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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칼럼] 홍시와 유자 그리고 효도

[칼럼] 홍시와 유자 그리고 효도

▲박채순 박사 (c)시사타임즈

[시사타임즈 = 박채순 박사] 소학교 입학하기 전 어렸을 때, 할머니를 찾아 큰댁을 방문하곤 했다. 슬하에 손주를 여럿 둔 할머니가 다른 손주들이 보지 않을 때 내 손에 빨간 홍시를 쥐여주곤 하셨다.

 

그때의 내 할머니의 사랑과 부드럽고 달콤한 홍시의 맛은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또한, 자자일촌의 마을에서 10월경에는 조상들의 묘에 제사를 지내는 시제(時祭)가 많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시제 모시는 곳을 따라다녔다. 시제가 끝나고 나면 볏짚으로 만든 꾸러미에 떡과 과일 등을 골고루 싸 주셨다. 이 음식을 받기 위해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쫓아서 이산 저산 조상들의 시제에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 음식 중 꾸러미에 고흥에서 생산한 유자를 한 개씩 넣어 주셨다. 다른 음식은 곧 다 먹어치우지만, 형현할 수 없는 특별한 향을 가진 유자는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유자를 방안에 두고 딱딱하게 굳어져 까만색으로 변할 때까지 두고두고 그 향기를 맡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요즘은 맘만 먹으면 홍시와 유자를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어렸을 때의 홍시와 유자의 그 맛과 향을 잊을 수가 없다.

 

나이 들어 겨울로 들어서니, 어렸을 때의 할머니와 아버지 생각과 홍시 맛과 유자 향기가 그립다.

 

홍시와 유자를 생각하면 조선시대의 노계 박인로 선생의 조홍시가(早紅柹歌)가 떠 오른다.

 

​“조홍시가(早紅柹歌)”, 박인로(朴仁老, 1561-1642)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니

柚子(유자) 아니어도 품엄직 하다 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소반 위 붉은 감이 곱게도 보이는구나!

비록 유자가 아니라도 품어갈 마음이 있지만

품어가도 반가워 하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그것이 서럽구나

 

이 시는 홍시와 유자를 가지고 효심을 노래한 것이다.

 

노계 박인로 선생은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초반에는 임진왜란에 종군했던 무인(武人)으로 후반에는 독서와 수행을 했던 문인(文人)으로 활동했던 분으로 송강 정철과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시가작가로 불린다.

 

박인로 선생이 조선 시대에 영의정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워 후세인들에게 오성(이항복)과 한음(이덕형)으로 잘 알려진, 한음 이덕형에게서 감을 대접받자 돌아가신 어머니와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가 떠올라 이 시조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육적회귤의 고사는 회귤고사(懷橘故事)라고도 하는데,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왕 손권의 참모를 지낸 육적(陸績)이라는 사람에 관한 고사다. 육적은 6세 때 당시 권력자였던 원술(袁術)을 만났다. 원술은 육적에게 귤을 주며 먹으라고 했는데, 육적이 원술이 모르게 귤 세 개를 집어 품 안에 감추었다. 육적이 원술에게 작별인사를 올리는데 품 안에 있던 귤이 떨어져 굴렀다. 원술이 “육랑은 손님으로 와서 어찌하여 귤을 품에 넣었는가(陸郞作賓客而懷橘乎)”라고 물었다. 이에 육적은 “집에 돌아가서 어머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欲歸遣母)”라고 대답하였다.

 

이 고사는 원나라 때 곽거경(郭居敬)이 중국의 대표적인 효자 24명의 효행을 적은 『이십사효(二十四孝)』에 실려 있으며, 여기에서 유래하여 육적회귤은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역사 자료를 보니 육적은 삼국시대에 오나라에서 187년에 태어났다.

 

그가 원술집에서 어머니를 위해 유자 3개를 품 안에 넣었을 때가 6살이라고 하니, 지금으로부터 1827년 전인 193년의 일이다.

 

박인로 선생은 1561년에 태어나셨으니 조홍시가는 약 1,440년 전의 일이다.

 

홍시와 유자가 1천년이 훨씬 넘은 세월을 중국과 한국을 관통하는 역사에서 효와 문학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유자의 고장 고흥에서는 “탱자는 고와도 발길에 차이고, 유자는 얽어도 신사 손에 논다”라는 구전 민요도 전해진다. 1980년 이후에는 천연두가 지구상에 없어졌지만, 천연두 백신이 발명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이 천연두를 앓아 사망하거나 치료가 되더라도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남았다.

 

우리네 선인들이 유자를 천연두로 곰보가 된 얼굴을 향기 좋은 유자에 비유했고, 얼굴이 반반한 사람을 탱자에 비유한 표현이 흥미롭다.

 

글 : 박채순 박사

 

※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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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채순 박사 sisati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