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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캠페인:책을 읽읍시다]

[책을 읽읍시다 (566)] 세렐렘

[책을 읽읍시다 (566)] 세렐렘

나더쉬 피테르 저 | 김보국 역 | arte(아르테) | 192쪽 | 13,000원


[시사타임즈 = 박속심 기자]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나더쉬 피테르의 소설 『세렐렘』이 마침내 번역돼 국내 출간됐다. 피테르 나더쉬는 로베르트 무질과 마르셀 프루스트에 종종 비견되며 이 시대의 토마스 만이라 불리기도 한다. 수전 손택은 그를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라고 격찬했다. 나더쉬 피테르의 작품들은 한때 헝가리에서는 검열로 빛을 보지 못했으나 그 천재적인 문학성을 인정받아 현재에는 전 세계에서 번역되고 있다.


이번에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나더쉬 피테르의 소설 『세렐렘』은 감각과 사유의 최대치를 맛보게 하는 환각의 세계로 독자를 몰입시킨다. 기존 소설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과 두려움, 존재와 시간에 대한 고뇌를 시적으로 풀어낸 놀라운 작품이다.


나더쉬 피테르의 『세렐렘』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작품이다. 소설의 전통적인 형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이 작품은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는 주인공의 의식을 따라가는 단일 구조의 파격적인 소설이다. 그런데 그 단순한 구조가 품고 있는 감각의 갈래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환각 상태 속에서 주인공 ‘나’는 온전한 정신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시에 환각으로 인해 엉켜가는 생각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곱씹는다.


헤어지자는 말을 전하기 위해 연인의 아파트를 찾은 남자.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본 남자는 절대 그녀에게 이 말을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가 건넨 마리화나를 피우며 남자는 존재와 무, 삶과 상상, 생과 사의 경계에 접근한다. 깊은 수렁 속에서도 의식의 끈을 붙잡으려 애쓰던 남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얼마나 치명적으로 허약한가’하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방 안과 발코니에 이르는 한정된 실제 공간 속에서 때로는 마리화나에 취해 나른하게 가라앉은 듯, 때로는 차원을 넘어 이동하는 듯 비정형의 의식 공간을 넘나드는 이 소설은, 사랑과 존재, 시간, 죽음에 이르는 사유를 마치 추상적인 점묘화처럼 펼쳐 보인다.


이 소설에서 줄거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작가가 이끄는 대로 의식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감으로써 소설을 읽는 희열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더쉬 피테르는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흐르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하지 않는다. 때때로 불협화음 같은 분절과 반복이 되풀이되는데 그러한 불친절한 안내는 주인공이 느끼는 환각의 감각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애달프다. 몸과 몸,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 사이의 간격을 메우고 싶은, 이해하고 싶은 몸짓이기 때문이다. ‘나’는 연인 에바와 아주 조금의 간격도 없이 밀착되고 싶어 하는 동시에 그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고, 실제의 시간과 인지하는 시간을 혼동하며,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공간과 바라보는 공간, 상상하는 공간을 혼동한다.


나더쉬 피테르는 이렇듯 몽환적인 의식 상태를 시각적이고 의도적인 행갈이와 단어 배열을 통해서 극대화시킨다. 이 장치는 마치 작가의 머릿속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효과를 준다. 끊기고 이어지는 단어의 배열은 의식의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다. 화자의 환각 상태를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 작가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 셈이다.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상상인지 모호해지는 경계 속에서 실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마치 주인공의 의식 속에 빨려들어간 듯 ‘다음 문장에서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래서 ‘이 소설은 결국 어디에 이를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책장을 넘기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완벽하게 몰입시키는 소설이다.


작가 나더쉬 피테르 소개


나더쉬 피테르는 20세기 헝가리가 낳은 가장 중요한 작가이자 21세기 초반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명이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생애 첫 기억은 도시에 폭탄이 떨어져 그의 집이 불타던 두 살 때의 기억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잔혹한 전투로 일컬어지는 부다페스트 포위전이었다. 열세 살에 노동자였던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열여섯 살에 당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공금횡령 모략의 희생자가 되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양친을 모두 잃은 뒤 어려운 생활을 하던 그는 기자였던 삼촌이 선물해준 카메라에 관심을 가지면서 저널리즘의 세계에 매료되어 19세부터 21세까지 저널리즘과 사진을 공부한다. 기자와 포토 리포터로 활약하다가 소련의 체코 침공을 기점으로 기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1965~1969년에 사회주의 노동자당 기관지 Pest Megyei Hirlap의 편집자로서, 또한 극작가와 사진가로 활동하다가 1969년 프리랜서로 독립한다. 1965년부터 문예지 「새로운 글쓰기 Uj Iras」에 처녀작을 발표한다. 신화와 전설을 주제로 삼은 이들 작품은 훗날 단편집 『미노타우 루스』(1997)에 수록된다. 첫 책 『성서 A biblia』(1967)를 시작으로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고, 1986년에 12년에 걸쳐 쓴 대하소설 『기억의 책』을 발표하면서 뛰어난 걸작이라는 격찬을 받았다(프랑스어본은 1999년 외국문학상 대상 수상). 2005년에 완성한 대하 3부작 『평행 이야기』는 18년에 걸친 필생의 작업으로, 나더쉬 피테르의 문학적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작으로 『사이렌의 노래』(2010)가 있다.


문학뿐 아니라 사진, 문화, 특히 인간 신체와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열정적인 학자라 할 만한 나더쉬 피테르는 유럽의 위대한 지적 전통과 우아함에서 우러나는 복잡한 그림을 그려 보인다. 그는 전통적 이야기를 거부한 로베르트 무질과 마르셀 프루스트에 종종 비견된다. 나더쉬의 열렬한 옹호자인 수전 손택은 그를 ‘우리 시대의 토마스 만’이라 칭했고, 그의 작품을 피나 바우쉬와 토마스 베른하르트에 비유했다. 또한 1997년 『기억의 책』의 영역본이 출간되면서 “가장 중요한 현대소설이자 우리 세기의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나더쉬 피테르의 작품은 헝가리 검열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에서 한동안 빛을 보지 못했으나, 곧 천재적인 문학성을 인정받아 전 세계에 번역되었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수여한 유럽문학상(1991), 도리스 레싱, 밀란 쿤데라,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이 수상한 라이프치히 도서대상(1995), 프란츠 카프카상(2003), 뷔히너 문학상, 산도르 마라이상(2006) 등 유럽 각국의 유수 문학상을 석권했다.


문화와 관련된 헝가리 최고 훈장 코슈트상을 수상했으며(1992), 헝가리 문예원 회원(1993), 베를린 예술원 회원에 선출되었다(2006). 그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지적이고 세밀하며 강렬하고 신선한 자극을 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삶의 나약함과 덧없음을 뛰어나고 정교한 문체로 형상화하였고, 지적 유머 속에, 현실과 상상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문체가 특징이다.


박속심 기자(sisatim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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