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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201)]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



니체 자서전

저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출판사
까만양 | 2013-03-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나는 나에게 부적합한 시대에 태어났다!나의 여동생과 나 『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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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읍시다 (201)]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

니체 저 | 김성균 역 | 까만양 | 440쪽 | 20,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는 니체의 저작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고 솔직한 것이자 가장 문제적인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작품이다. 또한 이 책은 비극적 운명을 겪은 만큼 진위를 의심할 수 없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오롯이 담고 있다. 니체의 다른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극성과 심대함이 오롯이 녹아 있는 작품으로 니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우여곡절을 겪은 니체의 두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와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

 

1888년 가을부터 뭔가에 쫓기듯이 그러나 일진광풍처럼 집필에 몰두한 니체는 해가 바뀔 즈음 무려 다섯 권이나 되는 저작들, 『니체 대 바그너』, 『우상들의 황혼』, 『반그리스도』,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찬가』를 탈고했다. 그 저작들 중 니체가 만44세 생일인 1888년 10월15일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13일 완성한 『이 사람을 보라』는 그의 첫 번째 자서전이었다.

 

그러나 이 첫 자서전은 니체가 살아있는 동안 출판되지 못했다. 왜냐면 처음에는 니체가 집필한 원고들의 타이핑과 교정을 주관하던 친구와 출판업자가, 이어서 니체의 모친과 외삼촌이, 그리고 나중에는 여동생이 개입하여 출판을 보류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차일피일 출판이 미뤄지던 『이 사람을 보라』의 원고는 집필된 지 무려 20년이 흐른 1908년에야―더구나 니체의 광기가 여실히 드러나거나 모친과 여동생과 제부 푀르스터가 부정적으로 언급된 문장들과 단락들은 모두 삭제된 상태로―비로소 처음 출판되는 비운을 겪었다.

 

188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혼절한 후 예나의 정신병원에 감금되다시피 입원(1889년 1월17일~1890년 3월24일)해있던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의 출판이 보류됐다는 사실을 알고 낙담했다. 그리하여 니체는 자신을 ‘실제로 곁에서’ 감시하던 모친과 여동생 의 시선을 피해 비밀리에 두 번째 자서전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를 집필했다. 이번에는 각별히 조심해 그 원고를 비밀리에 병원에서 ‘반출’해 출판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자서전도 첫 번째 자서전만큼이나―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지난하고 착잡하며 기구한 우여곡절들을 겪었다. 특히 그 과정에서 니체가 독일어로 집필한 이른바 ‘육필’ 원고가 행방불명되는 안타까운 사태마저 겪었다. 1951년에야 비로소 미국의 시인 겸 출판편집자 새뮤얼 로스가 보어스 헤드 북스라는 출판사를 통해 ‘그나마도’ 영어판으로만 겨우 출판함으로써 가까스로 빛을 볼 수 있었다.

 

 

근친연애와 여성편력에 관한 내용, 위작이냐 정식저작이냐?

 

니체가 집필한 지 무려 62년 동안 독일, 캐나다, 영국, 미국을 떠돌며 대서양을 세 번이나 건너는 기나긴 여행 끝에 마침내 빛을 본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를 기다린 것은 또 다른 기구한 운명이었다.

 

이 책은 출판되자 환영과 찬사도 받았지만 더 많은 의혹과 비난에 휩싸였다. 더구나 이 책에 수록된 니체의 놀라운 고백들―니체와 여동생의 근친연애 내지 근친성애, 소문만 무성했던 니체와 코지마 바그너 또는 루 살로메의 내밀한 관계, 니체가 매독에 걸린 사연, 니체의 내밀한 성욕과 성적 환상들과 체험들―은 니체학자들과 니체숭배자들의 의혹과 비난을 더욱 부추겼다.

 

그렇듯 이 책을 의심하고 비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대표적인 니체학자는 독일에서 태어나서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한 철학자 월터 카우프만이었다. 그는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를 아예 ‘위작’으로 규정해버렸다. 그 결과 이 책의 의미는 왜곡되고 진가는 축소되면서 지금까지 니체의 정식저작으로 ‘공인’되지 못하는 비운을 겪어왔다.

 

그런데 카우프만이 이 책을 ‘위작’으로 규정한 이유들은 그가 니체학자로서 얻은 명성을 감안하면 허술하다 못해 차라리 궁색하다고 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가 이 책을 ‘위작’으로 규정하면서 열거한 이유들은 대체로 니체가 독일어로 직접 쓴 ‘육필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출판업자 새뮤얼 로스의 착잡한 이력이 의심스럽다는 것, 오스카 레비의 니체에 대한 식견과 번역능력 및 번역과정이 의심스럽다는 것, 니체가 고백하는 사연들이 실제로 발생한 일들과 시간적·공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대목들이 발견된다는 것, 그리고 ― 아마도 그에게 가장 심한 곤혹감과 반감을 안겨주었을 ― 니체의 근친연애와 여성편력에 관한 내용들이 의심스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년간 이 책을 연구한 미국의 독일어문헌학자 겸 언어학자 월터 스튜어트는 이 책은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니체만이 쓸 수 있는 니체의 자서전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는다. 스튜어트는 『니체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 비판적 연구』라는 연구서에서 카우프만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면서 카우프만의 주장을 불성실한 편견과 오해의 소산들로 평가한다.

 

카우프만이 위작이라고 주장을 하는 까닭은 아마도 카우프만이 펴낸 니체의 전기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들이 『니체 자서전-나의 여동생과 나』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실들 중 어떤 것들은 카우프만을 위시해 니체를 존경하거나 숭배하는 니체학자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에로틱하다―즉 선정적이고 외설적이다―는 데 있을 것이다.

 

심각한 편견과 반감에 사로잡힌 카우프만과 그의 지지자들이 이 책을 정확히 비판할 수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소치로 보인다. 물론 그들이 품은 그런 뿌리 깊은 편견과 반감을 차치하더라도 그들이 이 책을 위작으로 치부하는 이유들 역시 즉흥적이고 불성실한 태도의 소산들이기는 마찬가지다. 예컨대 그들이 가장 빈번하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반대이유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니체가 ‘독일어’로 직접 쓴 ‘육필원고’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스튜어트는 그것이 니체의 자서전을 위작으로 규정할 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저자의 ‘육필원고’가 없다는 사실만 따진다면 위작으로 규정돼야 할 저서들은 실제로 수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저 호메로스의 서사시들부터 헤라클레이토스와 탈레스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은 물론 기독교경전들과 불교경전들도 저자의 육필원고가 없으므로 모조리 위작이라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진짜 니체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드는 풍부한 내용들

 

이 자서전에 녹아있는 니체 정신의 비극성과 심대함은 니체의 다른 저작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들에 비해 하등 뒤지지 않으며 어떤 대목들에서는 더욱 비극적이고 더욱 극렬한 성격마저 드러낸다. 또 그만큼 더 니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들도 풍부하다. 예컨대, 청소년 니체를 사로잡았던 ‘백작부인’의 환상은 그가 슐포르타의 엄격하고 금욕적인 규율을 그만큼 힘겹게 감내했다. 그것이 ‘금욕주의’에 대한 그의 극심한 비판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 자서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니체 특유의 여성관을 형성시킨 사건들과 배경들도 이 자서전의 곳곳에서 역력하게 확인된다.

 

비록 니체가 ‘직접 쓴 육필원고’가 행방불명됐다는 안타까운 사실 때문에 그동안 ‘진짜’ 니체의 자서전으로 정식공인을 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비극적 운명을 겪어왔다. 하지만 이 자서전은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들만으로도 니체를 애호하거나 니체에게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일독해볼 만한 충분하고 또 넘치는 가치들을 지닌 진귀한 보물이라고 할 만하다.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소개

 

독일의 사상가이자 철학자이자 시인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20세기를 연 문제적인 철학자이다. 1844년 독일 레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니체의 조상은 폴란드 계라고 알려져 있다. 5세 때 목사인 아버지를 사별하고 어머니와 누이동생과 함께 할머니의 집에서 자랐다. 14세에 슐포르타 기숙학교에서 엄격한 고전 교육을 받고 1864년 본 대학에 진학하여 신학과 고전 문헌학을 공부했다. 1865년 스승인 리츨을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바그너를 알게 되어 그의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 두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25세의 젊은 나이로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함으로써 철학적 사유에 입문했다.

 

28세 때 최초의 저작『비극의 탄생』을 펴냈으며 이 저작에서 니체는 아폴론적인 가치와 디오니소스적인 가치의 구분을 통해 유럽 문명 전반을 꿰뚫는 통찰을 제시한다. 1873년부터 1876년까지는 독일과 독일민족, 유럽 문화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하며,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새로운 인간형으로 제시한 『반시대적 고찰』을 집필했다.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재직중이던 바젤 대학을 퇴직하고, 이후 주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요양지에 머물며 저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1888년 말부터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 니체는 이후 병마에 시달리다 1900년 8월25일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의 정신병을 두고 원인이 분분하지만 젊었을 적 얻었던 매독이 발전되어 정신분열로 이어졌다는 설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까지도 그의 유고들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 유고들은 니체연구 학자들에 의해 현재 독일에서 니체전집으로 출간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예정이다.

 

저서로는『니체 최후의 고백』『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인간적인 것,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선악의 피안』『도덕의 계보』『이 사람을 보라』『권력에의 의지』등이 있다.

 

니체의 작품 세계에서 대표작인『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위치는 각별하다. 이 작품은 그의 집필 활동의 정점에 씌여진 것이다. 그의 활동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잠언 형식의 아포리즘이 니체 저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은 아포리즘의 절정이다. 반대로 영미철학이 자주 구사하는 식의 논지 전개를 니체도 시도한 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저서가 『도덕의 계보』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한 마디로 요약하기가 불가능하다. 특히 니체 이후, 니체 계승자라고 자처한 학자들이 제각각의 니체를 창조함으로써 니체 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하이데거는 니체를 적극적 니힐리스트로 규정하였고, 푸코는 권력-지식 담론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으로 받아들인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니체는 고정된 가치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기독교적 덕목을 혐오하였다. 니체 사후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니체에 대한 숭배는 끊이지 않는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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