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설, 칼럼

[칼럼] (개인)민주주의의 개선을 위해: 집단을 위한 (자기)갱신으로

[칼럼] (개인)민주주의의 개선을 위해: 집단을 위한 (자기)갱신으로

 

 

[시사타임즈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c)시사타임즈

Ⅰ. 3대 개조사업

 

인민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는 3대 개조사업을 하여야 한다.

 

자연을 개조해서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우리가 다른 데서 얻어올 것(힘)은 자연밖에 없기 때문이다. 첫째로도 둘째로도 발전의 원천은 자연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다. 이를 밑천으로 해서 사람을 역시 개조해야 한다. 사람의 육체와 정신을 개조해야 한다.

 

이것이 단순해보여도 이렇게 구분하는 데는 오랫동안 생각해서 고안된 것이다. 자연개조를 위해서 자기가 자기 살을 뜯어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문어는 제 다리를 뜯어 먹는다고 하는데 제 다리만 먹고서야 다리가 다 없어지지. 다리가 좀 여유가 있어 뜯어 먹는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외부에서 얻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 인간은 자연에서밖에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자연의 힘만으로는 인간의 정신을 키울 수는 없다. 인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정신인데.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자연에서 가져온 것을 밑천으로 해서 인간을 개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인간이란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존재이다. 우리가 각각의 개인이 전부인 줄 알지만 개인만으로는 세상에 태어날 수도 없다. 부모가 없이 어떻게 태어나는가? 부모가 키워주지 않으면 어떻게 살 수가 있는가?

 

그러기에 우리 생명의 일차적인 모체는 부모이다. 다 커진 뒤는 부모를 생각 안하지만, 그러면 왜 부모는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가? 이는 인간의 본성이다. 무슨 본성인가? 인간이 개인의 생명이외에 집단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본성이 나온다.

 

부모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집단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집단적 존재에서는 집단이기 때문에 사람과의 결합을 떠나서는 집단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개인의 육체와 정신을 개조해나가는 창조적 활동과 함께 인간관계를 개조하는 사업이 필요하다. 사실 간단히 얘기하면 인간과 세계를 두고 주체와 객체로 둘로 나누어지는 그 이외는 없는데, 인간 자체가 둘로 나누어져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3대 개조사업이다. 

 

① 인간이 자연을 개조하는 것이 하나이고,

② 개별적인 사람들이 육체와 정신을 개조하는 것이 두 번째이고,

③ 인간과의 관계를 개조해나가는 것이 3번째 사업이다. 둘째와 셋째를 합하게 되면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를 다 개조하는 것이 된다.

 

이는 자기를 개조하는 사업보다 더 중요하다. 별도로 생각하면 모호하지만 합쳐서 생각하게 되면 인간개조사업과 사회관계개조사업을 합하게 되면 결정적으로 자연개조사업보다 중요해진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개조사업에서 교육사업, 정신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떼어놓고 보면 인간개조사업이 더 중요하다.

 

Ⅱ. 생물학적 생명력을 객관화하고 사회화하여야

 

①자연개조사업, ②인간개조사업, ③사회관계 개조사업은 무얼 말하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객관화하고 사회화하는 과정이다. 이 점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객관화는 사회화를 하기 위한 과정이다. 객관화하지 않고는 사회적인 것으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전에 동물단계에서도 협조를 했다. 교육하는 것에서부터 본능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원숭이보다 앞섰다. 어릴 때 젖먹이면서 키우면서 가르쳐준다. 그런데 이것을 객관화하지 못했다. 객관화해서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재산으로서 대를 이어 물려주지 못했다.

 

자기의 생명력을 자연에 있는 것을 가져다가 사회적 존재의 한 구성부분으로 만드는 것이 자연개조사업이다. 자연을 개조해서 기계를 만들었다. 기계는 벌써 인간적인 것이다. 인간존재의 한 구성부분이다. 공장에서 누가 제품을 만드는가? 기계가 인간을 대신해서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기계가 인간의 한 부분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한 구성부분이다. 옛날의 육체적 노동을 대신하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은 99% 까지는 기계가 만들고 있다. 사람은 지휘나 하고 버튼이나 누른다.

 

그러므로 자연을 개조해서 인간의 사회적 존재로서 육체를 준비하는 것과 같다. 정신이 발전했지만 정신적으로 쟁취한 것을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이를 객관화하고 책을 쓰지 않으면 누가 알아주는가? 객관화해서 사회적 재산으로 만들기 때문에 사회적 정신이 된다. 계속 대를 이어 이용할 수 있다.

 

객관화하는데 있어서 자연을 개조해서 기계를 수단으로 해서 재산을 만들고, 인간의 정신을 개조해서 이런 문화적 재부를 만들어 객관화하여 사회적인 인간의 생명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원숭이뿐만 아니라 개 종류가 단결을 잘 한다. 제일 협조를 잘 하는 것이 개다. 킬리만자로가 있는 탄자니아의 자연의 공원은 아니지만, 스웨덴에서도 자연공원이 있어서 쇠사슬로 엮은 특수 찦차를 타고야 들어간다. 호랑이, 사자, 타조 등이 있는데 곰은 정말 황소만 하다. 곰한테는 사자도 못 견딘다. 곰은 한번 물면 놓아주지 않는다. 곰에는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다. 우리 곰의 몇 배이다. 그런데 승냥이한테 둘러싸인다. 곰은 이들을 무시한다. 승냥이 떼는 이빨이 들어가지 않으니 물지도 못하고, 벌이 쏘아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벌집채로 꿀을 그대로 먹는다. 그러나 조금 나가면 승냥이는 곰을 둘러싼다. 여기서 우리는 지휘하는 것도 별로 없는데 협조를 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협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제일 우둔한 것은 누우다. 체통도 크고 마리 수는 몇 백 마리가 되는데 단결할 줄 모르니 조그만 포식동물한테도 잡아 먹힌다. 그래도 물소는 좀 낫다. 물소는 만만치 않다. 사자하고도 싸울 수 있다.

 

그래서 협조하는 것이 동물한테는 중요한데, 인간은 이를 객관화했다. 사회관계라는 것으로 객관화해 놓았다. 관계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객관화하는 것이 힘들지만 재판소, 정부, 법률을 만드는 등으로 객관화했다. 이것이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들고, 인간의 생물학적 생명력을 사회적 생명력으로 전환시킨다.

 

Ⅲ. 집단을 위한 (자기)갱신: 연속성(집단주의)과 불연속성(개인주의)의 통일로

 

이런 의미에서 볼 때 3대 개조사업은 인간의 생명을 질적으로 달리 만든다. 이 3대 개조사업하고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문제는 다른 것이다. 이는 자기 갱신의 내부관계이다. 3대 개조사업은 새것을 창조하려는 사업이다. 새것을 창조해서 객관화하고 사회화하는 과정이다. 사회적인 생명력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내부의 새로 무엇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갱신하는 과정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인적 존재(생명)와 집단적 존재(생명)의 균형적인 발전어떻게 보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어느 것도 서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어느 부분에 치중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사람은 개인적으로 각각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귀중히 여긴다. 또 귀중히 여겨야 한다. 개인은 개인적 존재이자 집단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1)

 

그런데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는 개인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아는데, 집단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모른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인식시키기 아주 힘들다. 「인간중심철학의 몇가지 문제」에서2) 백년 이내는 이런 책이 나올 수 없다고 감탄해서 얘기하면서도 집단의 생명력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 개인주의사회에서 살다보니 개인만 생명을 가지고 있지, 집단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부모가 우리를 낳아주었는데 이는 집단이 기초가 된 것이 아닌가? 부모는 개인이 아니다. 결합체로서 자기자식들을 무조건 사랑한다. 부모에 대한 효성은 지금도 필요하다. 부모는 누구의 덕택으로 태어났는가? 집단이다. 개인들이 아무리 죽어도 집단은 죽지 않는다. 왜 죽지 않는가? 집단으로 있을 때만이 생명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의 기초는 부부이고 가족이고, 그러나 부부와 가족만으로만 살 수가 없다. 호랑이가 승냥이한테도 이길 수 없다. 더 큰 집단으로 돼서, 더 나아가서는 정권에 의한 지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가서야 자기운명의 주인이 될 수가 있다.

 

 

Ⅳ. 국가란: 집단으로 정치적 사회적 생명체

 

그러므로 애국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념이 무엇인지 어디서 나왔는지도 잘 모르면서 이념논쟁을 말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념'이란 말 쓰지 말고 '애국심'이란 말을 쓰라고 한다. '개인주의'라 하면 좀 알고 '집단주의'다 하면 소련의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자신도 집단의 한 성원이면서 집단주의는 다 독재로 생각한다.

 

발전민주주의의 이념당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장점을 결합시키고 결국은 민주주의와 애국주의를 결합시킨 것이다. 국가라는 집단은 사회적 집단으로 집단적인 생명체다. 아직 '국가'가 자각할 정도로 발전은 잘 못됐지만, 사실은 정권의 지휘권으로, 지휘체계를 가진 사회적 집단이자 생명체다. '국가란 정치적 사회적 생명체'다.

 

국가를 수령, 독재로 왜곡시킨 것이 잘못이다. 주체사상의 처음의 철학적 정의는 혁명과업건설의 주체는 인민대중이며, 혁명과업을 수행하는 힘도 인민대중에 있다. 자기운명의 주인으로 자기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자기자신에 있다. 이것이 나중에 ‘인민대중’의 말을 ‘노동계급’으로 고치고 나중에는 ‘수령’으로 고쳤다. 이러한 개념을 중앙당 학교, 당조직부에서 만드는 것이다. 여하간 절대로 과오를 범하지 않게 된다. 주겠다는 말인지 달라는 소리인지 빙빙 돌리면서 말하니까, 그래서 얼마나 조리있게 잘 하는지 모른다.

 

Ⅴ. 애국심이: 집단생활의 기준이 되어야

 

개인적 존재(불연속성)와 집단적 존재(연속성) 이것은 새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낡은 것과 새것을 교체해나가는 과정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두가지다.

 

개인적 존재(개인주의)와 집단적 존재(집단주의)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이다. 먼저 발전시켜야 할 것은 개인이다. 다음에 집단의 순서이다. 그러나 중요성으로 볼 때는 다 같이 중요하게 생각한다.

 

도덕에서도 개인에게 충실한 것이 첫째이고, 둘째 도덕은 집단에게 충실한 것이다. 개인이 자기 개인에 충실한 것이 우리가 도덕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기주의가 아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두고 인간이 자기운명의 주인으로서 제 구실을 하려면 인간을 자꾸 발전시켜야 한다. 자기를 망치면 조직도 망치고 부모도 망치고 조직체도 잘못되게 한다. 독재가들은 술이나 마시고 남을 지배하면서 사는 것으로 이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보다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 충실하려는 것은 첫째의 도덕을 지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게끔 살아나가는 것이 자기자신에 대한 도덕이다. 그 다음에는 (국가)집단이 영생하도록 영원히 발전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집단의 일원으로서 실제로 지켜야 할 것은 애국심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애국심이 있으면, 애국심을 가지고 사업을 행동으로 했는지의 여부를 따져야 한다.

 

Ⅵ. 한(漢)의 3 영웅(傑): 유방의 포용력과 집단주의적 전략

 

유방(劉邦)이 정권을 잡고서 3사람을 칭찬했다고 한다(사마천의 말). 장량(張良), 소하(蕭何), 한신(韓信)이다.

 

"장량은 천막 속에서 여러 가지로 계산을 해서 천리 밖에서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장량이보다 못하다."(運籌帳幄之中 決勝千里之外 吾不如子房)

 

"소하는 국가를 잘 다스리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식량을 떨어지지 않게 하고 군량을 부족하지 않게 하는 것은 소하만 못하다."(鎭國家撫百姓 給餉不絶糧道 吾不如蕭何)

 

"한신은 백만의 무리를 이끌고서 싸워서 반드시 이기고 성을 빼앗는 것을 두고는 한신만 못하다."(連百萬之衆 戰必攻必取 吾不如韓信)

 

또 한 사람은 진평(陳平)인데 사실은 장량보다 지혜가 더 많았다. 항우가 힘만 셌지 머리가 없으니(생각을 못하니) 이무래도 안 되겠다 하여 빠져나와 도망을 쳐 나왔다. 황하에 나와 배를 타고 보니 해적떼들이었다. 강복판에 가서 사람을 죽이고서 물건을 빼앗는 것을 알고 눈치채자 돈전대를 강에다 넣어버리고 배 젓는 것이 힘드는 데 도웁고자 하니까 도둑때들이 알몸이 된 것을 죽일 필요가 없게 되자 살아남게 되었다.

 

유방부대에 들어가서 수소문하여 하운몽이라는 간부를 만났다. 항우 밑에서 범증과 함께 진평이 제일 머리 좋은 사람인 것을 알고, 모략이 대단한 것으로 추천되어 소장(장군)으로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번쾌 등 재직 간부들이 아주 성이 나서 뒤를 캐어보니 젊었을 때 형수를 강간하고, 이번에는 뇌물을 받았다는 결함이 발견되었다. 도덕을 지키지 않고 나쁜 놈으로 비판을 받자, 유방이 화가 나서 추천한 사람을 불러서 불만이 많다고 따지니까, 항우와 싸우는데 백이숙제가3) 필요합니까 모략가, 전략가가 필요합니까 하고 되물었다. 한편 진평한테 가서 말하자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젊었을 때 나쁜 일을 했고, 이번에는 모든 것을 빼앗겼기 때문에 뇌물도 받았다. 받아주지 않으면 다 버리고 농촌에나 가겠다. 지금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고, 이런 사실을 유방에게 고하니 그렇다면 소장이 아니라 중장에 배치하자고했다.

 

Ⅶ. 공산주의(사회주의)와 맑스주의

 

공산주의자들은 노동계급(무산계급)을 해방해야 된다, 해방하기 위해서는 독재를 실시해야 한다, 독재를 통해서 해방해야 된다고 했다. 생산수단(재산)은 가지고서 내놓지 않고 사람들을 착취하고 권세를 부리는데 생산수단까지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주장한 것이 사회주의자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선거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독재(특권)가 없어졌다. 그런데 이것이 처음의 공산주의이다.

 

맑스가 이것을 반대하고 폭력혁명을 주장했다. 자기 특권을 누가 버리자고 하겠는가? 그것을 때려 부수고 빼앗아야 한다. 이것이 맑스주의 공산주의다. 얼른 보면 그럴 듯 해 보이는데 그렇다면 자신은 어떠한가? 노동계급은 권력을 잡다 보니 특권으로 되었는데 그 특권을 내어 놓겠는가? 내어 놓는 것이 아니라 세습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단순한 것을 과오를 범했다.

 

특별한 존재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결백한 존재는 머저리란 말이 되지 않는가? 만약 그것을 위해 산다면 머저리다. 사회발전을 위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전체 집단의 영생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자기가 어떻게 보람차게 살아야 하겠는가? 이것을 생각해야지, 청렴결백이 다 무엇인가? 큰 선(善)에서 선악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에서 개인에게 충실한 것과 집단에 충실한 것이 도덕에서 기본이다. 개인을 중시하겠는가 집단을 중시하겠는가 하는 것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 그래서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의 장점을 결합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지금 민주주의를 개선하는 데서 이 방법이 하나 있다.

 

Ⅷ. 집단을 위한 (자기)갱신으로: 계승성(보수주의)과 혁신성(진보주의)의 결합

 

다음 한 가지 문제는 우리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동물은 발전에서의 계승성이 아주 약하다. 자기가 생활과정에서 얻은 생활력을 다 전달하지 못한다. 유전의 방법으로 조금 전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자신이 창조한 것을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 넘겨준다.

 

그런데 계승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이 몇 백만년 사는 것이 아니고 세대의 교체를 통해서 교체할 때마다 새로운 것, 혁신성이 첨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진대사가 필요하다. 신진대사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결국은 계승성과 혁신성을 결합시켜 나가는 것이다. 내부관계이다. 개인적 존재와 집단적 존재의 귀중성의 균형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다. 어느 한 편으로 치중하지 말라. 계승성과 혁신성을 배합해 나가라는 것이다.

 

이점을 우리가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변증법에서 중요시해야 한다. 여기까지 우리가 복습을 하고서 주체와 객체의 통일의 변증법을 고찰하여야 한다.

 

1) 사물이 결합도 되고 분열할 수 있어야 운동도 할 수 있고 발전도 할 수 있게 된다. 절대적으로 결합되어 버리면 움직이지 못한다. 운동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또 완전히 분리만 되어 있으면 결합이 안 되니까 발전이 없다. 거기에다 자기보존의 성질이 작용하니까 개별적 존재는 자기만이 보존하자고 하고 그래서 배척(斥力)을 한다. 모든 사물은 분열된 것만큼 차이성을 가진다. 세상에 그래서 꼭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차이성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이야말로 발전의 밑천이 된다. 모든 사물은 개체로서 연속적이면서 불연속적이다. 분리되어 존재하면서 결합되어 존재한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인간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는 존재와 집단과의 관계가 아주 뚜렷하다. 개인적인 동시에 결합되어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개별적으로 떨어져 있는 존재에다 생명력이 있다는 것을 아니까 별로 설명을 안 해도 된다. 자기가 생명이 있다는 것을 설명 안 해도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집단의 생명도 자기생명의 한 부분이라고 하는데 대해서는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아주 힘들어한다. 집단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부모와 자식 간을 보자. 부모의 결합이 없이는 생명이 태어나지 못한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보통 힘드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이 동물세계에서 나올 때부터 한 사람이 아니다. 집단이 우리의 공동의 생명이라고 하는 의식으로부터 출발해서 집단을 사랑하는 정신, 이것이 사회적 의식이다. 말하자면 집단주의 정신이고 본성이다. 집단주의 본성은 약하고 개인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본성이 강한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사회의 가장 큰 결점이다. 그래도 퇴보는 아니다. 먼저 개인의 생명부터 보존하고 그 다음에 집단의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래서 개인주의 민주주의가 먼저 발전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결함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고치자면 집단의 생명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통일해서 단결하고 협조하는 것을 첨부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철학은 힘들다. 개별과학은 어디까지가 비교적 명백하다. 철학은 인간의 구체적인 생활과 떨어진 가장 일반적인 것을 취급하기 때문에 힘들다. 더 생각하고 자꾸 생각해보면서 알게 된다. 모르면 질문도 못한다. 어렴풋이 좀 알기 때문에 질문할 수가 있다. 그러나 똑똑히는 알지 못한다. 질문하게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황장엽, 「인간중심철학의 몇 가지 문제」(서울: 시대정신, 2003), pp.334.

 

3) 백이숙제란 주나라 때 무왕이 주왕을 칠 때 "악을 악으로써 쳐서 되겠는가" 하고 반대한 사람이다. 왕이 말을 안 들으니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뜯어 먹고 죽었다. 강태공이 만류해서 죽이지는 않았는데 그 나라의 조를 먹지 않겠다고 하여 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뜯어 먹다가 죽었다.

 

글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맑은 사회와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시사타임즈>

<저작권자(C)시사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시사타임즈 홈페이지 = www.timesisa.com>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damah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