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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균형적 발전을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균형적 발전을

 

[시사타임즈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c)시사타임즈

. 경제학의 현안 

 

경제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중요하다.

 

첫째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이 무엇인가?

둘째는 자본주의사회가 망하고 사회주의사회로 넘어간다고 하는 잉여가치학설이 왜 잘못 된 것인가?

셋째는 자본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넷째는 계획경제의 잘못된 것이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네 가지는 설명이 되어야 할 것 같다.

 

 

. 자본주의사회: 생산력과 생산관계

 

첫째로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모순이 무엇인가?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계로 설명해보자.

맑스주의는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관계에 조응한다. 생산력의 발전이 생산이 사회적으로 되면 소유관계도 사회적 소유로 되어야 한다. 추상적이다. 헤겔적 사고방식을 적용한다. 소유형태와 자연을 개조하는 생산력을 쓰는 문제와는 별개다. 봉건시대에 생산력을 쓰는 형식은 분산된 개인농이다. 그러면 거기에 맞는 소유형태는 무엇인가? 개인소유로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생산을 하기 때문에 소유도 개인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봉건사회에서 농노들은 소유를 못했다. 영주들은 대규모의 큰 땅을 혼자 소유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력이 발전해서 개인적으로는 공장을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만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집단적 소유로 하는가? 소유는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자본주의사회에 방대한 공장의 생산설비를 한 사람이 다 소유할 수 있다. 소유에 관한 문제와 생산이 사회적으로 진행되는가 안 되는가 하고는 별도문제다. 맑스주의자들의 생각이 맞는 것인가? 그런데 이 사람들은 생산이 사회화되게 되면 사회적인 소유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단적으로만 노동이 진행되면 집단적 소유로 된다는 것이다.

 

사실은 원시(공산)사회에서는 집단적으로 살지만 소유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아직도 미분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봉건사회에서는 생산이 개별적으로 분산되어 있었지만 사회적 생산으로 변했다. 그런 만큼 사회적 소유, 집단적 소유가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이의 잘못을 지적하면 맑스주의자들은 찬성하지 않는다.

요점은 이를 반박하려면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다 설명하여야 한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생각할 수 있다. 생산력을 이용하는 생산이 사회화되었는가 사회화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와 소유가 사회적 소유인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봉건사회에서 생산이 사회화되지 않고, 개별적으로 생산해도 소유는 한 사람이 방대한 것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방대하게 사회화되어 있는 생산력을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 자본가 개인이 소유할 수 있다. 소유는 자본가에 속할 수 있다. 그것을 반드시 국가가 소유하고 집단이 소유하여야 된다는 법은 없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자들은 그것을 가지고 자본주의사회는 반드시 멸망하고 사회주의사회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한 가지 문제는 얘기한 셈이다.

 

 

. 잉여가치학설과 노동가치

 

둘째 문제는 잉여가치학설이다. 엥겔스는 이것이 맑스가 발견한 2대 발견 중의 하나라고 했다. 첫째는 유물사관이다. 황장엽 선생은 2대 발견이 아니라 가장 큰 실수로 생각된다고 하였다. 잉여가치학설이란 노동계급도 상품이다. 노력도 상품으로서 사람들이 사는데, 이 상품은 기계를 사게 되면 창조를 못한다. 사람만이 창조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를 사서 설비를 산 것은 고정자본이라고 했다. 변화가 없는 고정자본이다. 노동력은 가변자본이다. 노동력을 사게 되면 이것이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게 된다. 가치를 창조한다.

노동력의 가격, 노동력의 가치는 어떻게 되는가?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건, 노동력을 가지고서 댈 수가 없으니까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얼마를 먹어야 하고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떤 집에서 살아야 하고 이런 것에의 비용이 노동가치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상품에 필요한 물건에 대한 가치가 노동력의 가치다.

 

이것부터 틀린 것이다. 노동력을 고용할 때 그 사람의 능력을 따지지 하루에 먹고 살 수 있는가 하는 이런 것을 따지게 되겠는가? 천재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른다. 가치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다보니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쓴 비용이 가치가 됐다. 그러므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데 쓴 비용을 초과한 것, 같이 생산한 것을 지불하지 않은 부분을, 노동자에게 다 돌려주어야 하는데 돌려주지 않고 남아도는 몫을 잉여가치라고 한다.

노동자가 살기 위해서는 100원이 필요하다. 100원이 상품으로서 노동력의 가치다. 그런데 노동력을 써서 생산하는데 생산의 결과 10배의 가치를 생산했다. 1000원의 가치를 생산했다 할 때는 노동자에게는 100원만 지불하고 900원은 자본가가 몽땅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잉여가치다. 가치는 노동자가 다 창조했는데 노동자가 사들인 가치는 그가 먹고, 사는데 필요한 것밖에 안 주고 다른 것은 다 빼앗았다는 말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가 발전해갈수록 상대적으로 자본가의 수입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노동자는 절대적으로 자꾸 빈곤화된다. 물건은 비싸지고 사람의 욕망은 자꾸 커지고 그런데 노임은 올라가지 않고 빈궁해지는데 이것이 절대빈곤이다. 이것이 '절대적 빈곤화의 이론'이다.

처음에 배울 때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하는가? 역사가 발전하면 사람들이 생활수준이 높아지는데 절대 빈곤화되는가? 그런데 여러 가지로 변명을 하는데 혼란스럽다.

근본적인 잘못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지금 발전된 기업들, 공장에서 노동자가 직접 참여하는 것은 4%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전부, 기계가 생산한다. 그런데 이들은 기계는 가치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계산할 때 기계는 감가상각만 생각한다.

 

그러면 지금 공장에서 기술수단들이 창조해 나가는 것이 노동자가 창조했다고 보는가? 감시밖에 한 것이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기계수단 자체가 인간이 창조한 것으로 인간의 노동력을 객관화한 것이다. 기계가 자기 마음대로 생산하나? 인간의 창조력이 객관화됐기 때문에 기계자체가 생산적이라는 것을 모른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사람이 절대 하지 못하는 것을 한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어떻게 주장하는가? 100원의 노동력을 사가지고 1000원의 이익이 낳다 하면 내가 기술수단을 자본으로 사왔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나한테 다 돌려야 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런가? 기술수단들은 누가 만들었는가? 과학자들이 만들었다.

 

정신노동을 한 사람들, 인간개조를 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 기술이 발전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인간이 기술교육을 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데 사회가 계속 싸움만 하고 있어야 되겠는가? 정치가들이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둑도 잡고 질서를 유지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가 거기서 나온 이득을 자기 혼자서 다 가진다면,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고 하는 인식이 없어서 그러하다.

더구나 한심한 것은 노동자가 같이 다 생산했다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현실적으로 기술수단들이 다 만들어냈다.

그래서 잉여가치학설이라고 하는 것도 아주 잘못된 것이다. 산 노동을 가지고서는 가치를 그렇게 창조하지 못한다. 기계기술수단으로 인간이 창조하고 역사적으로 체현된 현 시대만이 아니라 대를 이어 창조된 인류공동의 재부가 창조한 가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요구의 이익에 맞게 분배를 해야 한다. 그것을 노동자가 다 창조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자본가가 다 먹겠다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래서 자본가에 대해 정치적인 관리가 반드시 필요하고 세금을 더 받아야 한다. 국가가 없이 자본이 생산되는가?

 

 

. 자본론: 자본의 유기적 구성

 

세 번째로 자본론에 대해 얘기해 보자. 자본론은 3권으로 되어 있다. 책의 구상은, 상품을 거기에 체화된 노동의 양에 따라 상품의 가치가 결정된다. 상품은 교환을 한다. 교환을 통해서 사용가치와 (실물)가치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 각각 다른 사용가치를 가지고서 교환하려니까 거기에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가? 공통적인 것으로 어느 상품에 더 많이 노동이 체화되어 있는가 하는 것에 따라서 가치가 결정되어야 한다. 교환에서는 가격으로 나타난다. 직접교환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교환에 사용되는 특수한 상품이 필요하다. 이것이 화폐다. 공통적으로 교환에 이용되는 특수한 상품이 화폐다.

상품의 교환이 자꾸 진행되면 화폐의 가격이 자꾸 올라간다. 화폐는 아무 것이나 교환해서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화폐의 권위가 자꾸 올라간다. 화폐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노동력을 샀다. 생산수단을 샀다. 이렇게 해서 제품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본이 생긴다.

그전에 상인들은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사다가 비싸게 팔았다. 그런데 화폐의 힘이 강화되면서 화폐를 많이 가진 상인이 노동력을 사고, 생산수단을 사고, 자체로서 생산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자본이 나온 것이다.

 

화폐자본이 생산자본으로 전환되었다. 자본주의 생산이 어떻게 되어 구성되는가 하는 것을 설명했다. 기본내용은 상품의 교환이 발전하면서 화폐가 가지고 있는 권위가 높아졌다. 화폐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화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한울님과 같다. 화폐로 인간의 노동력도 상품으로 되고 기계도 사고 그리하여 직접 상품을 생산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이 되었다.

 

앞의 자본이 생산자본으로 전환되었다. 생산자본은 노동력과 생산설비다. 생산설비와 노동력 사이의 비중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했다. 가령 1억원의 생산수단을 사고 노동력은 천만원어치를 샀다고 한다면 이는 유기적 구성이 아주 높은 것으로 된다. 노동력을 천만원 주고 쓰고 고정자본인 기계설비를 천만원 하게 되면 유기적 구성이 아주 낮은 것이 된다.

유기적 구성이 높을수록 잉여가치는 더 나오는데 이윤은 적게 나온다. 왜냐하면 고정자본은 이윤을 생산 안 한다고 본다. 가변자본만이 이윤을 생산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자본을 투자하는 것은 고정자본에 많이 투자하기 때문에 이윤율이 약하고 저하된다.

그래서 화폐자본이 생산자본으로 전환되고 생산자본이 생산과정을 통해서 상품으로 변화된다. 상품자본으로 된다. 상품자본이 다시 화폐자본으로 된다. 화폐자본이 다시 생산자본으로 전환되고 이렇게 자본이 어떻게 전환되는가 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 자본론이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골치가 아프지 않다. 자본론 3권은 무엇인가? 화폐자본가, 금융자본가, 생산자본가, 산업자본가, 은행자본가, 지주 등 여러 가지 이윤을 먹는 자본가 집단의 종류가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 사회가 생산한 이윤을 나누어 가지는가 하는 것을 3권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읽기에 머리가 아프다. 한번은 싫증이 나서 집어치울까 하다가 겨우 읽었는데, '지대론'같은 것은 이치는 간단한 것인데도 정말 쓸데없는 것이 많다. 어느 자본이 이윤이 자꾸 나게 되면 한곳으로 기울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이 운영되다 보면 결국은 자본을 낸 것만큼 다 평균적으로 나누게 되는데 이것이 '평균이윤율'이라는 것이다.

산업자본가만이 이익이 난다면 다 그리로 쏠린다. 그러면 다른 것은 사업할 사람이 없다. 다른 것은 더 이상 생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원료를 팔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자본가들이 다 균형에 맞게, 평균이윤율에 자본을 제공한 것만큼 얻어 먹게 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래서 헤겔의 논리학책과 맑스의 자본론을 읽지 말라고 한다. 머리만 아프다. 그럼 자본론을 가지고서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했다. 어떻게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1권은 유익하다. 철학적인 맑스의 사상이 많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2권은 작은 책이다. 내용은 단순하다. 제일 복잡한 것이 3권이다. 1권보다 더 두껍다. 맑스는 1권만을 출판하고 사망했다. 맑스의 글씨는 악필이 되어 누구도 모르는데 둘째 딸만이 알았다. 엥겔스가 둘째를 데리고서 2, 3권을 출판했다. 엥겔스가 편집을 했지만 기본사상은 맑스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봉건 말기 상품화폐가 자꾸 발전하면서 거기서 상인이 화폐를 많이 가지게 되었는데, 구차스럽게 자꾸 돌아다니면서 상품을 사지 않고, 직접 노동자도 사고 생산수단도 사게 되면서 생산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설명하면 되는 것인데 그 무슨 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 때문에 화폐가 나오게 되고, 화폐가 자본으로 전환된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설명하였다.

그래서 상품에 대해 물신숭배가 있다. 물신숭배를 하는 것은 맑스 밖에 없다.

 

 

. 경제의 두가지 법칙: 가치법칙과 계획경제의 이론

 

넷째로 계획경제가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 계획적 균형적 발전에서 균형적 계획적 발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계획적 균형적 발전과 가치법칙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도 자본주의 경제를 비판하는 것이 기초가 되어서, 후대가 만들어놓은 것이 사회주의경제이다. 거기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도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견지에서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경제는 경제생활에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것으로 시장경제이다. 집단주의경제의 계획과 지시경제와는 구분된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주권재민이다.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국가생활에서 다 같이 잘 살자하는데 왜 민주주의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계급주의 집단주의(민주주의)는 그 방법이 계급투쟁과 독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두 가지가 잘못된 것이다.

지시경제는 집단주의에 개인주의를 말살하는 방향의 집단주의다. 공산주의 자체는 특히 맑스이전에는 공상적 사회주의로서 맑스 개인은 이런 사상에서 출발하였다. 민주주의의 방법에서 출발하였으나 그러나 계급적으로 지배하고 타도하는 방법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집단주의가 독재로 나가는 데 반해, 집단주의를 반대하는 개인주의는 개인이기주의로 나간다. 인간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주의가 집단주의를 배격해서도 안 되고 집단주의가 개인주의를 간과할 수도 없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올바른 이해는 개인주의의 장점과 집단주의의 장점을 결합하여야 한다. 이 양자를 결합시켜나가는 것이 정치의 임무. 동물은 이 양자를, 즉 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시키는 집단주의가 본능적으로 움직이지만, 인간은 목적의식적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정치가 발전해야 한다. 가장 발전된 정치는 개인주의의 다양성, 창조성과 집단주의의 통일성과 협력성으로 결합하는 것인데 지금은 매일 싸우기만 한다.

오늘날 전반적으로 개인주의 민주주의가 발달하였지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것이 부족하다.

 

경제분야에서는 두 가지 법칙을 말할 수 있는데 위의 계획경제에 이어 다른 하나는 가치법칙이다. 가치법칙은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체화된 노동의 크기에 의해서 구현된다는 것이다. 상품교환을 두고 사회의 평균노동시간에 의해서 가치가 교환된다. 그러면 수요와 공급의 차이에 따라서 가격과 가치가 변동되는 것은 어떻게 보겠는가?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원래는 상품에 체현된 노동량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된다.

자연이 아무리 귀중해도 노동이 투자되지 않으면 가치가 일어나지 않는다. 가치법칙에 따라 기술이 발전하게 되고 공산주의는 가치법칙이 작용하지 않으므로 상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가치는 없지만 가격은 있다.

방직공업에서의 이윤이 기계공업에서의 이윤보다 많이나면 그쪽으로 흐른다. 시장경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가치방식의 손이다. 수요를 두고 생산자가 서로 경쟁하는데 사회적 수요가 얼마나 되는지 타산을 못한다. 그래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는 공황이 온다. 여기서 맑스주의자들은 첫 번째 공황을 1825년으로 본다. 그로부터 10년을 주기로 계속되었다고 본다.

공황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을 나타낸 것으로 여기에 공산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 생산하는 것과 소비하는 것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생산을 여럿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여 국민들의 소비(수요)에 필요한 만큼 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획경제의 기본이론이다.

  

 

 

. 집단주의 경제의 두가지 모순: 3대 생명력의 통일로

 

집단주의경제를 옳게 실시하려면 두 가지 잘못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경제전문가, 경제인들 대신에 국가관료가 경제를 운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큰 잘못이다. 이해관계를 타산해야 하는데 계급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하다보니 경제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다른 하나는 개인주의를 말살하는 방향에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적 균형적 발전법칙말고, 균형적인 계획적 발전법칙이라 말하고자 한다. 계획한다는 뜻은 생산적 수단과 생산적 소비의 균형으로 중공업과 경공업의 균형을 맞추자는 뜻이다. 균형은 제쳐놓고서, 이런 것을 독재의 방법으로 했으니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의 요구를 실현하면서 즉 인간의 3가지 욕망인  정신적 욕망  물질적 욕망  사회협조적 혁명, 이 세가지 생명력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 발전의 정치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자면 개인주의적인 개인의 생존과 발전, 집단의 생존과 발전의 이익에 맞게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 것과, 인간의 정신적 요구, 물질적 요구, 사회협조적 요구를 단결, 결합, 협력해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다.

 

 : 노태구 경기대 명예교수

 

 이 기사는 시사타임즈의 공식입장이 아닌, 필자의 견해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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