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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153)]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

[책을 읽읍시다 (153)]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

안톤 체호프 저 | 이항재 역 | 에디터 | 320쪽 | 13,5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안톤 체호프의 작품 세계에서 하나의 흐름을 담당하는 에로티시즘 단편들을 모았다. 작품 안에는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놓인 사람들과 아이들, 여자들의 삶으로 가득하다. 웃음과 눈물, 유머와 감동, 행복과 불행 등 다양한 감정을 통해 보통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욕망, 유머 그리고 슬픔 어린 우수가 빚어내는 체호프의 에로티시즘 미학

 

체호프는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마치 수채화처럼 담백하게 그려 낸 삶의 예술가다. 체호프의 단편에는 사회적 약자인 ‘작은 사람들’의 웃음과 유머, 우수와 눈물, 탄식과 절망, 행복과 불행 등으로 짜인 온갖 문양의 조각보가 체호프의 예술 세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자들의 사랑, 행복과 불행, 육체적 욕망과 정신적 결핍으로 인한 일탈과 부정(不貞)을 다룬 수십 편의 에로티시즘 단편들은 체호프의 예술 세계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체호프는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결코 강요하는 법이 없다. 복잡다단한 인간 심리를 분석하거나 해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고 들려줄 뿐이다. 그래서 눈 밝은 독자만이 체호프의 이야기 속에서 삶의 진실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여자들의 행복과 불행, 일탈과 부정(不貞)을 다룬 체호프의 이야기도 그렇다. 이른바 ‘체호프의 여자들’을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재단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권태와 욕망, 우수와 눈물에 공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사랑에 대하여〉와〈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외에 이번 선집에 실린 단편들은 처음으로 번역·소개되는 것들이다. 발표 연도순으로 실린 작품들을 읽다 보면 여자들에 대한 체호프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자연스럽게 느낄 수도 있다.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에 수록된 16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독자들은 새로운 체호프를 만나고 남녀의 사랑과 욕망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체호프의 여자들

 

‘체호프의 여자들’은 이상적이고 순결하며 고결한 품성을 지닌 ‘투르게네프의 처녀들’이나 이기적이고 열정적이며 탐욕적인 ‘도스토옙스키의 여자들’과는 달리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들이다. 따분한 일상에서 종종 일탈을 꿈꾸며, 때론 남편을 배신하기도 한다. 그들은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피와 살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일 뿐이다.

 

체호프의 여자들│몸을 파는 여자들

 

체호프가 여자를 이성으로 의식하고 연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열세 살 때이다. 이때부터 체호프는 많은 여자들과 만나면서 교제를 하게 된다.〈나의 아내들〉에서 라울이 살해한 일곱 명의 아내는 체호프가 만났던 일곱 유형의 여자들(성실하고 가정적인 여자, 매력적이고 성실한 여자, 공상적인 여자, 이상적인 여자, 지적인 여자, 경박한 여자, 소시민적인 여자)인지도 모른다.

 

1880년부터 1883년까지 사창가인 소볼로프 마을 부근에서 살았던 체호프는 매춘하는 여성들에게 상당한 관심이 있었고, 한때 이 방면의 전문가로 자처하기도 했다.

 

사랑이 없는 섹스나 몸을 사고파는 여자들에 대한 체호프의 시선은 대체로 냉정하고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런 행위를 도덕적, 윤리적으로 엄격히 재단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과 흥미를 끄는 것은 매춘 그 자체보다 전편에 흐르는 에로틱한 분위기와 유머러스한 상황이다.

 

체호프의 여자들│욕망하는 여자들

 

여자들의 권태와 욕망은 체호프의 중기 단편의 주요한 테마이다. 그들의 욕망은 이따금 충족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실현되기보다는 그 자체로 끝나고, 삶은 칙칙한 현실 속에서 계속된다.

 

교회지기의 아내인 라이사는 눈보라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온 젊은 우편배달부를 은근히 유혹하고 그와의 아련한 정사를 꿈꾼다(〈마녀〉). 우편배달부도 라이사의 유혹이 싫지 않다. 램프를 끈 뒤 여자의 몸을 끌어안고 키스를 하려는 순간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일탈은 여기까지다. 라이사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고 다시 참기 어려운 따분한 일상이 시작된다.

 

남편의 감시와 위협, 자신을 기다리는 채찍의 공포와 두려움, 불륜에 대한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체호프의 여자들은 끊임없이 욕망하며 일탈과 자유를 꿈꾼다. 체호프는 욕망하는 여자들의 행태를 냉정하게 보여줄 뿐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지 않는다. 그들의 일탈을 윤리적으로 비판하거나 도덕적으로 설교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욕망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육체적 욕망뿐만 아니라 정신적 불만도 느껴진다. 또한 습관적이고 거짓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꿈과 자유도 느껴진다. 그들의 꿈과 욕망은 아련하고 우수에 차 있다. 그들에게 욕망과 우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체호프의 여자들│버림받은 여자들

 

체호프의 중기 단편에 나오는 여자들은 때론 욕망하고 때론 일탈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또 다른 여자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남자들에게 버림을 받은 약자들이다. 그들에게 행복과 자유는 사치일 뿐이다.

 

펠라게야는 결혼한 지 12년이 되었지만 남편에게 버림받고 노동하면서 혼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사냥꾼인 남편은 사냥에 미치고 다른 여자와 놀아나면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간다. 숲속에서 우연히 남편을 만난 펠라게야는 한 번이라도 잠시 자기에게 들러 달라고 애원한다(〈사냥꾼〉). 여자에게 남자는, 아내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일까? 펠라게야와 남편의 숲 속 대화는 왠지 애잔하다.

 

남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버림받은 불행한 여자들은 자신의 삶을 숙명이라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살아간다. 이들에 대한 체호프의 시선은 안쓰럽고 따스하다. 그러나 남편의 여자를 은근히 질투하는 펠라게야, 한밤에 신부의 아들과 몰래 놀아나는 젊은 바르바라, 남편을 독살한 마리야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시아버지를 살해하자고 농담처럼 속삭이는 소피야와 바르바라의 모습은 버림받은 여자들의 억눌린 질투와 욕망의 세계를 보여 준다. 여기에도 욕망과 우수가 자아내는 묘한 에로티시즘이 있다.

 

체호프의 여자들│부정(不貞)한 여자들

 

체호프가 즐겨 다루는 유부녀의 일탈과 부정(不貞)의 테마는〈사랑에 대하여〉와〈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으로 이어진다. 이 단편들 속의 이야기는 체호프와 리디야 아빌로바와의 만남과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시골 지주인 알료힌은 순회재판소 의장의 집에 드나들다가 그의 아내인 안나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알료힌은 안나의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죄의식과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안나는 가족에 대한 의무와 죄의식 때문에 서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의무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다 우울증에 걸린 안나는 요양을 가게 된다. 배웅하러 나온 알료힌은 안나가 탄 기차에 뛰어올라 그녀의 어깨와 손에 입맞춤을 하고 마침내 사랑을 고백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한 것들이 모두 하찮고 거짓된 것임을 깨닫는다.

 

안나의 일탈과 부정(不貞)은 육체적 욕망이 아닌 남편과의 상호 이해와 정서적 교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이 무얼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모르고, 남편을 그저 일만 하는 하인이라고 생각한다. 구로프와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녀는 비로소 상호 이해와 참사랑의 행복을 느끼게 된다. 보통 불륜이라 불리는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이, 부정이라는 이름의 진실이 거짓과 타성에 젖어 형식적으로 살아가던 인생을 변화시킨 것이다. 체호프는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여자들의 일탈과 불륜이 기존의 도덕과 윤리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소개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안톤 체호프는 『갈매기』나 『벚꽃 동산』등의 작품을 쓴 극작가로 유명하지만 소설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살펴 본다면 현대 단편 소설의 형식을 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평범한 일상속의 면면들을 간결하면서도 명료한 표현으로 묘사하는 능력과 날카롭고 엄정하게 인간을 그리면서도 그 내면에는 인간에대한 연민의 감정을 지니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1860년 러시아 남부 아조프 해의 항구 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농노 출신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료품 잡화점이 파산하면서 가족들 모두 모스크바의 빈민가로 이주하였고, 이후 그는 홀로 타간로크에 남아 고학하며 중등학교를 졸업했다.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뒤 의사가 되기까지 생계를 위해 필명으로 유머 단편들을 썼으며, 1886년에 처음으로 「추도회」라는 작품을 본명으로 발표하였다. 2년 뒤 단편집 『황혼』이 푸쉬킨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인정을 받기 시작한 그는 「귀여운 여인」으로 톨스토이의 절찬을 받았고, 차이코프스키, 고르키 등과 교유하며 러시아 문학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초기의 해학적인 작품세계에서 후기 현실비판적 작품세계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속물성과 허위를 배격하고 진실한 인간성을 반추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문학적 특징은 인물의 성격과 심리의 정밀한 묘사, 감각적 문체에 있으며, 때로 핵심을 우회하는 표현들은 현재까지도 비평가들에게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단편 「대초원」,「나비」,「이웃사람들」,「익명의 소설」,「흑의의 수도승」,「살인자」,「아리아드네」,「농부들」등이 있으며, 희곡 『이바노프』, 『바냐 아저씨』, 『곰』, 『청혼』, 『결혼』, 『기념일』, 『갈매기』,『세 자매』,『벚꽃 동산』등이 있다.

 

후기 체호프의 관심은 단편소설보다는 희곡으로 기울어 「갈매기」,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과 같은 세계 희곡사의 걸작들을 써냈다. 체호프는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로 이어지는 ‘러시아 장편소설의 황금시대’의 사실주의적 문학 전통을 계승하여 단편소설의 새 시대를 열었고, 모파상과 함께 현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중요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1904년, 병세가 악화되어 아내와 함께 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요양을 떠났으나 7월 2일 호텔에서 장결핵으로 생을 마쳤다. 유해는 모스크바의 노보제비치 수도원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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