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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이임춘 테어링아트 - 시공의 층위에서 빚은 파괴의 창조

이임춘 테어링아트 - 시공의 층위에서 빚은 파괴의 창조

 

 

[시사타임즈 = 홍경한 미술평론가] 낱낱이 손으로 맞들던 수작업의 프레임 안에 시각적 인지를 기반으로 창출되던 회화의 진득한 맛은 오랜 시간 예술가들의 주요 표현 방식으로서 가치와 위상을 지녀왔다. 3차원의 현실을 2차원에 반영하던 회화의 독특한 매력은 작가들에게 강인한 애착을 심어주었고, 적어도 600여년에 달하는 역사를 바탕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오늘날과 같은 사진기가 발명되고 예술에 대한 예술가의 태도가 변화하면서 회화는 필연적으로 어제의 그것과는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수없이 명멸하면서도 존속되어 온 현대미술은 가장 격변기랄 수 있는 1960년대를 지나며 그 어느 때보다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현상에 적응해야하는 처지에 놓였으며, 뉴패러다임을 선도해온, 소위 테크놀로지 아트 혹은 미디어아트의 자연스러운 출현은 침범불가침의 회화세계를 숙주로 확장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기존 불변하리라 믿었던 조형언어의 고정성마저 비획일적으로 만드는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실제로 당대 매체의 자유로움에 포박된 다원적 양태는 익히 접할 수 없었던 예술표현방식을 수없이 생산해냈다. 예술 형태에 대한 관심을 물체(object)에서 과정(process)로 이동시켰으며, 물성을 개념으로 대체시켜 특유의 역동성, 상호소통, 변용을 통해 시간과 공간조차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하나의 고착된 대상(또는 방식)에 저항하고 예술의 전통적인 관념마저 흩트려놓았고 일부 회화의 세계로 흘러들어간 그것의 한 지류는 매체와 접목된 회화 혹은 매체에 회화성이 반영된 예술을 낳았다. 여기서 잉태된 예술형식은 시각에 맺힌 잔상을 손으로 옮기던 회화 제작과정의 해체를 불러옴은 물론, 탈경계, 탈구축, 탈범주, 탈장르라는 적자마저 출산했다. 그리고 그 한 지점에 작가 이임춘의 작업이 들어서 있다.

 

사실 모든 부분에서 도그마가 실종된 채 잡목림적 군락의 양태를 지닌 21.5세기에 이른 오늘날, 표현에 있어 예술가 각각의 프로세스는 동시대미술의 스펙트럼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새로운 이미지를 시도 및 구현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회화 역시 각종 미디어의 팽창과 개념자체의 왕성한 소용성에 따라 회화란 단지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잇는 가교역할에 무게 중심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자, 심지어 더 이상 회화의 룰에 포괄되지 않아도 무방한-형식적, 미학적 범위의 확대를 비롯해 내용적으로도 훨씬 더 리얼하거나 기교적인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아리랑 162.2 × 130.3 캔버스에 아크릴, 자개 (c)시사타임즈

 

흥미로운 건 작가 이임춘의 작업 역시 그 방위의 한 측면과 근거리에 놓인다는 점이다. 일단 ‘테어링 아트(Tearing Art)’는 전혀 생소한 형식을 담보로 당대 예술작품은 하나의 사물이거나 혹은 어떤 이미지의 완결을 넘어 개인적 시스템으로 구동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예술 소통방식에 대한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해도 무리는 없다.1)

 

그렇다면 ‘테어링 아트’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먼저 형식면에서 볼 때 ‘테어링 아트’는 (Tear-ing)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 ‘찢어지다/ 찢어진’, ‘뜯기다/ 뜯긴’ 작업을 의미한다. 또는 구멍을 뚫어 무언가를 붕괴시키거나 거칠게 찢는 행위자체도 포괄한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그저 ‘찢어지다/ 찢어진’, ‘뜯기다/ 뜯긴’ 작업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엮다/ 엮기다’라는 또 하나의 현재형이 첨가된다. 즉, 전면과 후면에 색을 칠하고 다시 그 위에 그림을 그린 후 캔버스 천을 찢어 엮되, 예민하고 철저한 직감을 통한 이미지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임춘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캔버스 천을 ‘찢는/ 찢어짐’과 ‘엮다/ 엮기다’의 합산과정과 결과 속에서 창출되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으며, 조형성 역시 ‘뜯기다/ 뜯김’ 아래 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

 

 

▲현대적 군상 90.9 × 72.7 캔버스에 아크릴, 자개 (c)시사타임즈

 

나아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그가 기본 재료로 활용하는 패널과 캔버스이다. 이 두 재료는 본래 물질에 물질을 덧씌우는 용도내지는 물질에 3차원의 형상 혹은 물성을 묘사하거나 표현하며 덮는 베이스에 국한되는 것이었으나 이임춘은 물감을 엎지르고 떨어뜨리고 흘리는 방법으로 물감의 유동성, 침투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하나의 입체조형의 일부로 수용하고 있다. 이는 마치 워싱턴파의 모리스 루이스(Morris Louis)나, 컬러필드 페인팅(Color Field Painting)의 케네스 놀란드(Kenneth Noland) 등의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회화성의 일부에 전통공예의 한 단면을 접목시킨 것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은 우리 눈에 보이듯 입체성과 율동성, 리듬감을 심어준다.

 

허면 테어링 아트에 담긴 내용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이임춘은 대략 세 가지 관점을 내보인다. 우선 그의 작품들은 ‘파괴의 창조’라는 극한의 대비를 보여준다. 즉, 캔버스를 ‘찢는’ 행위는 본래의 물성을 인위적으로 이탈시켜 전혀 다른 모습으로의 전이(파괴)라고 할 수 있으며, 창조란 이 파괴로부터 전이된 그 자체이자 전혀 다른 새로운 예술을 뜻한다. 따라서 그의 파괴의 창조란 파괴를 전제로 창조되는 것을 말하며, 창조는 파괴를 자양분으로 새롭게 변모한다.

 

▲만다라 90.9 × 72.7 캔버스에 아크릴, 자개 (c)시사타임즈

 

또 하나는 이임춘의 테어링 아트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을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는 패널 위에 한국의 전통종이를 세 장 바르고, 캔버스 뒷면에 색을 칠하거나 종이를 붙인 후 자유롭게 페인팅을 한다. 여기서 바탕이 되는 건 ‘과거’이며, 캔버스를 뒤집었을 때 드러나는 부분은 ‘현재’이다. 그리고 이미지가 온전히 구현된 캔버스 앞면은 ‘미래’이다. 이임춘은 이 세 시공의 층위를 테어링 아트라는 명명 하에 묶어 내보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찰해야할 것은 과거-현재-미래를 넘나들며 파괴와 창조-창조와 파괴를 오갈 수 있도록 한 동기이자 예술자극의 매개가 된 건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이는 곧 삶에 관한 질문과 진배없다.

 

▲하얀 장미 90.9 × 72.7 캔버스에 아크릴, 자개 (c)시사타임즈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경찰직과 예술인이라는 두 개의 ‘틈/사이/틈새’에서 생활한다. 정해진 법과 규칙에 의한 삶이 있는 반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인으로써의 삶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테어링 아트의 발화는 그 두 개의 삶이 조우하는 지점에서 비롯된다. 경찰직을 수행하면서 보고 느낀 사회적 문제와 인간의 범죄 심리를 예술로 재창조 하거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며 경험한 무의식의 세계를 예술로 녹여내기도 한다. 결국 이 둘은 이성영역과 감성영역의 문제요, 그 경계에서 자신만의 거푸집을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테어링 아트는 결국 삶의 전반을 아우르는 언어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예술적 가치에 도전하려는 작가의 오랜 변화적 태도에 기인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15년 전과는 달리 이젠 이임춘하면 테어링 아트를 떠올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작업은 <블랙홀(Black Hole)> 연작이다.(대작이 꽤 많기도 한 작품 연작이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운영하는 한 사이트에 <블랙홀> 작품에 대해 이런 글을 남긴 적 있다. “블랙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와 조직도 하나의 거대한 블랙홀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들고 만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들어 가면서도 또 다른 블랙홀을 형성한다. 사회와 조직 속에서 지위, 권력, 부, 명예, 재산을 빨아 당기고 그것을 누리고 싶어 한다.” 이 발언에 의하면 현대사회가 지닌 다양한 부조리와 병폐, 정의로운 것과 부정한 것들, 멀고 먼 이상 대비 부유하는 숱한 욕망의 변주들, 그 간극에서 피어나는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모든 것을 수축-팽창하며 흡수하는 것이 바로 <블랙홀>이다. 욕망을 탐하면서도 결핍과 부재를 느끼고, 한 없이 채워지길 바라지만 그 결핍과 부재에 의해 또 다른 욕망을 꿈꾸는 우리 사회와 구성원인 개개인의 인격과 정체성, 자아와 초자아 등을 모두 흡수하는 추상적 천체가 블랙홀인 셈이다.

 

▲하얀 나비의 꿈 72.7 × 60.6 캔버스에 아크릴, 자개 (c)시사타임즈

 

 

<블랙홀>과 더불어 또 하나 눈에 띄는 작업은 <하얀 영혼>, <하얀 태양> 등이다. 여타 작품들이 격정 속 질서를 갖추고 있다면 이들 작품은 그야말로 눈처럼 하얗다는 특징이 있다. 눈동자 없이 검은 홀을 한 가면에 수갑이 채워진 <하얀 영혼>, 위치에 따라 존재와 비존재-찰나와 영속을 모두 훑을 수 있는 <하얀 태양> 등은 <블랙홀>의 강한 에너지와는 달리 정적이고 깊은 내면에 천착토록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이밖에도 그의 많은 작품들(조각, 회화, 설치 등)은 형식에 있어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하고 있지만 고전적 회화기법과 재료를 부정하고 특정한 양식에 종속되기를 거부한다는 공통점도 녹아 있다.

 

일례로 비교적 초기작인 문자그림이나(그의 처녀작에는 유독 문자가 자주 등장한다) 뱀 같은 손이 똬리를 틀고 있는 나무에 한지를 입힌 조각 <고뇌>, 원시성이 돋보이는 흙 그림 <수행-그 득도의 길, 토화>, 인칭명사와 시(詩)를 쓰고 다시 지워낸 소멸기법의 회화 <역사의 뒤안길에 서서>,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듯한 <춤을 추는 여인>, 삶의 시간관(時間觀)을 비롯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균질적이고 직선적인 서양에서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의 성질이 아닌, 불교의 윤회설과 같은 원(圓)순환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만다라–인생은 시간의 흐름에 존재한다>3) , <생명의 뿌리>, <인생> 등도 모두 실험적이면서 과도기를 엿보게 하는 작품들이랄 수 있다. 물론 다소 투박하고 세련미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지만, 또한 역대 예술가들의 흔적을 간간이 마주할 수 있기도 하지만 형식에 구속되지 않아온 이임춘의 화사(畵史)를 뒷받침하는 작품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중 흙 그림 <수행-그 득도의 길, 토화>는 가장 근본적인 재료로 작가의 원초적인 심상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1990년대 이후 토속미 가득한 흙 그림으로 명성을 떨친 신명범 작가나, 지금은 작고한 최영림이 1980년대부터 토화(土畵)로 설화의 세계를 보여주려 했듯, 이임춘 또한 동일한 재료에 아크릴을 섞어 기존 표현방식의 전환을 꾀하고, 내용적으론 존재에 대해 스스로 갈무리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작업의 경우 현재로 이어지는 작업의 중간기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부단히 새로움을 찾으려는 몸부림의 한 증거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이임춘이 테어링 아트를 창안하게 된 동기는 자연스럽다. 150여 년간 할아버지와 부모님 대를 이어오면서 대나무공예와 한지공예를 했기에 유전적인 재능이 우선했다.4) 소실 적부터 지근거리에서 흡사 도제식처럼 부모님을 일을 도왔기에 동양과 서양, 공예를 접목시키는 작업이 가능했고, 곱고 조밀하며 섬세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특히 대나무를 다루는 데 능숙했던 공예가인 부친의 영향으로 인해 전통적인 방식의 수용도 가능했다.

 

이에 그는 한때 집안 전통을 이어받아 무형문화재를 염두에 두기도 했으나 동시대미술의 다양성에 매료되면서 지금의 작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아니, 어쩌면 충분히 예상한) 이임춘이 선택한 길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작업 초기엔 미술전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벽에 수없이 부딪혀야 했고, 학연, 지연 등의 인맥이 중요한 미술 판에서 경찰이라는 직업은 되레 인식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 그의 존재마저 애써 무시 된 적도 없지 않다. 그러나 틀에 매이지 않았기에 만개할 수 있었던 테어링 아트는 여러 길항 관계 속에서 독자적인 장르를 개척하며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발표된 2003년 이후 세월의 흐름을 타고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관심을 끌면서 자연스럽게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5)

 

<블랙홀>로 대표되는 이임춘의 테어링 아트는 이러한 수직적 범주화와 양식화 및 단선적 형식화에 이견을 제시하며 굴곡의 역사를 뚫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분에 우린 한 예술가의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통해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다시 말해 시간과 시간을 연결시켜주는 여러 차원의 통로를 목도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시공의 층위에서 빚은 파괴의 창조는 이어지고 있다.

 

1) 여기서 말하는 예술소통 방식이란 손으로 다듬는 회화의 전통적 방식 아래, 매체의 다변성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가상과 현실의 세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자신만의 회화론을 추구함을 지정한다.

 

2) 이와 유사한 작업방식은 과거에도 있었다. 일례로 아르헨티나 산타페 로사리오 출신의 이탈리아 작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는 도려낸 실루엣의 그림과 캔버스에 날카로운 칼자국을 넣은 커팅작품을 통해 회화와 조각에 관한 극한으로서의 공간개념을 보여주었고, 온갖 못 쓰는 폐품이나 캔버스, 낡은 스타킹, 실 등 잡다한 재료 아래 휘갈긴 글을 쓰는 식의 드로잉을 통해 현실생활의 단면을 보여준 스페인의 안토니오 타피에스(Antoni Tapies)와 같은 작가들도 앵포르멜 예술의 연장에서 독창적인 언어를 다수 선보였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회화성과 시공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경향이 강하다면 이임춘은 전통과 현대, 서양과 동양, 조각과 회화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형식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거리감이 있다. 특히 공간성에 방점을 두고 있는 폰타나와는 달리 파괴의 창조를 접근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둘 사이엔 다른 결이 존재한다.

 

3) 이 부분, 즉 ‘만다라’는 그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설명할 필요가 있는데, 만다라의 어원은 ‘완전한 세계’ 또는 ‘치유능력을 가진 원’이라는 산스크리트어로써, 원래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일종의 비밀그림이랄 수 있다. 이것은 우주 삼라만상을 뜻하는 기하학적 모양들로 표현되며 내면으로는 인간 마음속 의식의 흐름을 상징한다. 본인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임춘의 그림에서 둥근 원을 중심으로 백(白)·청(靑)·황(黃)·적(赤)·녹(綠)색의 5가지 색(오방색)이 외부로 확장되는 것도 이와 같은 범주에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내용적으로도 그의 작업은 포괄적으로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이라는 5대 존재요소로 구성되고 있으며 궁극적인 내용의 조타 또한 천(天)지(地)인(人)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4) 그의 조부와 부친은 대를 이은 대나무공예가였으며 모친은 한지공예가였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가정환경과 부모에 대한 마음, 가족에 대한 애틋함을 작품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어머니의 여정>, <종이학 가족> 등이 있다.

 

5) 실제로 이임춘의 작업은 국내 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인지도가 높다. 이탈리아, 미국, 터키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미국 샌디에이고 국제공항에 선보이는 가하면 멕시코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는 그(작가)가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부터 따지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는데다, 미술대학 출신이 아니면 비전공자라는 프레임에 가둔 채 여전히 아마추어쯤으로 판단하는 습속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 작가의 작품 수준에 의해 판단하는 흐름이 강해 우리와는 다소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임춘 현대미술가 (c)시사타임즈

 

이임춘 현대미술가 약력

 

1965년 8월 9일생

테어링아트(Tearing Art), 해무리기법을 창안, 현대미술의 새 쟝르를 개척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고

알렉산더 갤러리 전속작가

(2011~2013년)

터키 이스탄불 IAC 갤러리 전속작가

(2011~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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