 결과적으로 소피아 성당의 쇠락을 가져온다. 당시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농간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지 않고 이 성당이 있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이 사건으로 가톨릭과 동방정교가 갈라서면서 비잔틴 제국은 차츰 세력을 잃게 된다. 이후 오스만튀르크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성당에 이슬람 첨탑인 미나레트가 들어서며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변모하게 된다. 서양의 대도시와는 달리 역사적인 대(大)기념물 앞을 지나는 이스탄불 시민들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다. 이런 것들에 자부심만을 느끼고 살기에는 삶이 너무 강퍅한 모양이다.

 

언제나 큰 변화는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 사골국을 배불리 먹고 바로 다음 날 활기를 되찾은 나의 몸처럼 철조망을 걷어낸 한반도는 금방 활력을 되찾아 세계평화의 중심국이 될 것이다.

 

글 : 강명구 평화 마라토너​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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