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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2)]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1

영원한 KOICA man 송인엽 교수 [나가자, 세계로! (52)] 29. 우즈베키스탄(Uzbekistan)-1

 

 

[시사타임즈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사마르칸트 (c)시사타임즈
▲< 국기 > 하늘색은 하늘과 물, 백색은 평화와 조화, 초록은 자연의 생명력, 적색 줄은 생명을 의미하는 인체의 혈관을 상징함. 12개의 별은 우즈벡 문화의 12개별을 상징. < 국장 > 문양은 소비에트연방에서 사용한 문양에서 비롯, 우즈벡의 대표적인 농산물인 목화와 밀,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과 별이 그려져 있음 (c)시사타임즈

 

 

< 국가 개황 >

 

우즈베키스탄은 예로부터 비단길의 중앙에 위치하여 동과 서의 문물을 전하는 요충지로 문화가 발달하였다. 특히 14세기 말에는 티무르 왕이 중앙아시아를 통일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울르베그 재위 시에는 천문, 과학, 문학이 크게 융성하였다. 1991년 9월1일, 소련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 후 우리나라와 관계를 돈독히 하여 대우자동차, 대우방직, 갑을방직, 대우은행, 타쉬켄트 골프장 등이 진출하여 우즈벡 산업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특히 스탈린에 의해 1937년에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이 25만 명이 거주하고 있어 주요 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설치되었거나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The Republic of Uzbekistan is the doubly landlocked country in Central Asia. It was incorporated into the Russia in 19th century, and in 1924 became a constituent republic of the Soviet Union. It became independent on 31 August 1991. Its economy relies mainly on cotton, gold, uranium, and natural gas. Despite the declared objective of transition to a market economy, it continues to maintain rigid economic controls, which act to deter foreign investment.

 

1. 국명(Country) : 우즈베키스탄

(the Republic of Uzbekistan)

2. 수도(Capital) : 타슈켄트(Tashkent)

3. 면적(Territory) : 447,400 square km

4. 인구(Population) : 33,559,100 명

5. 국민소득(GNI) : US$1,970

6. 언어(Language) : 우즈벡어(Uzbek)

7. 독립일(Independence) : 1991.9.1

 

 

비단길의 중심, 우즈베키스탄이여!

 

비단길 한가운데 우뚝 서

동과 서의 문물 다 이어 주었네

문화를 꽃피웠네

 

티무르 말탄 기상

중앙아 호령하네

울르베그 천문대 하늘을 꿰뚫네

 

나보이 맑은 정신

역사에 내몰린 한 많은 고려인

친구로 받아줬네

 

면화 하얀 꽃 세계의 옷 되고

아랄해 죽게 하나?

 

침간산이여

아무다리야 강이여

시르다리야 강이여

 

그대들

아랄해 다시 웃게 하는 날

다시 한 번

동과 서 그 중앙에

우뚝 서리라

 

온 누리 찬란히 비추리라

 

Oh, Uzbekistan, the Very Center of Silk Road

 

You, Uzbekistan,

Standing high at the very center of Silk Roadhas a full insight into astronomy

 

Connecting the civilizations of East and West

Bloomed the beautiful culture flowers

 

King Timur’s valiant spirit on the horse

Holds sway over the whole Central Asia

King Ulugbek at his sky observatory

Navoy’s pure spirit accepted

As true friends and brothers

The afflicted Koreans who were drifted by the hard history

 

The white cotton flowers for world’s clothes

Nearly kill the Aral Sea?

 

Mountain Chimgan,

River Amudarya,

Oh, River Sirdarya

 

The day when you all will liven again

The Aral Sea which id about to gasp

 

Once again

will stand high at the very center of East and West

You, Uzbekistan!

 

You will light all the world, brilliantly…

 

 

1. 고려인의 땅 우즈베키스탄으로

 

(우즈베키스탄 근무 발령을 받고)

 

나는 KOICA 본부에서 힘든 일이 많고 많았던 협력단의 전 개도국 대상 프로젝트를 맡다가 2002년 1월, 우즈베키스탄 근무를 명받았다. 지원하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않은 발령이었다. 내심 필리핀을 원했었다. 민형기 당시 총재도 필리핀 카비테 병원에 관심이 많았고 나를 수시로 불러 묻곤 했었다. 2001년 카비테 병원 준공식에 아로요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고 그 후에도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필리핀 다음으로는 몽골 사무소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1999년도에 김대중 대통령이 방문하였을 때, 시장경제로 전환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몽골을 특별 지원하라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몽골 각 부처의 고위 관리들과 친구가 되었고, 나 또한 인종적으로 한민족과 가장 유사한 몽골인들 에게 일종의 동족애를 느끼며 몽골을 위해 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의외의 우즈베키스탄 사무소 발령을 받고 나는 기분이 우울했다. 집에도 며칠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음을 다 잡았다. 항상 원하는 보직을 맡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왕 가는 거 기분 좋게 즐거운 마음으로 가자. 거기에는 우리 핏줄인 고려인이 25만 명이나 있다지 않은가? 그곳에서도 분명 내가 신명나게 일할 분야기 있을 것이다. 마음의 결정을 하고 나서 우즈베키스탄으로의 발령 사실을 아내에게 발렸다. 그러나, 나를 말없이 잘 따르던 그녀였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나보고 혼자 가란다. 단신 부임? 그렇다는 거였다. “사유는?”하고 내가 물었다.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로는 무섭다는 이유였다. 왜냐하면 소련에서 독립되었다지만 공산풍이 팽배할 것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춥다는 이유였는데, 소련 영토이기 때문에 시베리아가 연상되기 때문이란다. 무섭고 추운 곳이면 나보고도 가지 말라고 해야지, 기쁜 일도 같이 하고 슬픈 일도 같이 하기로 목사님 앞에서 서약하지 않았던가? 자기는 안가고 나만 가라고? 하기야 나는 남자이니 어렵고 힘든 곳은 나만 가야겠지…….

 

그런데 지금까지 해외근무를 나만 간 적이 없었다. 항상 같은 비행기로 출국하고 같은 날짜에 귀국했는데……. 이번에 혼자 간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자랑이 아니라 지금까지 나는 집에서 라면 하나 끓여 먹은 적이 없고 양말 하나 빨아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협력단에서 열악한 개도국이지만 해외근무를 선호하는 이유는 국내의 생활비에 밑도는 박한 월급 때문인데, 단신근무로 서울과 근무지에서 두 집 살림을 하면 해외수당을 받아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지 아니한가? 아내의 서울 잔류 선언으로 나는 다시 착잡해졌다.

 

며칠 후 주한 우즈베키스탄 비탈리 펜 대사로부터 우즈베키스탄 부임을 축하한다면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만났을 때, 펜 대사는 우즈베키스탄에 우리의 고려인 25만 명이 살고 있으니 사명감을 갖고 일해 줄 것과 그곳 근무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부인이 좋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내는 좋아하기는커녕 그 곳이 무섭고 추워서 못 가겠다고 하여 나만 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매우 의아해하며, 부인이 우즈베키스탄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니, 자기가 직접 설득할 터이니 내일 다시 아내와 함께 오라고 했다.

 

나는 다음날 아내, 영숙 누나와 함께 우즈베키스탄 대사관에 갔다. 기다리고 있던 펜 대사는 우즈베키스탄이 한국보다 더 자유롭고 사계절 내내 항상 한국보다 더 따뜻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과일이 풍부하고 고려인 아줌마들이 일도 잘해주고, 구 소비에트의 영향으로 오페라가 좋고 음악수준이 높다고……. 아내는 피아노 전공 출신이어서인지 대사의 설명을 듣고 쉽게 우즈베키스탄 동행을 결정하였다.

 

펜 대사는 고려인 2세로, 한국 성은 편 씨이다. 1996년 대사관 창설 이래 줄곧 대사직을 수행하고 있으며 2002년에 내가 처음 우즈베키스탄 대사관을 방문했을 때 주한외교사절단장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10년이 흐른 뒤인 2012년 3월, 한국국제교류재단 (KF)에 다니는 딸 아영이와 함께 다시 한 번 주한 우즈베 키스탄 대사관을 찾으니 아직도 펜 대사는 주한 외교사절단 단장을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 외교사절단장은 어느 나라에서나 통상 가장 먼저 부임한 특명전권대사가 맡게 되었으니 펜 대사가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외교사절단장은 각국의 대사관을 대표하여 주재국의 외교장관과 대통령과 대화하는 막중한 자리이다. 펜 대사는 가장 오래 전에 부임한 대사로서 한국 실정에도 밝지만 타고난 부지런함과 친절로 그 직을 잘 수행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00KG이 넘는 거구로 인해 관절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Vitaly Fen 대사와 KF의 송아영, 2012.2 (c)시사타임즈

나와의 면담 후에 새로 부임한 김성 미국대사가 11시에 방문한다기에 나는 반가운 만남을 서둘러 마쳤다.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관은 10년 전에 있었던 그대로 양재동 외교센터 7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펜 대사는 한 나라에 가장 오래 근무한 특명전권대사 기록을 연일 갱신하고 있는 셈이라면서 나의 할아버지 나라에서 이런 행운을 누리니 얼마나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하면서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그런데 펜대사는 21년 동안 한국대사를 근속하고, 2016년 후임에게 물려주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는 2018년에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2018년도에 다시 한국대사로 부임하여 지금도 근무 중이다. 아마 한국의 발전상을 우즈베키스탄에 재현하겠다는 미르지요예프 신임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한국의 인맥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에 그를 다시 한국대사로 기용했을 것이다. 그는 고령에 과체중과 고혈압으로 고생하지만 타고난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가까스로 건강을 유지하며 한-우 우호관계 증진에 노력하고 있다.

 

나는 뜻하지 않게 펜대사의 도움으로 아내와 딸 아영이를 동반하고 타쉬켄트 행 아시아나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올림픽 아파트 우리 옆 동에 살고 있던 동생 우엽의 집으로 가기로 했다. 또한 어머니는 교회 친구 권사들에게 내가 ‘우주 백두산’이라는 나라에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다. 아무리 우즈베키스탄이라고 말씀 드려도 ‘우주 백두산’이란다. 막 대학교에 입학했던 아들 규영이는 우면산 기슭에 있는 외교협회 외교관 자녀 기숙사로 입사시켰다.

 

우리 아영이는 우즈베키스탄에 이렇게 살게 된 것을 기회로 그곳 국제학교와 창덕여고를 거쳐 후에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노어과를 졸업하여 한국국제교류재단에 취업하게 되니, 운명의 실타래는 알 수 없는 묘한 것이다. 펜 대사의 설득으로 우즈베키스탄에 가게 된 아영이의 직장이 우즈베키스탄 대사관 바로 아래층에 있었기 때문에 펜 대사가 가끔 아영이를 불러 귀여워하며 격려해 주었다.

 

(당시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관계)

 

1990년 8월31일, 소련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우즈베키스탄 카리모프 대통령은 자국에 거주하는 25만 명 고려인의 근면함과 88 서울 올림픽 후 한국의 발전상에 주목하고 한국과의 관계 발전 증진에 주력하였다.

 

그는 1993년에 서울을 첫 방문하여 맘씨 좋은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섬유산업 투자를 약속 받고 돌아갔다. 이 방문 성과로 갑을방직(주)과 대우방직(주)이 2,500명을 고용할 수 있는 방직공장을 우즈벡에 4곳이나 설립했다. 우즈베키스탄은 면화의 나라이다. 경작 면적의 80%가 목화밭이다. 목화는 경작하는 데 특히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목화를 대대적으로 경작하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아랄해로 흐르는 우즈벡 최대의 강인 아무다리야강과 시루다리야 강물을 중도에서 목화밭으로 관개시켜 아랄해로 흐르는 물이 급감했다. 그래서 아랄해 면적이 1/6로 줄어들고 오염이 심각해져 우즈베키스탄은 물론이고 유엔에서도 오염방지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1997년에 서울에 다시 온 카리모프 대통령은 호방한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자동차 공업 분야의 협력을 약속 받았다. 대우 김우중 회장은 바로 타쉬켄트로 날아가서 연 20만대 조립규모의 대우자동차공장을 페르가나주에 설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등 그 어느 나라도 소련연방으로부터 갓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에 투자하지 않았다. 단연 우리나라가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제1투자국이었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미국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최고의 나라로 자리 잡았다. 우리 국민 또한 일등 시민으로 대접 받고 비자 취득이나 비자 연장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또한 초대 대사였던 서건이 대사는 이 나라 유일의 골프장을 지인들의 투자를 유도하여 멋지게 개장하여, 이 나라의 관광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었다. 서울과 타쉬켄트를 직항하는 아시아나 항공기와 우즈벡 항공기는 연일 만원으로 원하는 날에 확보가 쉽지 않았다.

 

1999년 10월에 한국을 찾은 카리모프 대통령의 상대는 깐깐하기로 유명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노련한 김 대통령은 우선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IMF의 지원을 받고 있음을 거론하며 협력의 여지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쳤다. 그러자 카리모프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의 한국의 지원에 감사를 표명하고, 대우 김우중 회장이 꿈꾸고 있는 세계 경영이 계속되어 우즈벡 대우공장이 잘 운영되도록 당시 재판중인 대우사태를 원만히 처리해 달라는 것만 부탁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 문제는 대우가 구조조정을 현명하게 할 것으로 알고 있고 법원이 공평하게 잘 처리하게 될 것이라는 원칙적 답변만 했다고 배석했던 펜대사가 나에게 알려줬다.

 

카리모프 대통령은 김우중 회장 사건 처리에 관한 명확한 답을 한국 측으로부터 듣지 못하고 서울 방문 세 번째 만에 처음으로 성과 없이 우울하게 귀국길에 올랐다 한다. 그 후 한국으로부터는 더 이상의 투자가 없었고 2001년 9월 11일에 있었던 테러 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응징하기 위해 지정학적으로 우즈베키스탄의 협조가 필요했던 미국은 우즈베키스탄에 원조와 경제 협력을 강화 했다. 미국이 관심을 보이니 일본, 캐나다, 영국, 호주도 뒤를 따랐다. 내가 부임하던 2002년 3월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일등 시민의 대접을 받았던 한국인의 위상이, 국력에 맞는 수준으로 이동했던 후였다.

 

(29번째 나라 우즈베키스탄 이야기 계속)

 

글 : 송인엽 한국국제협력단(KOICA) 전 소장

 

한국국제협력단(KOICA) 8개국 소장 역임 (영원한 KOICAman)

한국교원대학교, 청주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강명구평화마라톤시민연대 공동대표

한국국제봉사기구 친선대사 겸 자문위원

다문화TV 자문위원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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